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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파인 나카모토

nervous​

  조용해진 주변에 눈을 떠 처마 끄트머리로 보이는 하늘을 감상했다.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다 금세 맑아진 하늘엔 그 많던 먹구름들은 어디로 갔는지 구름 한 점 없었고 푸르렀다. 정자 한가운데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벗어두었던 신발을 신었다. 소나기에 젖었던 옷은 아직도 축축하고 날은 습해서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축축한 옷을 털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보이는 거라곤 비에 젖어있는 국도와 아직 익지 않은 벼들, 그리고 푸르른 녹음, 뭐 그 정도였다. 다시 발라당 드러누워 팔베개했다. 좀 더 누워있다 가자. 사람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혼자 국토대장정 중이었다.

 

  말이 국토대장정이지, 일반적인 국토대장정 프로그램과 다르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딱히 많이 걷지도 않았고, 좀 많이 걷는 여행 같은 느낌? 여행이야 당연하게 많이 걷게 되는 거지만 국토대장정은 걷는 게 주 이동수단이니까. 뭐 그냥 서울을 벗어나고 싶었기에 터무니없는 국토대장정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몸을 혹사 아닌 혹사를 시켰다. 무작정 터미널 무인발급기에서 아무 지역을 찍고 버스표를 사서 올랐다. 버스에 내려서는 또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정하지 않았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 동요를 흥얼거리며 보이는 대로 걸었다. 막힌 길이면 다시 돌아서 다른 길로 돌아가고, 논길을 걸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벼들을 보고, 나무 그늘에 잠시 앉아 쉬면서 발을 주무르기도 하고, 지친다 싶으면 버스를 탔다. 저녁이 되면 싸구려 여관방, 모텔, 게스트하우스 등 가리지 않고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 씻고 배달음식을 시켰다. 계획 하나 없이 그저 닥치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은 꼼짝없이 혹시나 하고 들고 왔던 생라면을 씹어먹고 정자에서 노숙을 해야 할 판이었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살면서 이런저런 경험도 해보는 거니까. 경험했던 일 중에서 제일 최악은 아니니까.

 

  자세를 고쳐 모로 누워있으니까 어디서 탈탈탈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듣기 싫은 소리 같은게 딱 경운기 소리 같았다. 경운기거나 말거나, 비 맞으면서 뛰어서 그런가 피곤해서 하품을 쩌억, 하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고 경운기가 정자 옆을 지나갈 때 몰고 있는 사람을 봤다. 시골엔 퍽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외모였다. 입고 있는 티셔츠며 진한 이목구비며 녹음으로 가득한 시골 바닥에서 충분히 튀는 외양이었다. 오, 하는 감탄사를 작게 내뱉었는데 그 남자가 옆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웃으니 더 잘생겼네. 엥? 웃어? 웃는 얼굴을 보고 벌떡 일어나니 경운기를 몰던 남자도 경운기를 멈추고 뒤돌아봤다. 뭐라고 하는데 모터 소리가 시끄러워 연신 네? 네? 하고 되물으니 시동을 끈 남자가 경운기에서 내려 정자 앞으로 다가왔다.

 

  “여행 중이에요?”

  “예, 뭐. 그 비슷한 거죠.”

  “잘 곳은 있어요? 여기 뭐 모텔 이런 거 없는데.”

  “아뇨.”

  “그럼 우리 집에 와요.”

  “예?”

 

  삑살 난 목을 가다듬으며 되물으니 자기 집으로 오란 말을 했다. 님...네 집이요? 하고 물으니 님 말고 유타요, 했다. 아 예. 유타 씨 집이요? 왜요? 소리 없이 웃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오지랖이 넓어서, 라고 했다. 초면에 대뜸 재워주겠다길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니 푸핫, 웃은 남자는 경운기 짐칸을 탕탕 치며 타라고 했다. 적적해서 그래요. 시골에 젊은 사람도 없고. 저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거절하니 싶어서, 아니 속으로는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하며 바퀴를 밟고 짐칸에 올라탔다. 처음엔 꽤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탈탈거리며 굴러가는 경운기의 승차감은 역시 별로였다. 투박한 모터 소리와 함께 떨리는 느낌이 싫어 일어나 유타가 등을 대고 있는 부분을 잡았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진짜 알 수가 없네. 생판 남이 운전하는 경운기에 앉아서 생판 남의 집에 가고. 뭔가 머쓱해서 말이라도 걸어봤다.

 

  “여기선 다 경운기 타고 다녀요?”

  “네?”

  “경운기 타고 다니냐구요!”

  “아뇨. 트럭 정비를 맡겨서요. 일할 땐 트럭, 보통은 그냥 일반 자가용 타죠. 시골도 다를 거 없어요.”

 

  아하, 그렇구나. 그치. 다 사람 사는 곳인데, 다를 게 뭐 있어.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인데 다르긴 했지만. 도시와 다를 거 없단 대답에 뭐 더 물을 것도 없어서 입을 닫고 하늘을 바라봤다. 해가 지기 시작한 하늘에, 적당히 눅눅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서 기분이 좋았다. 삐질삐질 흘린 땀들이 식고 옷도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타이타닉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양팔을 옆으로 벌리고 바람이 부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그때 남자가 경운기를 옆으로 꺾어버렸다.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닌데 커브를 도는 바람에 삐끗하면서 바닥을 세게 디뎠더니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아 개쪽팔리네. 아무도 못 봤을 텐데도 쪽팔렸다.

 

  아스팔트가 깔렸던 도로에서 하얗게 시멘트로 포장된 옆길로 들어가 마을 이름이 적힌 바위도 지나고, 마을 입구의 큰 나무도 지나고 빨간 지붕, 파란 지붕, 주황색 지붕 등등을 지나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집으로 남자가 경운기를 몰았다. 조심스럽게 들어가 마당 한복판에 경운기를 대고 시동을 껐다. 귀가 멎을 듯한 모터 소리가 잦아들고 삐쭉대며 내리니 아무도 없다고 편하게 있으라고 했다.

 

  샷시 문 옆에 있는 평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궁금한 걸 물었다. 혼자 사세요? 아뇨. 그럼요? 조부모님이랑 살아요. 마을 어르신들이랑 단체로 놀러 가셨어요. 아 글쿠나. 근데 이름이 유타라고요? 특이하시네요. 일본인이에요. 네? 왜 시골에 사나 싶죠? 아, 예 뭐…. 말끝을 흐리니 남자가 또 웃었다. 이름이 뭐예요. 김도영이에요. 24살. 오, 내가 형이다. 전 25살. 형이라 불러도 돼요? 편한 대로 해요.

 

  통성명이 끝나 유타 씨에서 유타 형으로 업그레이드된 남자는 마당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바쁘게 움직였다. 창고에서 포대를 꺼내 바가지 푹푹 퍼서 소여물 위로 사료를 뿌리고, 강아지 밥도 챙겨주고, 현관문 근처에 있는 그릇을 한 번 씻고 물과 고양이 밥도 챙겼다. 신기하게 보고 있으니 길고양이들 챙겨주다 보니 이젠 거의 키우는 것 같다는 말이 돌아왔다. 어쩐지 아까부터 담 위에서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던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있다 했다.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주자 담벼락에서 내려온 고양이가 느릿느릿 사료를 향해 걸어가 물부터 마셨다. 익숙하다는 듯 형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고양이를 쳐다봤다.

 

  소나기를 잔뜩 맞은 듯, 털이 젖어있는 강아지가 사료를 먹는 걸 보다 일어났다. 사료를 먹는 걸 보니 아침에 샌드위치를 먹고 쭉 아무것도 먹지 못한 배가 꼬르륵 울었다. 저녁까지 얻어먹기는 괜히 그래서 평상에 앉아서 마당을 쓸고 있는 형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눈치 좋게 저녁을 먹자는 말이 돌아왔다. 빗자루를 창고 문 앞에 놓고 현관문을 연 형을 따라 들어가니 금방 차릴 테니 손부터 씻고 오라며 화장실을 가리켰다. 부엌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머쓱하게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와 거실을 둘러봤다.

 

  장식장과 TV, 그 옆엔 일식집에서 보던 마네키네코가 있었다. 소파 앞에는 유리가 올라간 나무테이블이 있었고 현관 옆에는 큰 전신거울도 달려있었다. 거실에서 제일 잘 보이는 미닫이문으로 된 방은 살짝 열려있었는데 조부모님들 방인지 사진액자들과 TV, 자개장과 깔려있는 대나무 돗자리 등이 보였다. 더 구경하다가 형이 부엌을 오가며 여러 반찬을 내어오길래 방해될까 소파에 조신하게 앉아있으니 금방 저녁상이 차려졌다.

 

  강된장에 찐 호박잎, 열무김치, 고추 장아찌, 소시지에 계란말이. 별 볼 일 없는 밥상일 수도 있겠지만 오랜만에 보는 밥 다운 밥이라는 생각에 크게 입으로 욱여넣었다. 와, 할머님 솜씨에요? 김치랑 장아찌는 할머니 솜씨고 나머지는 제가 했어요. 강된장도? 여기 있으면 할 일도 없어서 취미 삼아 하다 보니. 대박. 원래 요리 잘하셨어요? 처음부터 잘하는 게 어딨어요. 다는 거지. 아하, 할머니 할아버지는 언제 돌아와요? 아직 한참 남았어요. 해외여행이시라. 오. 시답잖은 대화를 몇 번 나눈 뒤로는 별말 없이 밥을 먹고 치우는 걸 도와줬다.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며 설거지를 하고 나오니 유타가 오미자 액기스를 얼음물에 타서 건네줬다. 새콤하고 적당히 달달하고 시원했다. 절로 탄성이 나왔다. 꼼짝없이 노숙해야 할 줄 알았는데 살다 보니 별 희한한 일도 다 일어난다. 처음 보는 사람 집에서 밥도 얻어먹고, 씻고, 잠도 잤다. 서울이었다면 생각지도 못해본 일이었다.

 

  아직도 쓰는구나 싶은 괘종시계를 쳐다본 유타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채널을 쭉쭉 돌리더니 뉴스 채널에서 멈췄다. 나는 할 것도 없어 꺼놨던 폰을 켜 온 연락들을 확인했다. 버스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켜지 않았기에 밀린 연락이 있겠지 싶어 봤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이의 연락까지 와 있어서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서로 달갑지 않을 터인데 뻔뻔하게도 메시지를 보낸 꼴을 보고 어이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작게 읊조린 욕을 들은 형이 돌아봤고 머쓱하게 웃으며 폰을 흔드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밀린 답장들을 보내고 마지막까지 읽을까 고민하던 연락은 그냥 그대로 두고 다시 폰을 껐다. 티비 화면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다 그냥 눈을 감았다.

 

 

 

 

 

디파인 나카모토

w. nervous

 

 

 

  1. 신원불명 미스터리 나카모토

 

 

 

  눈을 뜨니 정자엔 혼자였다. 유타는 저 멀리서 고함을 치며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고 부스스 일어나 주변을 돌아보니 한바탕 술판을 벌이던 마을 사람들도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붕 뜬 머리를 정리하며 일어나니 유타가 코앞까지 달려왔다. 와 사람들 의리 없다. 나만 버리고 가신 거야? 코까지 골면서 자는 놈을 무슨 수로 깨우냐. 뺨을 쳐도 안 일어났다던데. 어제 일을 많이 해서 그래. 어흐, 머리 아파. 빨리 따라와. 점심에 그렇게 퍼마시던 막걸리병 하나 없이 깨끗해진 정자를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유타를 따라나섰다.

 

  이 마을에 눌러앉은 지 세 달이 지났다. 무덥던 날도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로 바뀌고 유타랑도 그냥 친구를 먹었다. 한 살 차이, 아니 고작 몇 개월 차이로 태어났는데 뭐. 하면서 말을 놓았다. 유타는 나 좋을 대로 하라 그랬다. 눌러앉으면서 알게 된 점은 주인 부부는 유타의 친조부모가 아니었고 할아버지는 마을 이장님이셨다. 그리고 종종 어쩌다 굴러온 돌이 두 개가 되었다는 말을 하셨다. 유타도 어쩌다 보니 제 모국도 아닌 나라에서 일손을 도우며 살고 있고, 나도 읍내 피시방에서 휴학신청을 하곤 눌러살고 있으니 어쩌다 굴러온 돌 두 개가 맞았다. 친손주도 아닌 둘, 게다가 한 명은 외국인이기까지 한데도 제집에서 먹이고 재우는 주인 부부도 퍽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유타를 따라 털레털레 걸어가니 고구마밭이었다. 할머니는 어디로 가셨는지 안보이고 덩그러니 다리 사이에 끼워 쓰는 작업 방석과 호미 두 개가 놓여있었다. 장에 내다 팔진 않고 매년 찾는 사람이 있어 소소하게 심었다던 고구마밭은 솔직히 내가 보기엔 꽤 컸다. 이게 어떻게 소소하게 하는 농사야. 벌써 작업 방석을 다리에 한 짝씩 끼우고 앉은 유타는 이미 고구마를 캐고 있었고 하는 수 없이 옆 고랑에 털썩 주저앉아 호미를 들었다. 고구마 순은 할아버지가 이미 자르고 한곳으로 모아놔서 그냥 캐기만 하면 됐는데도 까마득했다.

 

  아무리 10월을 바라본다 하더라도 아직은 날이 더웠다. 특히 가을 해는 여름 해보다 살을 잘도 태워서 지난주, 마을 어귀 나무 아래에 뻗어있던 내 얼굴에 경계선이 생겼다. 분명 그늘에 누워있었는데 해가 움직이면서 얼굴 반을 본의 아니게 태닝 해버렸다. 유타는 익어버린 내 반쪽 얼굴을 보고 아수라 백작 같다. 그러면서 배를 잡고 웃었고 밤에 울상을 하며 오이를 썰어 얼굴에 붙였는데 이미 타버린 얼굴은 소용이 없었다. 그것도 잊고 고랑 하나를 끝내고 다음 고랑으로 넘어갈 때 어깨까지 소매를 걷어 올린 팔을 확인하니 고대로 타버렸다. 목에 건 수건으로 땀을 닦고 유타에게 말을 걸었다. 어느 세월에 다 해? 그 주둥이 놀릴 시간에 뚝딱. 제집도 아닌데 주인처럼 존나 열심이었다.

 

  가끔 유타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걸 잊는다. 게다가 본인도 외국에 있단 사실을 종종 잊는 것 같았다. 그다지 숨기는 것도 없는데 딱히 말하지도 않는다. 마을 어른들은 왜 여기 눌러사는지 영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할아버지가 입단속을 시켰는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내가 눌러앉은 것도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냥 공기 좋은 곳 찾아서 요양 중이라고 둘러댔다. 유타와 다르게 달마다 돈을 내면서 살고 있으니까 다들 떨떠름하게 그렇구나 했다.

 

  주인 부부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은 스무 살 때부터 쌔빠지게 모아뒀던 적금에서 나왔다. 원래는 유럽 여행을 가려고 모아둔 돈이었다. 싸게 뜬 항공권을 운 좋게 구하고 일정을 조율하려던 찰나에 뭐 개좆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클리셰적 이야기. 같이 가려던 사람이랑 싸운 건 아니었고, 그냥 운이 안 좋았을 뿐이었다. 인생은 원래 운빨이 끝장나게 선 다음엔 개좆같은 일이 따라오는 법이니까. 그 뒤로 항공권은 취소하고 바로 터미널로 향했고, 최종 종착지가 이 마을이었다.

 

  썩 제 사정을 말하지 않는 건 나나 유타나 똑같았다. 그래서 부러 묻지도 않았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말하기 싫으니까 입 닫고 있는 거지. 떠벌려도 좋은 이야기라면 애저녁에 옆 마을까지 소문이 났을 거다. 나도 왜 이러고 있는지 말하기 싫었기에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궁금해하는 건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마을 어른들뿐이었다. 어른들은 종종 오늘과 같이 술판을 벌였다. 이유야 술을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취중에서 나오는 진담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때면 나는 빠짐없이 넉살 좋게 끼어들어 술을 몇 잔 받아먹곤 했는데 유타는 그러지 않았다. 싹싹하게 굴지 않는 건 또 아니고 그냥 술판에만 끼지 않았다.

 

  술 먹고 나오는 말들이 싫다 그랬다. 그건 나도 동감이지만 술은 나쁘지 않았다. 사람이 나쁘지, 술은 죄가 없어. 그래. 넌 많이 마셔라. 종이컵을 구기며 일어난 유타를 향해 말했었다. 주는 대로 받아먹어서 그런가. 대충 대꾸하곤 쓰레기를 모아 봉투에 담은 채 내 머릴 한 번 헤집고 사라지는 유타의 뒷모습은 괜히 신경 쓰였다. 아, 거 참. 같이 마시면 좀 좋나? 지가 민물 장어를 언제 한번 먹어보겠다고. 가슴팍을 한 번 쓸어내리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청년회장님이 따라주는 막걸리를 원샷 때렸다. 나카모토를 석 달이나 봤는데도 알다가도 모르겠, 아니 그냥 모르겠다.

 

 

 

  2. 농부 나카모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어두스름 해 질 무렵 고구마 캐는 것도 끝이 났다. 상자에 캔 고구마들을 담아 트럭 짐칸에 옮기고 고구마 줄기도 옮겼다. 술판이 점심때 벌어졌고 밭에 온 게 3시쯤이니 생각보다 진심 빠르게 끝난 거였다. 날이 무더웠는데도 자랄 때쯤 비가 많이 내렸던 것 때문인지 고구마가 주렁주렁 많이도 열렸다. 열 고랑에서 서른 상자 정도 나왔다.

 

  기필코 오늘 안에 다 하겠다고 마음먹은 의지의 한국인이라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부랴부랴 캐고 잔뿌리를 다듬었다. 그다음엔 크기별로 나누어서 상자에 담고 상자에 표시했다. 고구마 줄기도 옮길 거라 상자는 트럭 짐칸에 높게 쌓아 끈으로 고정하고 남은 자리에 줄기들을 옮겼다. 유타는 마지막까지 밭에서 덜 캔 고구마는 없는지 확인했다. 나는 트럭 클랙슨을 빵 누르며 그런 유타를 재촉했다. 누런 플라스틱 상자에 가득 채워온 유타는 고구마 줄기를 옆으로 살살 밀곤 플라스틱 상자를 내려놨다.

 

  운전석에 올라탄 유타가 시동을 켜고 입을 열었다. 내일 읍에 가자. 뭐 하러? 모임 있어. 가는 김에 식당에 고구마순 가져다드리고. 아 청년 모임? 근데 뭐 아는 식당이라도 있냐? 할머니 할아버지 따님 식당. 엥. 외국에 나가 있는 거 아니었어? 외국에 휴가 간 거지. 아. 난 또 적적해서 우리 거둬들인 줄 알았는데. 뭐 우리가 길고양이냐. 유타는 비웃음으로 대답했다. 명절에 오지도 않길래 매정한 자식이라 생각했는데 식당일 오래간만에 쉬고 휴가 갔다 온 거라 그래서 욕했던 게 머쓱해졌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일이 안 끝났다. 창고에 상자를 옮기고 평상에 신문지를 펼치고 고구마 줄기를 다듬었다. 뚝, 끝을 떼고 반으로 또 부러트려 껍질을 벗겼다. 유타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상자를 옮기고 밭으로 나가 여러 채소를 가져왔다. 오면서 다른 밭들도 쓱 훑어봤는지 깨도 털고 가지랑 단호박도 따고, 박도 따야겠다고 소리치며 들어왔다. 나는 꽤 쌓인 줄기들을 부엌으로 가져다줬고, 뚝딱 하고 할머니 손맛 가득 고구마 줄기 무침이 완성됐다. 누런 플라스틱 상자 안에 든 상품성 없는 작은 고구마 몇 개를 씻어 오라길래 가져다줬더니 저녁상엔 고구마 밥과 고등어조림도 올라왔다. 심지어 고등어조림에도 고구마 줄기가 들어갔다. 오자마다 직행한 부엌에서 떨그럭거리더니 고구마 맛탕을 해 온 유타가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오늘 완전 고구마 잔치구먼. 낼모레는 땅콩 캐야 해. 하기 싫다. 그거는 내다 팔 거야. 생으로도 팔고, 볶아서도 팔 거야. 일찍 일어나. 아직 날 더우니까. 너는 진짜 농사 못 지어서 죽은 귀신이 들렸냐? 그럼 그걸 썩혀 버리게? 밥 다 먹고 이야기하자고 쫌.

 

  유타와 투덕대며 밥을 느리작느리작 먹고 상을 치웠다. 그러곤 할머니랑 드라마를 보면서 말동무 좀 해드리다 밖으로 나와 평상에 앉았다. 밤이 되니까 확실히 쌀쌀해지긴 해서 닭살이 돋은 팔뚝을 쓸었다. 마을 뒤로 산이 있어서 그런지 해가 지면 기온이 뚝 떨어졌다. 그래도 공기는 도시에 비할 바가 못 되게 상쾌했다. 씻고 나온 유타가 샷시문을 열고 나와 까다 만 고구마 줄기를 다듬기 시작했다. 내가 할 테니까 들어가 쉬라고 해도 제 손으로 하는 게 더 낫댄다. 아니면 거들어주기만 하라길래 알았다고 했다.

 

  “추우니까 들어가서 해.”

  “뒷정리 귀찮으니까 여기서 하지 뭐. 그리고 고구마 상자도 봐야지.”

  “나 못 믿어?”

  “어.”

  “너무하네.”

 

  내가 정리해놨던 고구마 상자를 기필코 뜯어볼 요량인가보다. 집에 가고 싶어서 빠르게 정리했어도 제대로 담았는데 좀 섭섭했다. 고구마 줄기야 당장 내일 가져다줄 거라서 다듬는다 쳐도 고구마까지 손수 봐야 하는 성질머리는, 농대라도 나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집불통이었다. 파는 거라고 허투루 보낼 순 없다고 말하는 유타에게 더는 내 노력을 변호하기 귀찮아졌다. 그래 그럼. 적당히 하고 빨리 자. 도와주겠단 말을 무르고 껍질을 모아 버리고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언제 잠든 건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니 유타가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컥컥대면서 일어나니까 좋다고 웃어댄다. 저 얄미운 면상 한 번만 쳐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제 이불을 정리하고 앉아있는 나를 발로 툭툭 밀고 내 이불마저 정리한 유타가 빨리 씻으라고 닦달했다. 읍내에 늦게 나가도 되지 않냐. 식당 점심 장사 전에는 가져다드려야지. 빨리 준비해. 그 말에 까치집이 된 머리에 물을 묻히고 세수랑 양치만 하고 화장실에서 뛰쳐나왔다. 다듬어서 가져다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까다 만 줄기들을 찾으니까 평상에 떡하니 정리되어 있었다. 그 많을 걸 혼자 밤새 다 깠나 보다. 밭 하나 분량을. 미친놈인가 진짜.

 

  트럭에 싣고 읍내로 나와 식당 앞에 내려서 가져다드리고 밥이라도 먹고 가라는 걸 모임이 있다며 거절하고 나왔다. 에구, 많기도 해라. 친구분들도 나눠 드리고 하시래요. 고마워. 조심해서 가요. 안녕히 계세요. 수고하세요. 볼일을 끝내놓고 보니까 약속 시각까지 할 것도 없고, 뭐 영화관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닌 촌구석이라 자동으로 카페로 발길이 이어졌다. 가끔 공부하러 온 사람들 아니면 잠깐 떠들다 사라지는 중년 손님들이 다인 카페는 크기가 무색하게 조용했고, 유타와 나 사이도 조용했다. 카페에서 튼 음악 소리도 작아서 그냥 말했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3. 미적지근 애매모호 나카모토

 

 

 

  슬슬 올라가야지 싶었다. 언제까지 폐를 끼칠 순 없는 노릇이고, 겨울이 되면 일도 없으니 도움이 되기는커녕 밥이나 축내는 꼴이 될 터였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런 생각 말라고 했지만, 마음 한 편이 불편하긴 했다. 그래서 적게라도 돈을 내는 거였다. 생각하다 보니까 또 웃긴 게, 유타는 나와 같은 처지였는데 뭘 보고 나를 집에 들였지. 뻔뻔하기 짝이 없는 애다. 근데 또 나를 받아준 할머니, 할아버지나 눌러살고 있는 나나 다 똑같으니까 웃긴 콩가루 집안이라고 대신했다. 잠시 비집고 나온 웃긴 생각은 접어두고 겨울에 올라가면 뭘 할지가 급했다. 휴학 1년 때려놨으니 대충 알바라도 하면서 까먹은 돈들을 채워 넣고 번호도 바꿀까 싶었다. 고민해봤자 답도 없는, 아니 이미 답은 나와 있지만 하기 싫은 것들은 괜히 머리만 복잡해지게 만들어 자연스럽게도 유타 생각으로 넘어갔다. 솔직히 복잡하기는 그쪽이 더 복잡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과 언변 하며 그냥 일본에서 온 것이나 이것저것 모든 게 다 구라 같을 지경이어서. 그래서 질렀다. 유타를 떠본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나 돌아가려고.”

 

  확실한 건, 이건 100% 충동이고 아직은 먼 이야기라는 거다. 학기가 끝날 때쯤, 그니까 농사도 휴식기에 들어갈 겨울에 올라갈 생각이었다.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에 유타는 별다른 대답을 내어놓지 않았다. 빨대를 휘휘 젓다 고개를 들어 그래? 라는 싱거운 대답을 늘어놨다. 관심이 1g도 들어가지 않은 듯한 말투에 괜히 상처를 받았다. 친구 사이라도 왜? 언제? 하는 물음이 나올 텐데 그마저도 없었다. 유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듯해서 열이 받았지만, 꾹 눌러 참고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가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도영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거잖아. 당연한 거니까.”

 

  쿨하다고 해야 할지, 씹새끼라고 해야 할지. 비꼬듯이 말한 아무렇지도 않냐는 질문에 유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 진짜 속 좁은 또라이가 될 것 같아서 욱하는 걸 꾹 참고 모임 시간 다 됐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미가 가열차게 울어 젖히고 습한 바람조차 불지 않던 그 어느 날, 마을 뒷산에 있는 계곡 아닌 계곡에 발 담그고 앉아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는 어떻게 나를 주워올 생각을 했냐. 내가 도영한테 첫눈에 반했잖아. 구라. 생판 남을 왜 데려다가 밥도 주고 재워줘? 아량이 넓은 줄 알았지. 시골 사람은 다 착할 거라 믿는 순진한 면이 있네. 요즘 세상 흉흉해.

 

  밥 뭐 먹을래? 김치찌개 먹자, 와 같은 대화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쳤었는데 속으로는 쫓기는 꿈이라도 꾼 듯 심장이 달음박질을 쳤었다. 그 뒤로는 솔직히 잊지는 못하고 잊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잘 살았다. 가끔 자기 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면 불쑥 치고 올라오는 그 기억에 자는 유타의 얼굴을 수백 번은 야렸다. 사람 마음 싱숭생숭하게 해놓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행동하는 게 얄미워서 살짝 걷어차거나 이불을 뺏어놓기도 했으며 괜히 한 번씩 신경질을 부렸다. 그럴 때마다 얘 느이 집에 이런 거 없지? 하며 감자를 들이미는 소설 속 유치한 등장인물이라도 된 기분에 기분만 더 잡쳤다. 나중에야 알았다. 유타는 아무에게나 플러팅 멘트를 날린다는 것을. 말로 사람 가지고 노는데 선수였다. 마을 어른들한테도 오늘 머리 새로 볶았냐며 귀엽고 깜찍하다는 말을 하는 걸 보고 기함했었다. 어른들은 깔깔 웃으며 말하는 본새가 꼭 제비 같다는 말을 얹었다.

 

  현실 도피용으로 시작한 야매 국토대장정은 아직도 끝을 못 본 상태로 남았었다. 어쨌거나 시작한 일인데 어설프게라도 끝을 보고 싶었고 혼자보단 둘이 나으니까, 같이 가볼까 싶어 유타에게 한국에서 여행을 간 적이 있냐고 물었었다. 할머니 손주 방학 숙제라며 피래미를 잡던 유타는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여행? 어떻게 보면 여기 있는 것도 여행이지. 그건 왜? 통영 가볼까 해서, 같이 갈래? 유타는 어떠한 확답도 내려주지 않은 채 어깨나 으쓱이곤 물안경까지 쓰고 잠수했다. 저건 싫다는 거지. 그치. 짜증이 나서 유타 쪽으로 작은 돌을 던졌다. 그 뒤로 국토대장정에 대한 생각은 김빠진 콜라처럼 바람이 빠졌다. 영 의욕이 안 생겼다. 애매하기로는 유타를 따라올 놈이 없는데 기대를 잔뜩 담아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밍숭맹숭해 그냥 잔뜩 일이 밀려있을 서울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유타에게는 평생 싱거운 곰국에 소금도 못 치고 처먹어야 하는 형벌을 내려줬으면 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아 텅 빈 예약룸에 앉아있으니까 괜히 싱숭생숭했다. 시골 바닥에 들어앉아 연락 뚝 끊고 3달이나 흘렀는데 부모라는 사람들은 아들이 어디 나가 뒈졌는지 살았는지 궁금하지도 않은지 연락조차 없었고, 마지막 연락은 남은 짐은 오피스텔로 보내놨단 연락이었다. 그마저도 형이 보낸 카톡이었다. 짐은 오피스텔 안에 넣어놨어. 돈도 보낸대. 일단은 잘살고 있어라. 형만 입 닫고 있었다면 안 이랬을걸. 괜히 혼자 화를 냈었다. 부모님만큼이나 무관심한 유타를 한번 쓱 보고, 3달이나 가지 않아 썩었을 음식들 하며 쌓였을 우편물이나 택배들 생각하면 언제 정리하나 싶어 눈앞이 캄캄해졌다. 형 말대로 등록금은 마지막까지 대준다더니 통장에 턱, 쌓인 돈을 보니 학교로 돌아가기도 싫고 삥땅 쳐서 백수 짓이나 하고 싶은 게 간사한 인간의 마음이었다.

 

  허한 마음에 연락 올 곳도 없는데 폰을 꺼내 이리저리 살폈다. 메신저 앱도 들어가 보고 SNS도 들어갔다가 잘 사는 것들만 보고 그러다가 그냥 홀드 버튼을 눌렀다. 메신저 앱에는 읽고 답장도 안 하는 나를 꾸역꾸역 부르는 친구들과의 단톡방만 쌓여있었고 SNS는 으레 그러하듯 좋은 것만 보였다. 별 영양가 없는 연락들을 읽으며 그래도 친구 농사는 괜찮게 지었구나 싶었지만, 입안이 썼다.

 

  사람들이 한두 명씩 들어오면서 자리가 차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 지역 젊은 농업인들의 모임 날이었는데 따지고 보면 이방인인 우리를 모임마다 불러줬다. 유타가 이곳에 온 지는 1년, 모임에 나오게 된 지 딱 10개월 째랬다. 나는 그냥 할아버지 등쌀에 떠밀려 유타를 따라왔다가 계속 나오게 됐다. 젊은 놈이 집에 누워만 있어서 되겠냐며 직접 엮은 싸리 빗자루를 휘두르시기에 냉큼 트럭에 올라타 문을 잠갔었다. 유타는 운전석에 올라타면서 낄낄 웃었고 그게 처음으로 모임에 나갔던 날이었다. 뭐 유타 정도면 이방인은 아니고 귀농인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나는 이 자리가 유타만큼이나 모호하고 그랬다. 일도 시켜야 겨우 하는 내가 여기 껴서 무슨. 그래도 형님, 하면서 술을 넙죽 받아먹었다.

 

  낮술은 애미애비도 못 알아본다고, 학교 다닐 땐 혹시나 한 마음에 절대 마시지 않았는데 여기 와서는 굳이 그런 걸 따지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이끌리는 대로 살았다. 아직 젊은 놈이 뭘 그렇게 점잔을 빼? 인생 애매하게 살믄 재미읍써. 하며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아 넘겨주던 청년회장의 말에 벌떡 일어나서 종이컵에 가득 담긴 소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른 이후로 넙죽, 빼는 것 없이 살았다. 지금 지나가는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도 않고 개같은 기억도 뒤지기 전엔 추억으로 미화될 것이다. 돌아가면 다시는 안 볼 사람들이 태반이었기에 누구처럼 애매하게 점잖빼는 건 사양하기로 했다. 그리고 저녁이 다되도록 마시다 거하게 취해서 집으로 끌려갔다. 잠결에 잔뜩 화난 것 같은 일본어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는데, 뭐 꿈이겠지.

 

 

 

  4. 생각보다 세심한 나카모토

 

 

 

  오랜만에 악몽을 꿨다. 항공권을 취소하기 전의 그 날이 꿈에 나왔다. 누가 뒤통수 쳐서 콱 그 자리에서 죽었으면 했던, 제일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 학교 근처 술집 뒷골목에서 키스를 하는 걸 동기에게 들켰다. 키스가 뭐 대수는 아닌데 상대방은 대수였다. 상대방은 이성이 아니라 동성이었고 평소에 조심하다가 에이, 아무도 모르겠지. 했던 그 날, 종강을 앞두고 있던 그 날에 캠퍼스에 게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일단 먼저 잘못은 내가 했으니까, 흡연 구역에서 키스하고 있었으니까 내 잘못이라 생각하고 그 퍼트린 새끼를 족치진 않았다. 거기서 그치면 그냥 눈 딱 감고 학교라도 다녔을지도 모르겠는데 집에까지 까발려졌다. 형 친구가 우리 학교였다. 형이랑 방에서 싸우다 부모님이 들어버렸다. 그 누구도 어떠한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살얼음판이었다. 나는 머리 빡빡 밀리고 다리 몽둥이 두 개 다 부러지고 방에 갇힐 줄 알았는데, 그 아무도 그 일은 꺼내지 않았다.

 

  하하 호호 관광할 기분도 아니었고 그냥 산골짜기 어디 절이라도 들어가서 대가리 빡빡 깎고 속세와 절연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공부가 될 리도 없고 당연하게도 시험을 망치고 종강했다. 유럽행 비행기와 숙소도 다 취소하고 터미널로 향했다. 금쪽같은 내 돈, 하고 울 시간도 없이 무작정 걷다 보면, 그냥 걷다 보면 세상 사람들이 다 나에 대한 소문은 잊고 나라는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를까 싶어서. 마이웨이로 잘 살아왔다 생각했는데 역시 데미지가 컸다.

 

  아무리 면상에 철판을 깔고 다니는 사람이라 해도 아웃팅을 당한 마당에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고 다닐 순 없을 거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족속보다 자기는 그런 거에 편견이 없다며 괜찮냐고 물어오는 족속들이 더 짜증 났다. 뒤에서 수군거리면 나한테 들리지야 않지, 자기들 흥미를 당기는 소문에 주댕이 나불거리는 주제에 편협한 생각이니 뭐니부터 차별금지법 소리까지 나왔다. 듣기 고까웠다. 그래서 최대한 숨어다니면서 시험을 치르고 마지막 날엔 사물함을 정리하고 학교를 떴다. 일단은 개강 전까지 최대한 소문이 가라앉길 바랐다. 중간에 몇 번 내 키스를 목격한 새끼와 마주치기도 했는데 처음엔 화들짝 놀라 빙 돌아서 사라지더니 나중엔 뻔뻔하게도 인사를 걸어왔다. 재수가 없어서 한 번 야리고 책이 가득 든 캐리어를 끌고 오피스텔로 돌아간 게 마지막이었다. 아 그때 책으로 후려치고 올 걸, 하는 후회가 생겼다.

 

  유타와 처음 만났을 때도 연락이 오긴 했다. 그 호랑 말코 같은 새끼는 뻔뻔하게 유럽 여행에 관해서 물었다. 도영아, 너 파리 인 런던 아웃이라고? 지랄이었다. 아무에게도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어디서 흘려듣고 와서 묻는 게 잔뜩 약이 올랐다. 답장도 안 하고 폰을 껐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하는 억울한 마음이 비집고 올라오는 걸 꾹 눌러 저 아래로 내려보냈다. 저 새끼 주둥이 가볍게 놀리다 걸린 거네? 하며 낄낄대던 선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래 그 새끼는 나 원래 고까워하던 새끼여서 데미지도 없, 아니 조금은 있었지만 그냥 넘겼다. 솔직히 나는 키스 정도고, 저 새끼는 지 전여친이랑 잔 거 다 떠벌리는 새끼인데. 누가 더 구설수에 올라야 하는게 옳지. 꿈에서 현타가 찾아왔다.

 

  배경이 갑자기 전환되고 카페에 앉아있는 유타가 보였다. 도영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거잖아. 잘생긴 상판으로 잘도 저런 무책임한 말을 내뱉네. 얼굴값을 하는 건가.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유타의 말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걔는 뭣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말했을 테니까. 아니 근데 내가 뭐 잘못을 한 건 아닌데 타의 반 자의 반으로 휴학을 하니까 저 말이 괜히 억울했다. 키스가 죄니? 사람 마음이 죄야?

 

  또 화면이 전환되고 삼류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대사와 함께 쭝얼쭝얼 욕을 하고 있는데 새로운 주정이냐며 유타가 손을 뻗어왔다. 새로운 염병이라고 맞받아치며 유타의 손을 잡고 일어나면서 얼굴을 들이미니 고개를 쑥 뒤로 빼며 피했다. 하학 웃다가 눈을 떴는데 내게 키스를 하는 유타의 얼굴이 보였다. 이게 꿈인가? 꿈이지? 그래, 이게 꿈이네.

 

  유타의 감긴 눈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허억,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번쩍 떴다. 꿈 맞지 그거. 경상도 출신이라는 할머니 말투처럼 꿈은 싸악했다. 이건 기어코 내 대가리가 돌아버린 거다. 서로 주디를 붙이고 쎗바닥을 요리조리 부볐다니까. 약간 신음소리도 났어. 악. 무의식은 항상 주인의 뇌를 배반하고 보기 싫은 것만 보여줬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짝꿍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이후로 일주일 내내 차인 꿈을 꿨다. 고등학교 1학년 축제 때, 밴드부 보컬로 나가 삑사리를 낸 이후로 2주 동안 부르는 족족 삑사리를 내는 꿈을 꿨다. 군 제대 했을 때에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후 재입대하는 꿈을 꾸고 또 이런 뭔 키스하는 꿈을 꿨다.

 

  이불을 퍽퍽 차다 옆을 보니 유타는 자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부엌엔 할머니가 아침을 준비하시는 소리가 들렸고 마당으로 나오니 할아버지가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옆에 앉아 잔뜩 취해 추태를 부린 거 없냐고 물었더니 대뜸 돌아간다고? 하는 말이 돌아왔다.

 

  “당장은 아니고 겨울에요. 반년이면 쉴 만큼 쉬었겠죠.”

  “뭔 속상한 일이 있었던 건지는 내 잘 모르지만, 푹 쉬었다 가면 좋겠구먼.”

  “몸은 뭐 못 쉬지만, 머리는 쉴 수 있어서 좋아요. 감사해요.”

  “감사는, 도영이 니 가믄 유타 많이 섭섭하겠는데.”

  “간다니까 별말 없어서 제가 더 서운하던데요.”

 

  걔가 세심해서 그랴. 세심하고 성실하고 또 겁이 많고. 유타가요? 머리를 긁적이며 의아하다는 듯이 말하니까 할아버지가 껄껄, 하고 가래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니도 갸가 무뚝뚝하고 무심해보이는 갑네. 입술을 삐죽이며 유타를 떠올려봤다. 흘리듯 말한 것도 다 기억해 다시 언급하고, 손을 잘 안 뻗는 반찬은 내 앞에 두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약이나 영양제도 매번 챙기고 밭이나 논을 보고 오면서 마을 사람들 밭도 한 번 쓱 보고 도와주기도 했다. 밭이나 논으로 일하러 나가면 모자나 수건, 팔토시, 얼린 물 같은 걸 꼼꼼하게도 챙겼다. 게다가 유타는 기억력이 좋았는데 기억력이야 말로 관심과 체력을 요하는 것이라 생각했어서 신기하다 생각했었던 적도 있었다. 나도 사람을 잘 챙기는 타입이었는데도 내가 놓치는 부분을 유타가 캐치했었다. 몇 가지를 떠올려보지 않아도 유타의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 보였다. 할아버지 말이 맞았네.

 

  머릴 긁적이며 그런 것 같네요, 하니 세심한 주제에 그런 사탕발림들은 치면서 속내는 숨기는 놈이라 그랬다. 상처받기 싫어서 먼저 벽을 치는 겨. 먼저 능청스럽게 굴면 야는 그런 놈인갑다, 하고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넘겨. 근디 그게 또 본인을 외롭게 만드는 길이여. 도영이 가믄 유타 그 놈도 많이 서운할 겨.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칠십 평생 살아온 경험치가 내 머릿 속에 있지. 할아버지는 담배 꽁초를 재털이에 버리고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딱 보면 알어. 1년이면 젊은이한텐 짧아도 노인네한텐 길고, 진득하니 봐온 결과여. 저도 그런 데이터가 딱 있었으면 좋겠네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엉덩이를 털고 기지개를 켰다.

 

  “꽁으로 얻을라고?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쌓아야 경험이제, 꽁으로 얻으면 편법인 거여.”

  “편법도 나쁘지 않잖아요.”

  “제대로 짱구를 굴릴 줄 알아야 답을 얻는 거지.”

 

  할아버지는 아침 먹으라는 할머니의 말에 냉큼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강아지 사료를 부어주고 그 앞에 주저앉았다. 아침 안 먹냐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속이 안 좋다며 대꾸하고 열심히 먹는 강아지를 봤다. 섬세하고 벽치는 놈은 어떻게 다가가야 하냐? 너는 알아? 너 동네 강아지들 다 임신시키고 다녔잖아. 새끼만 몇 마리냐? 완전 다둥이 아빠. 허겁지겁 사료를 다 먹은 강아지가 왕왕 짖는데 꼭 정신 좀 차리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치? 너가 봐도 나 제정신 아니지? 더 호되게 당해봐야 해.

 

 

 

  5. 좋아하냐 나카모토?

 

 

 

  유타가 일어나자마자 부랴부랴 땅콩밭으로 나가 열심히 뽑아댔다. 아침에 들은 걸 되새기며 일하니까 유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심 먹고 하라는 전화에 털레털레 집으로 가 시원한 잔치국수를 후루룩 먹고 쉬다가 다시 밭으로 나왔다. 해가 없어서 할 만했다. 오전에 땅콩을 뽑아 놓은 걸 한쪽으로 모아놓고 자리를 잡았다. 땅콩을 톡톡 따서 플라스틱 상자 안으로 모았다. 하다 보니 단순 노동이라 좀이 쑤셨다. 할아버지는 장에 가셨고, 할머니는 다른 밭에서 친구분과 일하고 계셨다. 땅콩밭엔 둘 밖에 없단 소리였다.

 

  둘 다 평소에 어른들이랑 있으면 입이 쉬질 않는다는 소릴 종종 들었는데 꼭 둘만 있으면 묘하게 조용했다. 장갑을 벗고 폰을 꺼내 노래를 틀었다. 신청곡 받는다며 폰을 번쩍 들어 올려 보이니까 유타는 고민하다가 일본 노래를 틀어 달라 그랬다. 제목이 뭐라고? 아카네이로노유우히. 스다 마사키? 응. 나 얘 알아. 그래? 유명하잖아. 제목 뜻이 뭔 줄 알아? 뭔데. 붉은 석양.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하는 게 꼭 처음 만났던 하늘을 기억하냐는 것 같은 의미가 담긴 것처럼 느껴졌다. 넘겨짚는 것도 유분수지, 하면서 좋네. 하고 말았다. 노래는 기타 반주가 다였다. 날 것의 느낌이 강했는데 이상하게도 좋았다. 더 와닿는 느낌? 가사는 모르겠고 유타가 묘한 표정으로 웃는 걸 보다 땅콩 따기에만 열중했다. 상자에 탈탈 털고 아직 떨어지지 않은 것들은 따서 넣고 줄기는 옆에 산처럼 쌓았다. 말려서 소여물 사이에 섞어서 줄 거란다. 해가 지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 많은 고구마도 캤는데 땅콩이라고 못할까, 어둑어둑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질 때가 되어서야 트럭에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땅콩은 씻어서 말려야 한다고 마당 한구석에 모아뒀고, 줄기도 볏짚 쌓아둔 곳 앞에다 모아놨다. 안 말린 거 줘도 먹냐고 물으니 걔넨 수박 껍데기도 잘 먹는 애들이랜다. 사료나 지푸라기보단 맛이 좋을 걸, 했다.

 

  옷에 붙은 흙을 탈탈 털고 신발도 탈탈 털고 들어가 바로 샤워를 했다. 땀을 흘렸더니 노곤노곤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저녁을 먹으니까 또 잠이 깼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고단했는지 금방 잠자리에 드셨는데 한 번 깬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맥주 한 캔이라도 마셔야 잠이 올 것 같은 밤이었다. 마을 유일의 슈퍼는 이미 문을 닫았을 거고, 좀 더 걸어서 옆 마을 편의점이라도 갈 참으로 막 뒹굴고 있는 슬리퍼를 신었다.

 

  깽깽 뛰어오르는 강아지 물그릇을 한 번 씻어 물을 다시 떠다 주고 대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싸한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가 후드라도 걸치고 나올 걸, 하고 후회했다가 걷다보면 괜찮아지겠지 싶어서 그냥 가기로 했다. 24시간 편의점은 아니고 11시, 12시쯤 닫는 편의점이라 부지런히 발을 놀리며 자동반사적으로 유타 생각에 잠겼다.

 

  그냥 어쩌다 알게 되어 같이 사는 중인 사람치고는 너무 신경이 쓰였다. 가끔 알 수 없는 상대방이랑 통화하는 것 같은데 그마저도 일본어인 데다가 정 없이 금방 끊어서 누군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대화 내용이 궁금해 이어폰을 끼고 누워 유튜브로 일본어 강의를 찔끔찔끔 보다가도 내팽개치길 여러 번이었다. 아니 미친 그 짧은 대화가 궁금해서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돼? 야, 어쩌다 알게 된 것까진 몰라도 같이 사는 건 그래도 되는 거지. 머릿속에선 수백 수천 번 천사와 악마가 오갔다. 아니, 천사와 악마가 아니고 현타와 합리화라는 게 더 옳을 내용이었다.

 

  솔직히 유타에게 묻고싶은 게 수두룩빽빽이었다. 뒤지게도 많이 들었을 한국엔 왜 왔냐, 부터 시작해서 주기적으로 통화하는 사람은 누구냐, 가족이냐,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 일본에선 뭐했었냐, 애인 있냐 등등 궁금한 게 여간 많은 게 아니었지만, 그냥 입 꾹 닫고 있었다. 언젠가는 속을 털어놓을 수 있겠지 싶어서, 내가 묻지 않아도 본인이 먼저 입을 열 때가 오겠지 싶어서. 그런데 아침에 나눴던 대화를 되새기니 굳이 제 입으로 먼저 말할 것 같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진짜 모르겠다. 생각만 백 번 하면 뭘 하나,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모를 내용인데. 생각하기를 접고 이어폰을 꽂았다.

 

  흥얼거리며 걷다 보니 벌써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는 아니고 한 40분이 훌쩍 흘러 있었다. 트럭을 타고 나왔으면 더 금방이었을 텐데 아쉽게도 난 장롱면허였고, 운전 가능한 유타는 씻고 바로 자는 듯해서 걸어왔는데도 거리감을 느끼지 못한 게 신기했다. 유타 생각에 너무 열을 올렸나 싶고. 40분을 걸어온 것 치곤 간단하게 샀다. 캔맥주 2개와 육포 하나. 계산하고 맥주 마시고 잘 생각에 신나게 봉투를 흔들면서 걸어가는 도중, 가로등 아래로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유타였다.

 

  “왜 나와 있어? 어디 가게?”

  “편의점 다녀와? 말을 하지.”

  “바로 방으로 들어가길래 자는 줄 알았지.”

 

  마을 어귀도 아니고 편의점 근처까지 나온 유타가 편의점 다녀오냐며 모르는 척 묻는 게, 그리고 나를 보는 눈빛은 꼭 안도의 눈빛이라 춥다며 얼른 돌아가자고 유타를 팔을 끌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흔들리는 봉투 소리, 질질 끌고 있는 슬리퍼 소리, 그리고 복잡한 내 머리만 굴러가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밤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쌀쌀해서? 유타와 나 사이에서 흐르는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르게 굉장히 어색했다. 막말로 살 부대끼고 산 지 3개월인데 왜 이리 어색한지, 등 뒤로 땀을 삐질 흘리는 동안 유타는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내가 아까 정말 넘겨짚은 게 맞나, 괜히 더 복잡해져서 맥주를 더 사올 걸 후회했다. 어색하게 30분쯤 걸어서 도착했다. 테이블 위에 봉투를 올려두고 발좀 씻고 오겠다며 화장실로 들어왔다. 이런 긴장감은 남자랑 키스하고 있는 걸 들킨 이후로 처음이었다. 플러팅 멘트를 처음 들었을 때에도 이렇게는 심장이 안 뛰었다. 아까 그 눈빛이 붉은 석양, 이라고 말하는 유타와 겹쳐 보여서. 세수까지 하고 나와 아무렇지 않은 척 바닥에 털푸덕 앉아 머리를 털며 올려놨던 맥주를 꺼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한 번 털고 맥주캔을 깠다.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품이 올라오다 잦아들고 한 모금 마시기 전에 유타에게 들이미니 고개를 젓고 봉투 안의 다른 맥주를 꺼냈다. 시덥지 않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집중하는 척 유타를 흘깃대니 유타도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다리를 떨어댔다.

 

  “뭐 할 말 있어?”

 

  상냥하지도, 그렇다고 퉁명스럽지도 않은 말투로 물었더니 티비에 고정됐었던 - 척을 한 - 시선이 내게로 옮겨왔다. 내 얼굴을 빤히 보던 유타는 팔짱을 끼고 소파에 푹 기대며 다시 티비로 시선을 돌렸다. 말하려면 빨리 말하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피곤하니까 후딱 해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맥주를 탈탈 털어 마시고 새 캔으로 손을 뻗으려는데 유타가 입을 열었다. 안 갔으면 좋겠어. 뭘?

 

  “도영이, 원래 자리로, 안 돌아갔음 좋겠다고.”

  “갑자기 왜 그걸 말할 생각이 든 거야?”

 

 

 

  6. 나 좋아하네, 나카모토

 

 

 

  말투가 오은영 선생님처럼 누그러졌다. 우물쭈물하는 유타를 처음 봐서 신기했다. 아 나 놀릴 때 이런 기분인가? 매일 도영, 도영, 하면서 놀려대던 유타와 반전이 된 상황에서 웃음이 피실피실 나왔다. 나 좋아하네, 얘. 그게 이제야 느껴졌다. 나 눈치 성적이랑 말아 먹었나 봐. 할아버지는 다 알고 계셨구나. 그러니까 서운하겠단 말을 하셨구나. 유타는 갑자기 관계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감정이 이성보다 먼저인 타입이라 내 감정을 상대방에게 알려주고 싶었었어. 내가 이만큼 널 좋아한다, 사랑한다. 근데 그건 내 욕심이고 강요였던 거야. 그런 관계는 금방 지치더라.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내가 생각해낸 건, 나를 숨기는 거였어.

 

  구구절절 말하는 건 변명이었다. 관계가 무너지는 것이 겁이 났던 겁쟁이의 변명. 한국으로 온 것도 지난 관계들에 대한 도망이라고 했다. 나랑 똑같네. 나는 남자랑 키스하다가 걸려서 학교에 소문나고 집에도 걸렸거든. 그래서 도망친 거야. 유럽행 비행기 취소하고. 안정을 찾고 싶었어. 걷다 보면 불안한 마음도 사라질 것 같았고, 초록빛 세상만 보면 괜찮아질 것 같아서. 그리고 말 안 통하는 외국에서 전정긍긍 하기 싫어서. 근데 넌 나보다 용기 있다.

 

  사람이 왜 그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알 수 없었던 나카모토 유타의 속을 알고 나니 편안함이 찾아왔다. 마음속에 있는 파도가 온갖 고민을 휩쓸고 나간 기분이었다. 근데 그때 내 머릿속을 치고 가는 단편적인 기억이 있었다. 내 꿈엔 겪어보지 않은 건 안 나온다. 좀비에게 쫓기고 외계인이 침공하고 그런 꿈은 절대 안 꾸고 트라우마로 남는 기억들만 꿈에 나타났다. 그럼 어젯밤 키스는 뭔데? 꿈이 아니었던 거야? 말을 하다말고 입술을 때리는 나를 보고 유타는 왜 그러냐며 손을 잡았다.

 

  “우리 키스했어?”

  “기억이 없어, 도영?”

  “꿈인 줄 알았지!”

 

  소리를 꽥 지르자 할머니, 할아버지 깨신다며 유타가 내 입을 막았다. 나는 도영이 키스 때문에 날 피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널 왜 피해? 아침에도 나보다 먼저 깨서 옆에도 없었잖아. 아까도 말도 없이 사라져서 놀라서 찾으러 나갔는데 편의점 간 거라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널 안 피했으면 절대 말 안 했겠네. 돌아가기 전날에 말하려고 했어. 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봤어? 거기선 삽질만 하다 돌아가기를 며칠 남겨두지도 않고 붙어먹어, 주인공이. 그리고 그 삽질한 시간이 아깝다는 대사가 나오거든. 너도 분명 그랬을 거다. 청년회장님이 그랬잖아. 인생 애매하게 살면 재미가 없다고. 인생 재밌게 살자. 나 휴학 1년 했어. 마음 바꿨어. 내년 여름까지 있을 거야. 근데 집이 문제라서 그것 좀 해결하고 올게. 아니면 같이 갈래? 유타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어 보였다. 같이 가자. 할머니, 할아버지께 거하게 인사드리고 올라가자. 솔직히 도영 몸 쓰는 타입은 아니잖아. 맞는 말도 기분 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다, 너. 눈을 한껏 접어 웃는 유타를 보곤 더는 할 말이 사라졌다. 그냥 얼굴만 보고 있어도 좋았다. 남은 맥주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테이블 정리를 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으며 말씀드렸다. 유타도 같이 간대요. 12월 말에 올라가려구요. 연초까지 있다가 가지. 연초에 오피스텔 계약이 끝나서 이사나 재계약을 해야 해서요. 아쉽네. 저희도요. 근데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요. 많이 부려먹으세요. 물론 유타요. 할아버지는 어제와 같이 가래 섞인 웃음을 터트리며 젊어서 그런지 빠르기도 엄청 빠르다고 했고, 할머니는 가서도 연락하라고 그랬다. 아직 많이 남았거든요? 연락 당연히 드리죠. 명절마다 한우 세트 보내드릴 거예요.

 

  유타에게 물었다. 먼저 이별을 고하는 기분은 어떠냐고. 생각보다 후련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니까 시원한 구석은 있다고. 나는 그런 유타를 보고 자신감을 얻었다. 복학은 커리큘럼 때문에 예정대로 2학기에 할 생각이지만 과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조금 줄어들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노숙해야 할 줄로만 알았다가 유타를 따라와서 농사를 짓게 된 것처럼 어떻게든 굴러가는 인생, 청년회장 말마따나 애매하게 살다 가면 재미없으니까, 나카모토 정의 내리기는 끝을 내고 이제는 나카모토와 함께하는 인생의 정의를 내리기로 했다.

 

  근데 도영, 꿈인 줄 알았다니까 하는 말인데. 뭔데 또. 제정신일 때 한 번 더 하자고. 우리 뭐 내일 헤어지냐. 왜 이렇게 급해? 그리고 키스는 어쩌다 한 건데? 설마 내가 갖다 박았어? 도영 다음부터는 진짜 낮술 하지 말자. 아 뭔데! 혼자 머리 부여잡고 생각해내든가. 근데 우리 몇 시에 들어왔어? 나 완전 진짜 기억이 없어. 아, 제발 말해 줘. 말 안 해주면 키스 말고 뽀뽀해버린다. 그럼 일단 뽀뽀해봐. 하는 거 봐서 말해줄게. 됐다 됐어. 안 해. 안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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