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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이 어둑해졌다.

 

PM 9:01

 

모니터 한 켠의 시간을 확인한 도영은 의자 깊숙히 등을 기댔다.

켜져 있는 메일 목록의 스크롤을 하릴없이 올렸다 내려본다. John Suh로부터의 메일은 사흘 전이 마지막이었다.

그마저도 다른 이에게 보낼 사진 파일이 첨부된 메세지가 도영에게로 잘못 보내져 온 것이었다.

사진 속 낯선 이의 얼굴이 익숙한 색감과 구도로 담겨 있었고, 도영은 제 3자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 반대편에 카메라를 들고 서있을 영호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영호가 긴 여행을 떠난 지 네 달이 되었다.

서로 전화를 않은 지 한달이 지났다.

도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는 것을 반복했다.

걸려오지 않는 전화와 잘못 수신된 메일, 그건 어쩌면 관계의 정리를 위한 영호 나름의 완곡한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돌아가는 에어컨의 소음이 사무실 안의 고요를 촘촘히 부쉈다. 도영은 약간의 추위를 느끼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

 

'당신에게 가장 편한 장소는 어디인가요?'

 

잠자리에 들기 전 베개에 머리를 얹어 두고 습관처럼 영호의 SNS 계정을 확인해 본다. 어떤 날은 어디인지 모를 풍경 한 장이 덜렁 올라와 있었고, 어떤 날은 언제 만났는지 모를 사람들과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또 어떤 날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긴 텍스트가 업로드 되어 있었다.

영호가 떠나 있는 내내 영호의 모든 언어들은 도영이 영 모를 것들뿐이었다.

 

'당신에게 가장 편한 장소는 어디인가요?

저는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세상 어딘가에 내가 있어야할 곳을 남겨두고 온듯 항상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저에게 가장 편한 장소는 어디일까요?

그게 위치일지, 공간일지, 혹은 누군가와의 관계나 감정일지,

언젠가는 그 답을 알게 될 수 있을지 까지도,

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까무룩하게 감겨가는 눈꺼풀 사이로 정형화된 전자 텍스트와 반듯한 영호의 얼굴이 비집고 들어온다.

졸음에 못이겨 자꾸만 감기는 눈과 달리 생각은 또렷하게 정리가 되어 간다.

영 모를 것 같던 지난날들과 달리 오늘 영호의 글은 이해하기가 쉬웠다.

결론은 명료하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손톱의 거리

w. 김정우

 

 

균열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서서히, 조금씩. 작은 점에서 시작되어 실금이 되고, 그렇게 벽이 갈라진다.

 

둘의 벽에서 실금을 본 것은 아마 그쯤, 영호가 한국을 떠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던 그 날이었다.

 

도영은 두 달, 어쩌면 반년,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여행 계획을 갑작스레 통보한 영호에게 단 한번의 화도 내지 않았다. 회사에 이미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사실도, 집을 내놨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도 도영은 그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데 소리소문도 없이 잘도 그랬네. 그 정도의 감상만 늘어 놓았을 뿐이다.

 

-나랑 같이 갈래?

 

그날따라 유독 웃음기가 가신 얼굴을 하고 앉아있던 영호는 그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도영에게 물었었다. 도영이 난감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호의 시선이 얼음이 다 녹아내린 커피잔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떨어졌던 시선을 들어 다시 도영을 바라볼 때는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냥 해본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영호의 커다란 손이 도영의 뺨을 천천히, 그리고 한참을 쓰다듬었었다.

 

#

 

'손끝이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손톱과 손가락이 맞닿는 부분이 시큰거립니다.

간밤에 비몽사몽으로 너무 짧게 잘라낸 모양이예요.

자주 이러는 통에 욱신거리는 손가락 끝을 납작하게 꾹꾹 누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고작 2mm, 그 정도의 여유만이라도 남겨뒀다면 이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저에게는 언제나 그 약간의 거리감을 두는 일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도영은 제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새로 갱신된 영호의 포스팅을 읽었다.

손끝이 야무져 손으로 하는 일은 모두 잘하는 영호였지만 딱 한가지, 손톱 정리에는 매번 실패했다. 몇 번이나 잘못 정리한 손톱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본 이후로 1년 남짓의 연애기간동안 영호의 손톱 정리는 도영의 몫이었다.

 

-매번 귀찮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손톱 정리에 집중하는 도영에게 영호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 말에 잔뜩 집중을 해 심각한 얼굴 그대로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도영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푸스스 웃었다.

 

-나 이거 하나도 안 귀찮아. 좋아.

 

내가 해주면 서영호가 안 아프잖아.

한자 한자 힘주어 말한 도영은 다시 고개를 숙여 손톱 정리에 집중했다. 영호는 자신의 손톱에 집중하느라 푹 숙인 도영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었다.

 

#

 

“대리님.”

 

어깨에 닿는 손에 도영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책상 앞에 앉아 졸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도영을 조용히 깨운 정우는 소리 없이 대리님 커피 한 잔? 하는 제스처를 보냈다.

 

“대리님 피곤하면 이거 꼭 드시잖아요.”

 

앞장서서 자판기 앞으로 간 정우가 밀크커피를 뽑아 내밀며 말한다. 도영은 따끈한 종이컵을 받아 들며 고맙다는 말 대신 그저 웃어 보였다.

 

“대리님 요즘 피곤해 보여요.”

“그냥... 감기기운도 있고 요 며칠 잠을 좀 설쳤어.”

 

더이상의 설명을 거부한다는 표시로 종이컵안의 커피를 소리나게 들이마신다. 뜨거움의 깊이가 얕은 달큰한 액체가 혀와 목구멍을 타고 스며든다.

 

요즘 들어 멍하게 앉아있는 시간이 늘었다. 자꾸 비슷한 꿈을 꾸다 새벽녘에 몇 번이나 눈을 뜨기 일쑤였다. 그렇게 잠에서 깰 때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기를 확인하고는 했다. 하지만 영호로부터의 연락은 와있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별을 하고서 어떻게 지냈었더라? 아무리 떠올리려 해봐도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누군가와 헤어지며 눈물 흘려 본 것도 아주 아득한 과거의 일이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연애란 그저 종이컵 안에 든 인스턴트커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담겨진 것을 다 마시고 나면 남은 것은 미련없이 버린다. 언제 어디에 버렸는지는 기억하지 않는다.

 

커피를 다 마시고도 한참을 들여다보던 종이컵을 책상 한 켠에 쌓아 둔 컵 무더기 가장 위로 끼워 올린다.

 

버려야 하는데.

 

겹겹이 쌓인 컵의 탑이 억지로 버텨온 피로의 시간들을 대변하는 듯했다.

 

#

 

회식자리가 미처 다 파하기도 전에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근래에 매일 잠을 설친데다 가벼운 감기기운이 있는 상태로 권하는 술을 다 받아내던 도영은 기절할 듯 잠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잘 잡히지 않는 택시를 겨우 잡아탔다. 뒷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행선지를 말하며 손으로는 습관적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두어 번의 신호음이 들리고 나서야 아차 하고 정신이 든 도영은 다급하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화면 안에 영호의 이름이 반짝 했다 사라졌다.

 

혹시나 콜백이 있을까 싶어 마음이 초조해진 도영은 집을 향하며 몇 번이나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섰을 때도, 간신히 양치질을 하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울 때까지도 영호의 콜백은 없었다.

 

먼저 자리를 뜬 도영을 걱정하는 회사 사람들의 메시지 몇개와 요즘 통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 태용의 메시지를 하나씩 읽고 답을 한다.

알콜의 향과 치약의 향이 입안 가득 엉켜 목구멍이 화했다.

 

마지막으로 왔었던 한달도 더 된 영호의 메세지들을 다시 읽어본다.

시차가 맞지 않아 자고 있을 시간일 것 같다며 밥 잘 챙기고 하루 잘 보내라는, 다정하고 형식적인 글자들,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를 꾹꾹 눌러 담으며 한참을 읽어냈다. 같이 보내져 온 이국의 풍경을 담은 사진까지도 꼼꼼히 다시 보았다.

 

그렇게 모든 것들을 다시 되돌려본 후에도 영호에게서는 그 어떤 전화도, 메세지도 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명치를 툭 치고 튀어나왔다.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날 도영은 영호가 한국을 떠나고 난 후 처음으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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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제 풍경이 아주 근사한 곳에 당도했습니다.

맑은 하늘과 바다, 고운 모래밭과 한산한 인파.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평화입니다.

 

하지만 그런 풍경과는 달리 바람은 꽤나 매섭게 붑니다.

강한 바람에 나무들이 누워 자라고 구름이 머물지 못할 정도이니까요.

덕분에 구름 없는 하늘의 강한 볕을 받아 산림이 울창합니다.’

 

거기까지 써내린 영호는 제가 쓴 글을 다시 훑어보지도 않고 업로드 버튼을 눌렀다. 어느 섬나라의,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섬의 해안가였다. 조그만 로컬 레스토랑에서 요기거리를 주문한 영호는 창밖의 풍경을 보며 무표정하게 앉아있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경험에서 돌아갈 곳을 찾는 것으로 여행의 목적이 바뀐 지는 오래였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좋은 풍경을 눈과 카메라에 담는 것이 전처럼 즐겁지만은 않았다. 새로 만나는 여행객들의 인사는 대부분 언제 집으로 돌아가는 지로 마무리되었다.

 

글쎄,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라 언제 돌아가야 하는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영호가 떠난다는 말을 했을 때, 도영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영호는 곱씹고 곱씹어 생각을 했다.

 

왜 화를 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고개부터 어깨까지 깊은 물에 잠긴 듯 무거워졌다. 그래서 언제부터 인가 도영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섬의 날씨는 여행 카달로그 사진과는 꽤 달랐다.

잔잔한 풍경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거센 바람.

볕을 가려줄 구름은 머물지 못하고 이끼같은 우림은 바람에 못 이겨 누워 자란다.

하늘의 구름 대신 땅에서 자란 것이 땅을 가리는 그늘을 만든다.

하늘은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따가울 만큼 볕을 내다 꽂을 뿐이었다.

섬의 나무들은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촘촘히 섬을 감쌌다.

 

섬의 날씨에서 도영이 느껴졌다.

영호는 이 섬에서의 일정을 조금 일찍 마쳐야 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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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물어도 창 밖으로 들려오는 바람의 소리는 여전히 대단했다. 종일 짠 기 섞인 바람에 시달리느라 녹초가 되었다.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자 몰려온 지나친 피로감은 오히려 애매한 각성을 불러왔다. 미지근한 물로 한참 샤워를 한 영호는 맥주 몇 캔을 빠르게 비웠다. 그리고나서 잠깐 눈을 붙였다 뗀 이후로 계속 오한에 시달렸다. 갑작스레 밀려드는 구토감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새벽 내내 화장실을 들락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쩐지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아 게스트하우스 대신 호텔에 묵은 것이 잘한 일이었다.

 

이 나라는 난방도 안되네.

 

침대 한 켠에 콕 박혀 식은땀을 닦아내던 영호는 그런 불평을 중얼거렸다. 눈을 감고 누워 도대체 뭐 때문에 탈이 났을까, 그날 먹은 음식들을 역순으로 되짚어보다 보니 어느새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전화기의 진동이 잠시 느껴졌지만 이내 그쳤다. 설핏 잠에서 깨었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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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비행편을 잡다 보니 해가 미처 다 뜨기도 전에 공항에 도착했다.

영호는 손톱이 짧게 잘려 아린 손끝을 꾹꾹 누르며 한손으로는 백팩의 끈을 바투 잡았다. 비행기 탑승시간을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도 어쩐 일인지 머릿속에 새겨지질 않았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마다 늘 그렇듯 아랫입술을 베어 무는 습관이 나왔다.

호텔에서 묵었던 이틀을 꼬박 앓았다. 모처럼 얻은 좋은 숙소였는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을 앓고 나니 손톱이 훌쩍 자라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의무적으로 다듬어 내었더니 또 너무 짧게 손질된 모양이다.

 

나는 늘 왜 이럴까.

 

도영으로부터 걸려온, 받지 못했던 전화 기록을 묵묵히 손가락으로 쓸어낸다. 그리고 다섯번쯤은 확인했던 탑승시간을 또 다시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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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는 술자리 내내 맞은편 사무실 직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단둘이 탔을 때 기회다 싶어서 번호를 물어봤고, 연락을 하고 있고, 잘 모르겠고, 어떻고...

정우가 말하는 직원이 누구인지 도영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영호가 재직중이던 때 영호의 부사수였던 직원으로, 영호로부터 자주 이야기를 전해 들은 덕이었다.

 

"내가 누누히 말하지, 사내연애 하지 말라니까?"

 

재미있다는 얼굴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도영이 정우를 약올릴 참으로 한마디 던졌다. 도영의 얼굴 가득한 장난기에 정우가 잠시 눈을 흘겼다.

 

"대리님 사내연애는 해보고 놀리는 거예요?"

"당연히 해봤으니까 하는 말이지. 헤어지면 둘 중 하나는 회사 그만둬야 돼."

 

뾰루퉁한 정우의 말에 웃으며 대꾸하던 도영의 머릿속에 영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암, 그만두고 멀리 도망갔지.

 

"근데 좀 궁금하긴 하다..."

"뭐가?"

"대리님의 연애요."

 

도영은 대답 대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봤다.

 

"그냥 대리님 연애 같은 거 관심 없어 보여 서요. 그런 거 감정의 낭비나 소모라고 생각하실 것 같았어요."

"너는 어떻게... 사랑이 낭비고 소모라고 생각할 수가 있어."

"대리님 입에서 그런 말 들으니까 진짜 이상하네요."

 

정우의 떨떠름한 반응에 도영은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담긴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입맛이 쓴김에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을 감추기에 쓴 술만큼 좋은 핑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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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움직이고 몸을 베베 꼬아도 잠이 가셔지지 않는 느낌에 도영은 기어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밀려드는 잠을 쫓기 위해 옥상을 가서 담배를 한 대 태울까 하다 더위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 1층 로비로 향했다.

 

여름 휴가를 떠나는 정우가 이제 자신이 깨워줄 수 없으니 알아서 커피를 뽑아 먹으라며 백원짜리 동전이 잔뜩 들어 있는 저금통을 쥐여주고 갔다. 덕분에 도영은 하루에 한번씩 자판기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밀크커피 버튼을 누르면 타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컵이 밀려나오는 소리와 제 나름 열심히 커피가 섞이는 소리가 난다. 달달한 200원짜리 커피가 만들어지는 동안 잠시 고개를 삐딱하게 들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해본다. 오늘은 꼭 책상 위에 쌓인 종이컵을 버려야지, 그런 별 쓸모 없는 생각들을 하며 잠시의 시간을 버틴다.

 

빨간 등이 꺼지고 완성된 커피를 꺼내기 위해 자판기의 문을 열었다. 순간, 도영이 미처 손을 뻗기 전에 누군가의 팔이 슥 튀어나와 커피를 빼갔다. 눈뜨고 커피를 빼앗겼건만, 도영은 차마 따지지도,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그냥 서있었다. 등 뒤에서 보란 듯 호로록 하며 커피를 들이키는 소리가 들린다.

 

“하, 이 맛이 그리웠어. 싸고 달고 씁쓸한 맛.”

 

기어코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도영은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본다. 거기에 서있는 영호를 보며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너무나 평온한 모습의 영호가 도영을 반겼다. 눈이 마주치자 마자 다짜고짜 갈 데가 없다는 영호의 말에 자신의 집으로 가 있으라는 말을 남긴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돌아갔었다. 그리고 나서는 내내 영호가 정말 자신의 집에 가 있을지, 또 다시 사라져버린 것은 아닌지 마음 졸이며 문을 연 참이었다.

 

“왔어?”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 사람처럼 영호는 예전같은 웃는 얼굴로 도영을 맞이했다. 그새 뭘 시켜 먹었는지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피자상자까지 놓여있었다. 감상에 젖어 있다 제 집 마냥 17도로 맞춰 틀어 놓은 에어컨과 영호를 번갈아 본 도영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한국에는 언제 들어 왔어?”

“오늘, 들어오자 마자 회사 찾아 간 거야.”

 

팀장님한테 다시 입사시켜 달라고 했어. 집도 절도 없다고 하니까 일단 오만원 쥐여 주더라.

입안 가득 피자를 우물거리는 영호의 목소리가 예전처럼 장난스러웠다. 도영으로부터 별다른 대답이 없자 영호는 고개를 들어 도영을 바라봤다. 침대에 걸터앉은 도영과 식탁머리에 앉은 영호의 시선이 멀리서 부딪힌다.

 

“도영아, 나 아팠다?”

“...어디가.”

“뭘 잘못 먹어 탈이 났었나봐. 웬 섬에서 그랬는데, 병원에 갔더니 엄청 할아버지 의사선생님이 주사를 놔주려고 하잖아. 손을 바들 바들 떠시던데...”

 

나 살면서 주사 무서워한 적 한번도 없는데 갑자기 너무 두렵고 막연해져서 바로 비행기표 끊었어.

 

“서영호.”

 

해맑게 웃으며 말하던 영호의 얼굴이 도영의 잠긴 목소리와 굳은 얼굴을 보고는 점점 무표정해졌다.

 

“왜 연락 안 했어?”

“...화났어?”

“어.”

 

도영의 딱딱한 대답을 들으며 먹던 피자를 내려놓은 영호는 또다시 제 집처럼 어디선가 물티슈를 찾아 꺼내 손을 슥슥 닦아낸다. 입술까지 깔끔하게 닦아 내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은 도영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김도영이 드디어 나한테 화를 내주네.”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추며 건네 온 영호의 말에 기어코 도영의 눈물이 터졌다.

뭉툭하게 깎인 영호의 손톱 끝을 매만지며 한참을 우는 도영과 그런 도영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도영의 뺨과 목덜미를 곧 사라질 듯 아쉽게 어루만지는 영호의 한숨으로 방안의 공기가 따끈하게 데워졌다.

 

#

 

“형, 집 언제 구해?”

 

침대머리에 반쯤 일어난 몸을 기대고 앉은 도영이 퀭한 얼굴로 영호에게 물었다. 영호는 이제 막 내려져 김이 모락모락하는 커피를 마시며 인기 차트 속 걸그룹 노래들을 연달아 틀어 놓고 있었다.

 

“글쎄, 내일 면접 가보고 잘 되면 슬슬 알아봐야지.”

“...뭐...그건 그건데... 형... 주말이잖아...”

 

주말에는 나도 쉬어야 하지 않아? 아침 여덟시부터 쿵쾅거리면서 왔다갔다하고, 노래 틀고, 에어컨은 어떻게 맨날 17도야. 전기세 니가 안 낸다 이거지? 벌써 3주 째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서영호. 너 그리고 돈 많은 거 다 아는데 왜 취직 핑계대면서 집 안 구하는거야? 대답하지마. 그냥 나 괴롭히려고 그러는 거 다 알아.

 

영호는 침대에 누워 잠긴 목소리로 쫑알대는 도영에게로 다가가 앉았다. 눈을 감고 투덜거리는 도영의 뺨에 입을 맞추며 조용히 웃었다.

 

“웃지 마. 진짜 열받아.”

 

그제서야 반쯤 눈을 뜬 도영을 이불채로 돌돌 말아 끌어안았다.

 

“난 너 화낼 때가 참 좋더라.”

 

이불과 영호의 긴 팔 안에 갇힌 도영은 괴롭다는 표정으로 간신히 고개만 움직이며 누워있었다.

 

화를 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있으려 하는 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드는 너.

언제나 그런 것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근데 형.

응.

한국에 왜 갑자기 돌아왔어?

손톱.

응?

손톱을 자꾸 잘못 깎아서.

…이제 손톱 손질 해달라고 할 때마다 돈 받을 꺼야.

얼마 원해? 달라는 대로 다 줄게.

그 돈으로 집이나 구해.

따로 살아도 어차피 매일 같이 있잖아.

그거랑 그거랑 달라.

 

17도의 기온을 유지하며 찬기를 뿜어내는 에어컨 앞에서도 도영은 더이상 추위를 느낄 틈이 없었다.

고작 2mm의 거리감을 잘 지키는 도영과 그렇지 못한 영호가 모처럼 얼굴을 맞대고 늦은 아침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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