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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부대원들은 처음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가 점차 그 소문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리스트에는 이 센터에서 차출할 최정예부대의 이름이 실려 있으며 개중 세 명의 이름에는 중요 표시가 되어 있다는 상세한 소문.

요점은 중요 표시가 된 인물들이 사실 개조인간, 소위 슈퍼휴먼이었다는 데 있었다. 훈련원 사람들은 장난처럼 서로를 슈퍼휴먼이라고 의심하다가 점차 장난의 횟수를 줄여갔다.

맹랑한 소문에 아무도 웃지 않게 된 것은 본부로부터 기어코 사람이 파견된 순간부터였다. 중대 발표가 있겠습니다. 강당으로 소집한다는 방송이 나오자 거짓말처럼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이제 농담은 끝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

 

 

 

[ Who's who ]

 

-superhu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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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은 기억력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로 흐릿한 편인 도영의 기억들 가운데서도 종종 또렷한 것들이 있다. 가령 이를테면 재현의 얼굴. 도영은 연단에 선 사람의 얼굴과 기억 속 재현의 얼굴을 이렇게 저렇게 대조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의심하려고 해도 더할 나위 없이 재현이었다.

정재현이 왜 여기 있을까? 도영은 그게 제일 궁금했으나 도영을 제외한, 이 강당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재현보다 재현이 하는 말에 더 관심이 있었다. 도영 옆에 서서 연단을 향해 못이라도 박아둔 듯 미동도 없는 영호 역시 그랬다. 재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 때문에 영호는 지금 머리가 다 아프다. 영호는 방금 들은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곱씹어보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재현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똑바로, 전부 들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충격과 분노와 의심 같은 것들이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흩어 놓았기 때문이다. 다들 장황한 발표 내용을 띄엄띄엄 들었다.

그렇게 대강 들은 내용들은 대충 다음과 같았는데,

"훈련대원 여러분의 노고와 성취에 감사하며 본부에서 중대한 발표가, 지금껏 공개된 적 없는 비밀 실험, 여러분 사이에 심어 둔 개조인간의 새로운 프로토, 인간 상호 작용 능력을 검증하기 위해, 훈련대원들은 뉴 타입 개조인간, 소위 슈퍼휴먼과 훈련을 함께 해왔음을, 이 자리를 빌어 밝히는 바, 이는 실험의 막바지 단계에서 투입하는 또 하나의 변인으로, 본 실험을 통과한 뉴 타입 슈퍼휴먼은 기존의 공공재적 개조인간의 용례를 넘어서,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개체로서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것을 기대..."

"따라서 부대원 중 모든 개조인간의 신원이 밝혀질 때까지 실험은 계속될 것입니다."

영호는 연단의 발표자가 말을 마치자 마자 도영을 돌아보았다. 넋이 나가서 연단을 보고 있는 도영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도영에게도 충격적인 소식일 것이다. 영호는 도영으로부터 개조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도영이 온 곳에서는 개조인간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다친 군인들이 주로 실험에 응했다. 영화처럼 강철 팔이나 탄소섬유 근육을 갖게 되지는 못했지만 매끄럽게 복원되거나 강화된 신체를 가지고 돌아와서 사회의 엄연한 일부분이 되었다. 도영은 그렇게 신체의 일부분을 기계로 대체한 사람들, 슈퍼휴먼들이 군대나 경찰에서, 실험실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도영이 있던 곳에서도 개조인간들은 엄연히 예외로 취급되었다.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는 외양과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서 구분이 되지 않는 개조인간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영호가 도영의 어깨에 손을 올려 꼭 잡아주었다. 도영은 그 때까지도 발표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발표자의 여운에서.

“질문 있으시면 받겠습니다.”

재현이 고개를 들고 좌중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손을 들지 못했다.

“실험에 관한 이야기는 개별 면담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도영은 재현이 혹시 자기를 발견할지, 발견하게 되면 눈을 피해야할 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로 어쩔 수 없이 재현을 눈으로 쫓았다. 질의응답 시간의 어색한 침묵을 깨면서 재현은 그냥 앞만 보고 연단을 걸어 내려갔다. 도영은 그제야 영호가 자신을 꼭 붙들고 있다는 것을, 하얗게 질린 얼굴을 걱정스레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영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이러는지? 그러나 섣불리 강당을 벗어나지 못하고 웅성거리고 있는 훈련대원들처럼 도영의 마음도 쓸데없이 부유하기만 했다. 정재현이 이 곳에 왔다. 도영은 영호의 손을 꼭 잡으면서 그 문장을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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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해?”

도영의 시야에 영호가 가득 들어찼다. 도영은 영호의 갈색 눈동자가 찬찬히 움직이며 자신을 살피는 것을 보았다. 영호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전까지 심장이 쿵쾅댔던 것 같기도 하다. 도영은 영호의 기억을 헤집던 참이었다. 도영이 좋아하는 일이다. 영호의 곁에 누워서 옛날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는 것. 영호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군부대에 있던 시절이나 도영을 처음 본 날의 기억 같은 것들을 도영에게 들려주곤 했다. 그러면 보통 도영은 궁금한 것들을 물어봐 가며 열심히 영호의 기억을 주워담았는데 오늘만큼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영호는 맞닿은 도영의 가슴이 쿵쿵 울려서 평소와 같지 않음을 알았다. 도영이 침을 꼴깍 삼켰다. 도영은 요즘 부쩍 입이 마른다.

“형은?”

 

영호는 대답 대신 도영의 머리칼을 넘겨줬다. 불안 때문인지 차갑게 식은 귓바퀴도 쓸어주고 영호가 좋아하는, 도영의 길고 예쁜 목을 따라서 굳은 어깨까지 부드럽게 만져 주었다. 영호의 손길을 따라 도영의 몸이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그러나 눈빛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적어도 영호가 보기에는 그랬다. 영호는 도영이 그렇게 예민한 직감을 드러낼 때가 있다는 걸 잘 안다.

 

“도영아, 아무 문제없을 거야.”

 

그럴 때면 영호는 도영의 믿는 구석이 되고 싶다. 도영이 자신을 떠올리면 어떤 순간에도 안심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미 도영이 어느 정도는 그렇다는 걸 잘 알고 있기도 했다. 영호는 옆에 누운 도영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가슴에 손을 대면 희미하게 느껴지는 맥동. 심장이 뛰는 지점을 찾으려고 가슴께를 더듬는 영호의 손을 도영이 낚아챘다. 손가락을 얽어 몸이 바짝 붙을 때까지 잡아 끈다. 반대쪽 손은 영호의 목 뒤로 감았다. 코끝이 닿는 거리까지 영호와 도영이 가까워졌다.

“하긴, 형이 있으니까 나는.”

“그럼 든든하지”

“뽀뽀나 해줘.”

도영이 입술을 내밀고 쪽쪽 소리를 냈다. 눈빛이 한결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영호는 도영의 어깨 너머로 끌려갔던 손을 가져와 도영의 입술을 꾹 눌렀다.

“뽀뽀로 안 끝나는데?”

그러면 도영이 구겨진 입술에 아랑곳 않고 웃는 것이다. 영호는 비로소 안심이 됐다. 손을 떼고 도영의 얼굴에, 가능한 많은 구석에 뽀뽀를 퍼부었다.

“안 끝나면 더 좋지.”

도영이 영호의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영호는 도영의 호흡이 가빠지도록, 허리를 들썩거리도록, 얇은 잠옷이 이리저리 구겨지다가 결국 성급하게 벗겨지도록 입을 맞췄다. 좁은 침대 안에 두 사람의 몸과 이불과 잠옷과 속옷이 꼬깃꼬깃 들어찼다. 도영은 영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문득 며칠 전 재현의 등장과 재현이 전한 말들과 그 말들로 인해 자신의 세상에 가득 차버린 불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영호를 끌어안을 때면 느껴지는 단단하고 따뜻한 확신. 의심의 여지가 없는. 도영은 그런 것에 갈증을 느꼈다. 영호가 저를 더 꽉 안아줬으면 싶었다.

 

도영은 영호의 인생에 갑자기 등장했다. 이 곳에서 처음 만났으니까. 영호는 입소 날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도영을 한 눈에 발견했다. 영호는 그 날, 그 장면을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잘 간직하고 있었다. 심드렁하게 훈련원 강당을 둘러보던 도영의 얼굴. 그리고 지금 이렇게 맨 살을 마주 대고 침대에 나란히 누울 수 있게 되기까지 영호는 고된 훈련만큼이나 다사다난했던 본인의 사랑을, 지나온 궤적을 종종 되짚어 보곤 했다.

영호와 도영이 있는 곳은 살아있는 것은 진작 멸종해버린 황량한 땅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생존센터였다. 지구에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더 버텨보려고 만든 일종의 실험실. 남아있는 국가와 단체들이 너도나도 이 곳에 사람을 보내 극기를 다퉜다. 인간이 앞으로 어디까지 고생을 더 해야 멸종을 면하고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이 센터에 차출되어 온 사람들은 그 궁금증을 대신 해결해주는 역할을 했다.

물론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죽어 나가던 시절을 지나 이제 센터에서는 제법 인간의 한계에 대해 감을 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센터에서 훈련을 받는 부대원으로 사는 것은 더 이상 비극에만 머물지 않았다. 영호와 도영은 이런 안정기가 시작될 무렵 센터로 전입했고 차근차근 훈련원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도영은 멀리서 왔다고 했다. 도영은 바다 건너의 땅은 전부 얼어붙은 줄 알고 있는 영호에게 그 곳에도 아직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많다면서 자신의 고향도 거기 있다는 얘기를 해줬다. 고향이라는 말은 묘하게 낯설게 들렸다. 영호는 고향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지금 그런 말이 소용이 있나? 도영은 그 후로 고향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지만 영호는 종종 도영을 보며 고향을 떠올렸다.

센터에서의 일상은 영호가 '고향의' 군부대에서 보냈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 훈련을 받는다. 훈련은 그 때 그 때 달랐다. 어떤 임무가 있어 수행해야 할 때도 있고 그저 체력훈련 마냥 땀만 쭉 빼는 일도 있었다. 영호는 어떤 경우던 묵묵히 했다. 훈련 성과가 좋은 편이었다.

반면 도영은, 도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영호와 반대에 서 있다. 영호는 도영의 반짝이는 순간이 아니었다. 도영은 뒤늦게 영호의 존재를 깨달았다. 도영에게는 영호 역시 이 곳에서 적응해야만 하는 수많은 것들 가운에 하나였다.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고 나서야 자신이 영호를 걱정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앞으로 어지간하면 영호를 걱정시키는 일은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영호의 손을 잡기로 했다.

도영은 기숙사를 옮기면서 영호와 함께 살고 싶다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처음 방을 같이 쓰게 된 날 영호가 같은 티셔츠를 개고 또 개는 모습을 보면서 몸 어딘가가 간지러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도영은 영호가 자신을 좋아해주는 것이 좋았다. 그건 도영이 먼 곳에서부터 여기까지 밀려오게 한 불안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책이었다. 영호를 끌어안고 버티는 것.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어제 3번 훈련장에서 작은 사고가 났는데 다친 사람들이 있나봐"

도영은 영호가 왜 그 얘기를 꺼내는지 궁금했다.

"다쳤다고? 누가?"

"그냥 훈련 받던 대원들."

영호는 시원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도영은 영호가 답지 않게 꾸물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좀 알아듣게 얘기해 줘."

"작은 폭발이 있어서 두 명은 날아온 파편에 찰과상을 입고 한 명은 머리를 부딪쳐서 기절했대.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고 기절했던 대원도 병원에서 금방 정신을 차렸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영호는 잠시 말을 골랐다. 말하기 곤란한 내용을 전해야 하는 것처럼.

"이제 우리가 그 대원들이 슈퍼휴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는 거야."

도영은 대답할 말을 고르지 못했다. 영호가 뜸을 들였던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피부가 찢기고 의식을 잃은 대원들은 시험을 통과한 셈이다. 상처에 드러난 뻘건 속살이나 죽음의 문턱에서 찍은 자기공명영상 같은 것들이 새로운 인증서가 될 것이다. '모든 개조인간의 신원이 밝혀질 때까지 실험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제 이건 그냥 실험이 아니야."

영호는 심각한 표정의 도영을 끌어당겨 품에 안아 주었다. 사실은 모든 것은 처음부터 게임이었다. 모두가 늦게 깨달은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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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 센터를 가득 메우고 있다.

훈련대원들은 살아남거나 진짜 인간임을 증명 받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며칠 전의 작은 사고가 부대원들을 각성시켰다. 눈에 띄게 혹독해진 훈련들 때문에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었지만 다들 딱히 불평할 처지는 못 되었다. 실패한 실험들은 면죄부가 되었다. 슈퍼휴먼이 아니라는 증명. 부대원들은 혼란스럽지만 새로운 질서를 빨리 받아들이고 리스트에서 필요 없는 이름을 차츰 지워가려는 본부의 결정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도영은 훈련 중간중간 휴게실에서 부대원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들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절박한 농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묵적으로 금지되었던 웃음이 다시금 돌아오고 있다. 도영은 그게 자학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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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 좀 해."

"그거 너무 진부한 대사 아니냐."

재현의 중대발표가 센터를 휩쓸고 지나간 지 일주일 째 되던 날 이었다. 도영은 기어코 재현과 단 둘이 마주할 구실을 만들고 말았다. 요즘 통 집중을 못한 탓에 훈련 실적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만 것이다. 재현은 연구원 소속이니 도영의 상태를 확인하고 점검할 의무가 있었다. 호출이 올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던 도영이었다.

얘기나 좀 하자고 도영을 붙잡았던 재현은 그러나 연구실에 도영과 나란히 앉아서는 아무 말 없이 차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도영은 재현이 하려는 말이 차트에 적혀있기라도 하나 싶어 힐금거렸지만 차트에는 늘상 보던 수치들과 빨간 글씨로 체크된 항목들, 지시 사항과 지난주의 형편없는 실적 등등이 표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도영이 답답한 티를 낸다. 재현은 도영의 이런 채근에 약했다. 적어도 예전의 재현은.

"할 얘기 있으면 빨리 하자."

지금의 재현은 달라졌나? 도영은 여전히 차트에서 눈을 떼지 않는 재현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귓바퀴도 붉혔다가 손가락도 꼼지락댔다가 난리를 피우던 앤데.

"형 요즘 수치가 좋지 않네."

지금의 재현은 시시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수치 안 좋단 얘기나 하려고 불렀어? 그런 거는 나도 매일 확인해 너네 연구원에서 차트를 무슨 아침신문처럼 메일로 쏴 주잖아. 재현아 우리가 이런 걸로 시시덕거릴 사이는 이제 아니지 않겠니."

재현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도영은 기가 찬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펜 뒤꽁무니를 차트 화면 위로 톡톡 두드리면서 도영의 질타에는 꿈쩍도 않는 재현이다.

"너 진짜 나 속터져 죽었으면 해서 여기 온 거야?"

"형."

재현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도영은 일주일 전 멀리 연단 위에 서있던 얼굴 말고 다시 예전만큼 가까운 얼굴을 마주하게 됐다. 도영이 익히 아는 얼굴, 익히 아는 눈빛과 익히 아는 호칭이었다.

"형 요즘 부진한 이유가 뭐야? 어디 안 좋은 거야?"

"짜치지 말고 진짜 궁금한 거 물어봐."

"진짜 궁금한 거야. 수치가 왜 이렇게 됐어?"

도영은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을 고쳐먹었다. 익히 아는 얼굴에 익히 아는 호칭인 건 맞는데 익히 아는 눈빛은 아니다. 재현의 눈빛이 낯설었다.

"나도 몰라. 너 와서 이런 얘기나 자꾸 하니까 그런 거 아냐. 요즘 다들 뒤숭숭해서 실적 안 좋아. 다른 대원들 차트도 봐봐."

"정말이지? 그냥 심란해서 그러는 거지?"

"그럼 차트 앞에 두고 거짓말하냐?"

"그럼 됐어."

도영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재현은 차트를 정리해 책장에 꽂아 넣었다. 도영은 예상보다 싱겁게 끝난 이 면담이 영 찜찜하기만 하다.

"형 제발 몸 챙겨가면서 해. 알았지?"

재현이 연구실 가운을 벗고 자켓으로 갈아입으며 말했다. 도영은 아까 재현의 눈빛에서 읽은 낯선 인상에 대해 설명해보려 애쓰고 있었다. 3년이면 서로 그렇게 달라질 시간인가? 그러나 재현의 다른 모든 것은 거의 그대로였다. 머리 모양까지도 3년 전과 거의 흡사하다. 밥도 잘 먹고. 하면서 웃어보일 때는 3년 전 어느 날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재현아."

재현이 연구실 문을 잡고 도영이 나오길 기다리다가 돌아봤다. 왜? 눈으로 묻는다.

"나 때문에 온 거야?"

재현은 대답대신 도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옛날의 재현은 속마음을 쉽게 들키는 성격이었는데, 눈앞의 재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알기 힘들었다.

"나 만나는 사람 있어."

"알아. 같은 팀 서영호."

도영은 선뜻 발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영호와의 사이를 아는 사람은 훈련원 내에서도 많지 않았는데, 이제 막 본부에서 발령을 받은 연구원인 재현은 그걸 알고 있다. 재현은 도영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음을 알았다. 오늘은 이쯤 해두자고 생각하는 재현이었다.

"형, 나는 그런 얘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니야."

재현은 도영에게 빨리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제발 다치지만 마."

재현은 도영을 연구실 앞에 세워 둔 채 문을 잠가버리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도영은 잠긴 문 앞에 서서 재현이 사라지는 모습을 멍청히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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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타는 것은 도영뿐이었다.

재현은 도영에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굴면서도 동시에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말해주는 법이 없었다. 도영은 훈련 일정이 바쁘고, 재현 역시 놀러 온 것은 아니라 두 사람이 센터에서 우연히 마주칠 일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도영은 그저 보이지 않는 재현으로부터 아무도 시키지 않은 압박을 느끼는 중이었다.

매일같이 연구원들의 면담이 이어졌다. 실험인지 게임인지 아무튼 그 계획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도영도 틈틈이 검사를 받고 체력훈련을 하고 차트의 수치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재현과의 면담 이후로는 도영도 신경써서 수치 관리를 하는 중이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까 일상이 지속되기만 했다면 도영이 재현으로부터 받는 압박이 그저 같은 수준의 힘을 유지하도록 두었다면, 안정된 상태의 도영이 부서지거나 다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엔 너무 수상한 시국이었다. 또 부상자가 나왔고 부상자의 혈액에서 코를 찌르는 기름 냄새가 나면서 안정되어가던 모든 것이 흔들렸다.

 

센터는 다시금 충격에 휩싸인다. 항상 중간 정도의 퍼포먼스를 보이던 대원이었다. 실력이 꾸준하고 점진적인 면이 장점이었지만 슈퍼휴먼의 업적이라고 할 만 한가. 슈퍼휴먼은 뛰어난 신체적 자질이 뒷받침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나. 모두들 의아했지만 그러나 어찌됐건 그 대원이 스스로 이 실험을 위해 그간 신분을 숨겨왔다고 고백까지 했으니 리스트의 한 칸이 지워진 것은 확실했다.

하필 영호가 먼 곳으로 출장을 간 날이었다. 도영은 자꾸 커지는 불안을 느꼈다. 첫 번째 슈퍼휴먼, 도영과도 종종 같은 훈련실을 썼던 대원이었다.

강당에서 짧은 브리핑이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도영은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안 내키는 발걸음으로 강당을 향했다. 그리고 재현이 연구실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연구원들은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도영은 문득 새삼스럽게 재현이 연구실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연구실에 있는 사람. 어쩌면 재현은 리스트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재현아!"

도영이 재현을 불러 세웠다. 연구원들의 발걸음 소리가 멎었다. 도영을 돌아보는 재현은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성큼성큼 걸어 도영의 앞으로 온 재현이 어떻게든 연구원들과 도영 사이를 막아서려고 애를 썼다.

"왜 이래?"

"급한 일 아니면 이따 얘기하자. 내가 형 방으로 갈게. 저녁 9시."

도영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지령이라도 전달하듯 약속을 잡은 재현이 멀어지고 나자 복도에는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대원들은 강당에 브리핑을 들으러 갔을 것이고 연구원들은 브리핑을 듣거나 다시금 연구실로 돌아갔을 것이다. 도영은 브리핑에는 입맛을 잃었다. 침대에 좀 눕고 싶었다. 9시면 재현이 방으로 쳐들어오겠지만, 무엇보다 지금 영호는 멀리 있지만, 그래도 침대에 누워서 영호가 머리를 쓰다듬어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도영은 조용한 복도를 가로질러 기숙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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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타입 개조인간, 소위 슈퍼휴먼의 능력과 효용에 대해서는 아직 많이 알려진 바가 없지만 이번 실험을 통해 일정 부분 이해를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신체 능력의 강화에만 머물러있던 기존 개조인간들의 한계를 극복하고 개조인간이 인간 사회 속에서 엄연한 구성원으로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본 실험이 기획되었습니다. 이제 본 실험을 통해 누구나 신체 개조의 필요와 욕망 속에서 자유롭게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으며 그 선택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의 자격 박탈로 이어지지 않는, 다시 말해 누구라도 쉽게 슈퍼휴먼이 되기를 바랄 수 있고 또 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하리라고 기대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도영이 기숙사 침대에 누워있는 동안 강당에서는 첫 번째 슈퍼휴먼의 정체를 낱낱이 해부하는 동시에 뉴 타입 개조인간의 차별성과 의의에 대한 강연이 이어졌다.

요점은 간단했다. 슈퍼휴먼은 더 이상 무거운 쓰레기통을 들거나 군사 훈련에서 장갑차를 뛰어넘는 훈련을 받기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슈퍼휴먼은 점점 사람을 닮을 것이다. 이 실험의 첫 번째 사례에서 증명했듯이 사람의 결함과 모자람을 모방하려 할 것이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어떻게 나와 슈퍼휴먼을 구분하는가? 어떻게 내가 슈퍼휴먼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아가, 그 구분이 언제까지 의미가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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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 소리에 문을 열면서 도영은 당연히 문 밖에 재현이 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름을 부를 뻔했다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문을 열자 그 곳엔 피곤한 기색의 영호가 있었다.

영호는 예정보다 하루 밤이나 일찍 센터로 복귀한 참이었다. 이 쪽 센터에서 일어난 사고와 부상자, 그리고 슈퍼휴먼에 대한 이야기가 영호가 있던 곳까지 번졌다. 마지막 임무를 마치고 휴게실에서 다른 센터의 대원들과 커피를 마시던 영호는 소식을 듣자 마자 지체 없이 그 곳을 떠났다. 온통 도영 생각 뿐이었다. 부상자가 있다는 말 밖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도영아”

영호가 팔을 벌려 안아달라는 시늉을 했다. 무사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아, 너무 좋다. 걱정했어.”

영호는 도영을 꼭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도영은 아주 어릴 적에나 어른들 품에서 느꼈던 어지러움을 느꼈다.

“내 걱정을 했다고? 별걸 다.”

“걱정할 수밖에 없어. 일하고 돌아왔는데 내 애인이 갑자기,”

“죽기라도 했을까 봐?”

“그래 그것도 무섭지만 갑자기 기계인간이라고 단상에 전시되고 있거나 그러면 어떻게 해.”

도영은 영호의 얼굴을 잡고 눈을 들여다보았다. 장난기 가득한 밝은 갈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도영을 마주본다.

“만약 내가 진짜로 슈퍼휴먼이면 어떻게 할 거야?”

“고백하는 거야?”

“만약에. 만약에 내가 슈퍼휴먼이면 어떻게 할 거냐고.”

영호는 도영을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고 이번에는 허리를 붙잡아 가까이 당겼다.

“글쎄, 사실 별로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아.”

도영에게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영호는 정말로 달라지는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가끔 도영은 영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영호는 왜 흔들리지 않을까? 도영에게 영호의 묵묵함은 이해 불가의 영역이었다. 불안 같은 것을 모르나? 영호 형은 뭘 믿고 그렇게 모든 것을 믿고 있지?

그러니까 작은 의심이 스며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도영의 마음에 실금이 간 순간, 무언가 스며들어 도영의 마음 속 색깔을 바꿔 놓았다. 도영은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영호 형이 슈퍼휴먼이라면? 세상의 모든 이기적인 의심들이 그렇듯 도영의 의심도 일견 아주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서영호는 여태 단 한 번도 훈련 중 큰 부상을 당했던 적이 없다. 단 한 번의 실험 실패도 없었다. 성적이 부진한 날은 있었지만 곧 만회하곤 했다. 훈련대원들과도 잘 지내고 타고난 신체 조건도 월등히 좋았다.

타고난.

도영은 영호의 몸을, 당연한 얘기지만,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단단한 근육과 길고 튼튼한 뼈대, 매끄럽고 건강한 피부. 팔다리가 길고 몸통이 두터웠다. 영호를 끌어안고 있을 때 느껴지는 근육과 뼈와 피부의 움직임.. 그런 것들은 아무렇지 않게 타고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라면? 누군가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대도 이상할 것이 없는 몸 아닌가?

 

도영의 의심이 부피를 키워가던 차에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틀림없이 재현일 것이다. 도영은 영호의 품에서 빠져나와 재빨리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섰다.

“안에 영호 형이 있어서.”

도영은 변명처럼 덧붙였다. 가운을 벗고 자켓을 입은 재현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내가 방해했나 봐”

“용건만 말하자.”

도영은 목소리를 낮췄다. 복도 끝으로 재현을 데려가면서는 발소리도 죽였다.

“나 궁금한 게 생겼어.”

재현이 도영을 물끄러미 본다. 도영이 다르다고 느낀 바로 그 눈빛으로.

“뭔데?”

“넌 알고 있지?”

재현이 눈으로 재차 물었다. 뭐를?

“누가 슈퍼휴먼인지.”

도영은 재현이 동요했다고 생각했다. 거짓말 같은 건 할 줄 모르던 예전의 재현처럼 크게 당황했다고. 그러나 지금의 재현은 당황을 감출 줄도 알았다.

“그래. 알지.”

“혹시, 혹시 나한테 할 말 없니 그러면”

도영은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영호 형이 개조인간일까 걱정된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재현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형, 나는,”

불안해진 도영이 손을 꿈지럭대자 재현이 도영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예전처럼 부드러운 손길은 아니고 적당한 애정과 연민을 담은 손짓으로. 재현은 대답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재현아 대답해줘. 너 전부 알고 있잖아.”

“못 해.”

재현이 살며시 도영의 손을 내려놓았다.

“형 나는 말 못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실험이 끝날 때까지 제발 무사해달라는 말 뿐이야. 나는,”

“나는 형을 그렇게 여기로 보내지 말았어야 한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도영은 재현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이곳으로 오기 전의 기억들이 드문드문 되살아났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센터에 와서는, 영호와 함께 지내기 시작하면서는 다시 꺼내 보지 않았던 기억들이다. 도영은 재현이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그 시간들이 지금의 도영과 아주 멀어진 것처럼 재현도 이제는 아주 먼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긴 왜 온 거야?”

재현이 도영을 본다. 재현 역시 도영이 낯설었다. 재현이 기억하고 있는 도영은 아마도 재현과 도영이 떠나온 먼 곳, ‘고향’ 어딘가에 남은 모양이었다.

“곧 알게 될 거야.”

 

 

#

 

두 번째 슈퍼휴먼이 밝혀졌다.

도영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른 팀의 대원이었다. 스스로 슈퍼휴먼이 아닌 척 무리 속에 숨어들었다던 첫 번째 사례와 달리 이번엔 스스로도 슈퍼휴먼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 대원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조목조목 짚었으면서 어느 시점에 슈퍼휴먼으로 개조되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도영은 이번에는 브리핑에 참석해 발표자의 말을 전부 귀담아 들었다. 이제 한 명이 남았다는 이야기가 듣던 사람들을 웅성이게 했다.

“슈퍼휴먼 리스트에 색칠되지 않은 칸은 하나 뿐입니다.”

도영은 곧 알게 될 거라던 재현의 말을 떠올렸다. 정말 끝이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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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형이 슈퍼휴먼이면 어떻게 하지?”

오늘따라 쉽게 잠들지 못하던 도영이 불쑥 던진 질문이었다. 영호는 자신의 어깨에 입술을 맞대고 웅얼웅얼 물어오는 도영의 목소리를 듣다가 황당해졌다. 내가 슈퍼휴먼이면? 영호는 어려운 면접 질문 같은 이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도영의 손을 가져다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이거 봐. 심장을 꺼내 줄 수도 없고.”

“그러니까 이게 가짜 심장이면 어떻게 하냐고.”

도영이 영호의 가슴팍에 턱을 괸다. 어둠 속으로 도영의 눈동자가 보였다. 영호는 스스로에 대해 냉철하게 판단해보려고 애썼다. 날이 흐리면 편두통이 쉽게 왔고, 달리기를 못 하는 편이고, 부대에 있을 때는 악단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 부대 생각을 하다 보니 기억을 전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제는 희미한 어릴 때의 일들까지. 도영이 말한 대로 소위 ‘고향’에서 있었던 일들은 벌써 너무 다른 세상의 일들 같았다. 어린 영호는 어머니의 친구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아마 제일 처음 달리기를 못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던 건 언젠가의 학교 운동회에서 였을 것이다. 다섯 명 중에 네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허탈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러나 영호는 그런 기억들이 증거가 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연구실에서 형을 빼앗아 갈 까 봐 겁이 나.”

도영이 영호의 품을 파고 들었다. 영호가 어디든 멀리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영은 이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영호와 자신이 어떻게 다른 사람인지 그런 것들을 구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흐릿한 도영의 기억들 위에는 이제 영호가 적어준 영호의 기억들이 제법 선명하게 반짝거렸다. 도영은 그 기억들 가운에 무엇이라도 변질되거나 사라지지 않았으면 했다. 어떤 것도 사실과 다르지 않았으면, 도영이 부유하지 않고 단단히 매달릴 뿌리가 되었으면 했다.

“안 따라 갈게. 연구실이든 본부든.”

영호가 도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도영의 투정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도영은 자신의 마음이 그것보다 곱절은 절박하다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영호가 걱정할까 그만 두었다.

 

 

#

 

도영은 오늘 아침부터 훈련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영호보다 먼저 기숙사를 나서야 했다. 벌써 여러 번 해본 훈련 내용이라 마음이 자꾸 풀어졌다. 재현의 미지근한 반응들이 자꾸 생각나 도영을 괴롭힌다. 곧 알게 될 거야.

재현은 사실, 도영의 첫 번째 기억이다. 재현 이전의 것들은 희미했다. 도영은 고향에서 겪은 일련의 일들로 인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많이 잃어야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생생한 첫 페이지, 기억을 적어 둔 첫 번째 페이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거기 적힌 것은 물론 재현의 얼굴.

도영의 기억에는 전부 재현이 있다. 그래서 그동안 영호에게 선뜻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도영에게 영호의 기억들이 많이 옮겨왔으니까, 도영도 가진 것을 영호에게 조금 나눠줄 차례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도영은 오늘 저녁에 영호가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재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김도영!

상념에 잠겼던 도영의 무전기로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재현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멀리 연구실 테라스에 상기된 얼굴의 재현이 보였다. 정신 차려! 도영은 재현이 필사적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등줄기를 타고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잠시 마음을 놓은 사이에 도영이 설치하던 기계의 압력수치가 지나치게 높게 올라가 있던 것이다.

황급히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진 압력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재현이 소리를 질러댄 탓에 이미 훈련장에 흩어져 있던 대원들과 테라스의 연구원들이 전부 도영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여러 사람의 무전이 한꺼번에 쏟아져서 다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 지경이었다.

- 도영아

도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분명 영호의 목소리였다. 오늘 다른 훈련장으로 간다고 들은 것 같은데? 영호는 도영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영호의 목소리가 무전을 타고 계속 넘어왔다. 도영은 영호에게 기계의 압력 계기판을 읽어주었다.

- 그거 버리고 여기로 넘어 와.

- 그냥 두면 폭발할 거야.

- 폭발하기 전에 전부 대피하면 돼. 지금 넘어 와 도영아.

도영이 작업하던 곳에서 영호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기계를 밟고 지나가거나 좁고 가파른 바위 언덕을 뛰어 넘어야 했다. 도영은 이제 진동이 느껴지는 기계의 상태를 확인했다. 영호에게는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솔직히 다시 압력을 떨어트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밸브 하나만 풀어놓고 가면? 폭발의 규모를 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도영은 망설였다. 섣불리 건드렸다가 폭발을 부추길 수도 있었다. 무전으로는 영호가 계속해서 도영을 타이르고 있었다. 도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입이 말라 목이 따가웠다. 밸브 하나만. 하나만 풀고 영호 형에게 넘어가자. 제발 다치지만 마. 문득 재현의 당부가 떠올랐다. 안 다쳐. 이것만 풀고 영호 형한테 갈 거니까. 도영은 스패너를 들고 빠르게 밸브를 풀기 시작했다. 영호의 목소리가 자꾸 들려서 마음이 복잡해 이어폰도 빼 버렸다. 계기판은 한계까지 돌아가 움직이지 않게 된 지 오래였고 기계는 이제 쇳소리를 내며 덜덜 떨고 있었다. 나사가 풀리자 엄청난 압력으로 뭉쳐 있던 공기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도영은 영호에게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훈련대원들이 대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짧은 순간 그 틈바구니로 도영은 재현의 얼굴을 발견했다. 전부 출구를 향하는 사람들 사이에 붙박혀 자신을 보고 있는 재현의 얼굴. 눈이 마주쳤다. 재현이 도영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얼른 가! 얼른 가라고! 도영은 몸을 돌려 영호를 향해 힘껏 뛰었다. 영호가 있는 바위 언덕까지는 보이는 것보다 한참 멀었다. 뜀박질을 하는 순간에 도영은 영호에게 닿기엔 모자랄 거라는 걸 알았다. 영호가 내민 손에 닿기 전에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도영이 안간힘을 다해 허공을 휘젓던 바로 그 순간, 굉음과 함께 기계가 폭발하고 말았다. 도영은 충격파가 몸을 밀어 올리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잃기 직전 영호의 손이 도영의 손끝을 스치는 것과 익숙한 악력이 손가락을 꽉 붙들어 당기는 것도. 도영은 안심하며 몸을 맡겼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영호의 품에 안겨 있기를 기대하며.

 

 

#

 

도영은 몸이 바닥에 떨어지는 충격에 깨어났다. 눈을 뜨는 순간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세상이 빙글 돌았다. 어디까지가 충격이고 어디까지가 고통인지 구분하기까지 시간이 좀 흘렀다. 다치지 말라고 당부하던 재현의 말이 떠올랐다.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을 먼저 하다니, 도영은 고장난 것처럼 무겁게 굴러가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 영호 형의 손을 잡은 기억. 분명 살았다고 안도한 기억이 있다. 가장 최근, 몇 초 전의 기억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이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는지 도영의 머리는 빠르게 답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어폰을 빼지 말 걸. 재현이나 영호 형이나 누군가 좀 설명을 해 줄 텐데. 그러나 귀가 먼 것처럼 웅웅 울려서 이어폰이 소용 없었을 것 같기도 했다. 온통 흙먼지가 도영의 시야에 가득했다. 혹시 영호 형도 같이 떨어졌을까? 생각이 거기 미치자 도영은 조급증이 났다. 말을 안 듣는 몸이 짜증스럽다.

점점 옅어지는 흙먼지 너머로 누군가의 인영이 비치기 시작했다. 영호 형. 도영은 거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불렀다.

“형, 괜찮아?”

 시야는 점차 맑아졌다. 도영은 이제 영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영호는 먼지가 묻고 여기저기 긁혀 볼썽 사나운 모습이었지만 멀쩡히 도영을 보고 있었다. 도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구겨져 있던 몸을 펴고 누웠다. 다행히 영호도 저도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형, 도영이 재차 영호를 불렀지만 영호는 미동도 없이 도영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도영은 곧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 서 있는 영호가 붙잡고 있는 것은 분명 도영 자신의 손이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 충격에 밀리면서 영호의 손을 스쳤던 오른손의 손가락들이 여전히 영호의 손 안에 얽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어지럽게 얽힌 전선과 튜브들이 보였다. 도영의 손으로부터 뻗어 나와 혈관과 근육을 대신하고 있는 무기질들이었다. 몇몇 전선에서는 여태 스파크가 튀었다. 도영은 아직 몸에 붙어있는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소매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는 것은 피가 아니라 윤활유와 이름모를 액체들이었다. 도영은 침을 꿀꺽 삼키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끊어진 튜브를 통해 수분이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도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믿기지 않는 상황을 해명해보고자. 그러나 영호의 텅 빈 표정과 마주했을 때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실험은 끝이 났다. 뉴 타입 개조인간, 소위 슈퍼휴먼 리스트의 마지막 칸에 적힐 이름은 바로, 김도영 자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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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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