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번의 눈표범 <상>
씁싹
일곱번째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새벽 첫 버스를 타고 스키장으로 향하는 길에 할 생각이 달리 없다. 이제 일월도 일주일 남았다. 김 서린 창문을 대충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았다. 으. 지지. 위생을 포기한 대신 시야가 밝아졌다. 정확히는 아주 어두운 고속도로 군데군데 이런 저런 라이트들이 보인다. 도시의 식구들. 점점 줄어들다 다시 조금씩 늘어나면 스키장이다. 날이 느리게 밝는다.
백 번의 눈표범
씁싹
처음 입양 사실을 말해줬던 아빠 모습이 기억난다. 도영아, 여기 앉아봐. 아빠는 무슨 오래 되어보이는 한지를 바닥에 깔아놓고 말했다. 거기에는 도영, 내 이름이 한자로 적혀있었다. 내가 아무리 까막눈이래도 이름은 읽을 줄 알았다. 그때 나는 열 한 살이었고 이름을 한자공책 가득 써가는 숙제를 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이래저래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더니 아빠가 얼마나 진심을 다해 날 사랑하고, 한 번도 거짓이었던 적 없으며, 앞으로도 똑같을 것이라는 걸 주구장창 얘기했다. 울음을 막 억지로 참는 거 같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시발, 버릴건가봐. 돈도 많은 양반이 왜 갑자기. 아부지.
그러더니 아빠는 한지의 귀퉁이에 찍힌 도장을 가리켰다. 저건 못읽는다.
“도영아.”
“응, 아빠.”
“이건 네 엄마 도장이야.”
“응…”
나는 조금 당황했다. 태어나서 왜 엄마가 없지,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있었으면 어떤 사람이었을까도 생각했다. 여러모로. 근데 내 이름이 적힌 종이 귀퉁이에 엄마 이름이 빨갛게 찍혀있는 걸 설명하는 아빠는 좀 낯설었다.
“그리고 내 여동생이기도 해.”
“…?”
“몸이 너무 안좋아서 널 낳고 산에 있다가 죽었어.”
“…”
“죽기 전에 네 이름은 써줬어. 그리고 자기 마지막 선물이라고 널 나한테 맡겼어.”
“…”
“자기가 가진 것 중에 제일 소중했으니까 계속 소중히 여겨줄 사람에게 맡기고 싶다고.”
그리고 아빠랑 나는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나는 아파서 죽었다는 엄마가 불쌍했다. 죽었을 거라는 생각은 진작에 했는데, 아빠가 외삼촌일줄은 몰랐지. 나를 소중하게 여기다가 죽었을 줄은 몰랐지. 아빠도 같이 울었다. 아빠도 동생이 보고싶었던 것 같다. 나는 슬퍼 죽겠는 마당에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가 다른 사람 아니고 아빠한테 날 맡기고 죽어서 참 다행이라고. 엄마 말대로 참 소중하게 나를 키워왔다고. 굶지는 않았다고.
**
마지막 연애의 전말은 대충 이러하다. 걔는 과에서 두번째로 예쁘다고 복학생 선배들이 난리를 치는 애였다. 나랑은 이 년 즈음을 어색하지만 아는 사이로 지냈고, 올해 가을에 들어서야 교양을 들으며 친해졌다. 근데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 술을 먹자는 거야. 예상은 했다. 둘중에 하나는 고백하고 내일부터 못 보던지 살 맞대고 보겠군.
후자였다. 걔는 취해서 다짜고짜 샴푸향 나는 머리를 어깨에 기대더니 나를 슬쩍 쳐다봤다. 그리고 입부터 맞췄다. 그러더니 그런다. 도영아, 나 너 좋아해도 돼? 나는 술김에 된다고 했다. 술김에 혀도 섞었다. 술김에 비트윈도 깔았고 술김에 아주, 쇳불도 단김에 빼랬다고 단김에 뺐다. 그냥 나쁠 거 없었다.
예쁜 애였다. 다들 예쁘다고 했고 괜찮은 애였다. 착했다. 나를 좋아했다. 나는 이전의 여섯번의 실패담을 통해 얻은 잔지식을 모두 연애에 동원했다. 맨날 예쁘게 셀카를 찍어서 보내줬다. 무신사에서 남친룩만 검색해서 주구장창 사 입었다. 같이 전시회를 보러 갔다. 크리스마스에는 호두까기 인형 표도 구해서 봤다. 우아하게 파인다이닝에서 와인 따르는 건 못했지만 우아하게 조용한 비스토레에 찾아가서 밥을 먹었다. 손 잡고 광화문을 걷고, 자취방에서 같이 넷플릭스 보다 뽀뽀하고, 분위기 맞으면 섹스하고, 좋아해, 나도, 그런말도 잘 해주고. 근데 그러다가 얘가 갑자기 술먹고 문을 두드렸다.
너는 다 거짓말이지. 너 여자를 좋아하는 거는 맞니? 내가 좋은 게 맞아?
갑자기 자몽에이슬 냄새를 풍기면서 우는 여자친구가 당황스러워서 나는 잘 다독였다. 무슨 소리야. 나도 너 정말 좋아해. 여자를 좋아하는 게 맞냐니. 너 좋아해서 너 만나잖아. 너 여자잖아. 그럼 여자 좋아하는 게 맞잖아.
개 구라쟁이 새끼. 지 마음도 모르는 씨발놈. 같이 있으면 거슬릴 거 없으니까 나랑 노는거지. 뽀뽀 대충 하고 땀흘리면서 섹스하면 다 숨겨질 줄 알지. 길바닥에서 귀엽게 목도리 사오고 광화문에 예술영화 예매해 놓으면 니가 쓰레기같은 한남들이랑 다른 줄 알지.
아니 얘는 언제부터 이렇게 화를, 아니 내가 뭘, 아니,
너는
좋아하는게 뭔지 알고 하는거야?
왜그래. 당연히 알고 하는거지. 아니까 이렇게 하지.
아니, 너는 진짜, 잘 짜인 남친 알고리즘 같애. 내가 비참해서 더는 못해먹겠어. 네가 좋아서 그냥 참고 있으려고 했는데, 아니야. 이거는 정말 아니야.
그리고 푹 쓰러져 잠든 여자친구는 새벽에 말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까지 연락 두절이다. 열흘 되었나. 나는 어쨌든 일상은 해나가야 하니까. 쪼금 슬프긴 한데, 좀 슬픈데, 에휴. 돈은 벌어야 하니까.
온면 IC를 지나 봉평에 선 버스에서 시즌권을 확인하고 캐리어를 꺼냈다. 돈 많은 강습생은 회원권도 있고 어쩌구 저쩌구여서 강습하는 동안 편히 지내시라고 작은 평수 방도 하나 잡아줬다. 이건 강습비 말고 그냥 제 정성이에요, 그러니까 잘 가르쳐주세요. 뭐 그런 말 하길래 감사합니다, 넙죽 하고 받았지. 이 시기에 방값이 얼마인데.
블루동 제일 작은방에 체크인을 하고 데스크 앞에 있는 까페에 가서 앉았다. 오전 여섯시, 이수역 앞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면 봉평에 여덟시 반, 아홉시에는 내린다. 체크인은 사실 한시 넘어야 해주는데 졸려 죽겠다. 나는 왜 헤어졌나. 나는 좋아한 게 맞는데 좋아한 게 좋아한 게 아니라고 하는 이 못된 구여친아. 짜증이 나서 청승떨려고 산 시집을 뒤적거리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
“회원님, 이거 아까 패러렐 타고 내려오시는 거 제가 찍었는데 올라가면서 모니터 할게요.”
“네.”
리프트를 기다리면서 나는 장갑을 대충 벗고 핸드폰을 슥슥 만졌다. 으, 얼 것 같아. 근데 바로 타고 바로 모니터 해야 실력이 는단 말이다. 돈이 어디 공짜로 벌리나.
리프트 바를 내리고 패트롤의 인사를 받으며 올라간다. 오후 슬로프는 원래 더운데, 일월 말이 되어가서 그마져도 으슬으슬 하다. 나는 한쪽 겨드랑이에 폴과 장갑을 꼭 끼고 핸드폰 밝기를 최대로 올려 수강생에게 보여줬다.
“여기 턴 약간 날리면서 하시거든요. 이러면 나중에 무게중심 옮기는 거 제대로 안하는 게 습관됩니다.”
“아, 네.”
“끝까지 누른다는 느낌으로 다운하는 발에 체중 다 실으시고, 그 다음에 뉴트럴 포지션 하셔야 해요. 무섭다고 몸 먼저 틀면 턴이 흩어져요.”
수강생은 그걸 내가 몰라서 그런 건 아니올시다 하는 눈으로 나를 봤다.
“아유, 어려운 거 아는데 그렇게 타야 더 안전하고 예뻐요.”
“아니 근데 쌤, 어려운 것 보다 무서워서. 턴 끝까지 하려면 정면으로 경사를 봐야 하잖아요. 본능적으로 고개가 먼저 돌아가.”
“회원님, 고개는 상체랑 따로 놀면 안 돼요. 눈만 돌리셔야 해요. 고개 먼저 돌려서 무게중심 이동하는 건 나중에 해도 돼요.”
“아니, 쌤. 근데 이거를 봐요. 내가 팔을 이렇게 들고 폴을 이렇게 놓고, 정면을 보잖”
수강생은 열정적으로 팔을 움직여 자기의 어려움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열정이 아주 경미하고도 짜증스러운 사고를 발생시켰다. 폴이 리프트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이런... 회원님, 참... 손 많이 가시는 분이네.
“아니, 어떡해!”
“어떡하긴요. 제가 주워올게요.”
“왜 쌤이 주워요, 패트롤한테 부탁해요.”
“아니에요. 여기 패트롤들 저랑 친한데, 그런거 부탁하면 싫어해요. 제가 주워올게요.”
“아니, 그래도.”
“여기 좀만 계세요.”
나는 팔콘 슬로프 정상에 회원을 대충 팽개쳐두고 경사로 몸을 돌렸다. 폴은 핑계고 오늘 눈이 좋아서 개운하게 한 번 타고 싶었다. 너무 좋은 기회잖아. 폴이 거기 딱 떨어져주다니. 대충 위치도 봐 두었으니 나는 강습하느냐 즐기지 못했던 속도를 간만에 느끼며 산을 깎고 내려왔다. 어우 시원해.
스키 날이 잘 밟힌 눈에 들어가며 소리를 낸다. 이맘때는 날이 춥고 자연설이 많이 내리는데 그 눈을 정설하면 카빙이 기깔나게 된다. 턴도 이쁘게 나오고, 나 지나간 자리마다 눈 패인 그림자가 자존감을 올려준다. 크. 시원해. 이쯤인데. 나는 스키를 횡으로 세워두고 안전망을 조심조심 넘었다. 사실 스키장 중간중간 리프트가 지나가는 자리는 계곡이어서 밑에가 다 돌이다. 진짜 조심 안 하면 그대로 돌아가실 수도 있다. 자기보호 의지가 아주 강한 김도영은 정말 살금살금, 폴을 짚으며 낮은 자세로 회원의 칠칠맞음을 주워담으려 움직였다.
근데
정말 예쁘다. 리프트 밑이니 겨우내 누가 한 번 밟은 적도 없는 눈. 날이 풀렸다 추워졌다 하면서 녹고 얼기를 반복한 눈이 햇볓에 보석처럼 빛났다. 나는 뭐에 홀린듯이 반짝이는 눈을 따라서 이리저리 시선을 옮겼다. 얼음이 아니라 다이아같아. 어떻게 저렇게 빛나? 진짜 너무 예쁘다. 진짜 너무,
“악!!!!”
**
눈을 뜨니 어두침침한 형광등 사이에 파스향기가 군데군데 끼어있다. 의무실이네. 아, 강습. 아, 시발, 다리? 아. 휴, 괜찮네. 잠깐만, 근데 여기...
“정신 들어요?”
“네?”
“금방 깼네.”
“…네?”
“아니, 저, 강습, 회원님은, 잠깐만 지금 몇시에요?”
“강습? 강습 하는 사람이 그렇게 들어가면 안 되는 곳 들어가서 넘어져요?”
“아니, 회원님이 폴 떨어뜨려서, 아, 그니까,”
“그 키 별로 안크고 멍하게 생긴 남자요?”
“예?”
“그 남자 여기 왔다가 갔어요. 선생님 죽었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라고 한숨 쉬면서.”
“죽어요?”
“한참 기다려도 안 올라오길래 내려와 봤는데 없더래, 그래서 그냥 의무실 부터 와봤대요.”
“아니, 근데,”
누구세요?
**
시원하게 큰 눈으로 말똥말똥 나를 보던 귀여운 남자는 자기가 영흠이라고 했다. 이름 한번 참 멋있네요. 네, 알아요. 친구가 지어줬어요. 친구요? 이름을요? 응. 뭐 그럴 일이 좀 있어요.
나는 거기 눈 반짝인다고 멍때리다가 발을 헛디뎌서 놀라 쓰러진 거였다. 그 김에 기절도 잠시 했나보다. 몸은 다 멀쩡한데 엉덩이에 멍 좀 들었고. 슬로프 내려오다 날 보고 깜짝 놀래서 패트롤 불렀다고. 혼자 두기 뭐해서 의무실까지 따라왔다고 했다. 예... 그러시구나.
“감사해요.”
“진짜요?”
“아니, 네. 그럼 가짜로 어떻게 감사해요...”
남자는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밥 먹자고, 자기 배고프단다.
“예, 제가 살게요...”
나는 뭔가 기가 죽어서 얌전히 대답했다. 뭐가 날 기 죽이나 했더니 남자가 까만 미들러 안에 하얀 티셔츠 한장만 입고 있어서 그랬다. 아니 가슴이 저렇게 파인거를 이 추운데... 마른 가슴 근육이 갈라진 사이가 형광등 아래서 매끈매끈 빛났다.
“뭘 그렇게 봐요.”
내가 너무 쳐다봤나.
“남자 가슴 처음 봐요?”
아니, 그게 아니라. 댁이 이 추운데서
“이쁘면 말을 하지 뭘.”
그리고 남자는 일어서서 뒤도 안 돌아보고 의무실 문으로 향했다. 나는 홀린듯이 남자를 따라갔다. 이상해... 이상하다... 이상한 사람이야...
**
메뉴를 고르라는 말에 영흠은 망설임 없이 피자! 하고 대답했다. 스키장엔 피자 먹을 곳이 마땅치가 않은데... 나는 좀 망설이다가 그럼 내 숙소 가서 먹을래요? 포장해서요. 물었고 남자는 눈을 구기며 살랑살랑 웃었다. 뭐야... 애교가 많은 분이네. 좋아요.
블루동 내 숙소는 밖으로 슬로프가 훤히 보였다. 우리는 어두워진 슬로프에 조명이 켜지는 걸 보며 피자를 우물거렸다. 영흠은 덥다고 미들러를 휙 벗더니 대충 식탁 의자에 걸쳐두고 소파에 앉았다. 헐렁하고 매끈한 반팔티가 요염하게 몸에 매달려있었다. 티가 어떻게 매달려있냐고? 나도 몰랐다. 근데 그건 매달려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안 추워요?”
“안 더워요?”
“아니 여기서는 그렇다 치고, 아까 의무실에서도 미들러만 입고 있었잖아요.”
“원래 스키 안 탈 때는 미들러만 입고 돌아다녀요.”
“무슨 소리에요. 그럼 저를 어떻게 끌고 내려오셨어요.”
“그러게요."
영흠은 나를 가만히 보더니 이를 보이며 씨익 웃었다. 여자였다면 나한테 끼 엄청 부린다고 생각했을거야.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에이, 뭘. 하면서 피클을 하나 씹었다. 시큼하게 터지는 오이 사이로 뭔가 묘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피자를 대충 다 먹었다는 제스쳐를 취하고 박스를 식탁에 가져다두었다. 이제 가시려나 했는데 영흠은 빠안히 나를 한 번, 냉장고를 한 번 바라봤다.
“어… 뭐 드릴까요?”
“맥주요.”
여기가 호프인 줄 아는걸까. 갑자기 이 콘도 냉장고에서 맥주가 어떻게 나와요.
“아, 없는데…”
“사러 가요. 같이.”
“예?”
“맥주는 제가 쏜다.”
그러더니 남자는 반팔차림 그대로 지갑을 챙겨서 일어났다. 블루동 지하에서 편의점으로 연결된 통로는 좀 추운데. 우리는 한 척 정도 떨어져서 뻘쭘하게 걸었다. 그러다 영흠이 갑자기 옆으로 확 다가왔다.
“춥네.”
“예?”
“미들러 입고 올걸.”
“그러지 그랬어요.”
“나 춥다고 하면 다들 옷 주던데.”
나는 떨떠름하게 영흠을 쳐다봤다. 제 돕바 내놓으라 그거잖아요, 지금. 나는 더 떨떠름하게 옷을 벗어서 대충 영흠에게 걸쳤다.
“됐죠?”
“히히.”
“덕분에 제가 춥네요.”
“도영 어깨 넓어서 티만 입고 있는 게 더 멋있어요.”
“…네?”
“그래서 일부러 벗기려고 반팔로 나왔는데.”
“…예?…”
“히히.”
영흠은 아주 뿌듯하다는 듯이 웃더니 깡총깡총 편의점을 향해 토끼처럼 뛰어갔다. 뭐야, 진짜. 끼 부리는 거 맞나? 에이...
**
영흠은 약간 빨개진 얼굴로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탁, 올려놓았다. 맥주 마시자더니 갑자기 보드카 크랜베리가 드시고 싶단다. 익숙하게 앱솔루트 한 병이랑 크랜베리 주스를 사오더니 판을 깔고 제조하기 시작했다. 영흠이 말아주는 술은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나는 조용히 우물우물 마셨다.
“도영, 토끼같아요.”
“뭐래.”
“뭐야, 지금 나한테 반말 한 거에요?”
“아니, 토끼, 갑자기 그런 말 하니까...”
“나도 반말할래 그럼.”
“예, 하세요.”
대충 알겠다고 대답하는 나를 영흠은 한참 쳐다봤다. 그러더니 아까처럼 또 야살야살 웃었다. 뭐야 진짜. 나는 눈을 피하려다가 문득 티셔츠 아래로 보이는 가슴팍도 약간 붉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기분이 이상해. 되게 판판하고. 매끈매끈해보였다. 나도 있는건데, 아 근데 좀 이상해.
“아까부터 왜 변태같이.”
“푸헉”
“가슴만 빠안히 봐?”
영흠이 그걸 놓칠리 없었다. 나는 변태라는 말에 놀라서 넘기던 술을 뿜었다. 정면에 앉아있던 영흠의 희고 맥아리 없는 셔츠에 자줏빛 술자국이 방울방울 튀었다. 살에도, 좀, 튀었다,
“일부러 그런 거야?”
영흠은 휴지로 대충 가슴께를 닦으며 말했다.
“만져보고 싶지, 너?”
나는 두 번째로 쏟을 뻔한 술을 억지로 삼켰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
“그렇다고 해봐.”
“어?”
“만지고 싶어요. 해보라고.”
나는 벙찐 얼굴로 영흠을 바라봤다. 근데 그 눈을 가만히 보고있자니 말이 나올 것 같고, 눈을 피하자니 자꾸 자줏빛 티셔츠와 가슴팍만 보이고, 뭐가 하나 야해보이기 시작하니까 모든 게 다 야하게 느껴졌다. 왜이래. 나도 다 가진건데 왜이래.
“도영 내가 신기한 거 알려줄까?”
“어? 예. 아니, 어.”
“오늘 너 나 되게 빤히 쳐다본다?”
“어? 아…”
“아까 처음봤을 때도 그러더니?”
“아니, 처음봤을 때는, 누워있는데 놀래서.”
“우리 그때 처음본 거 아닌데?”
“엉?”
영흠은 가만히 손바닥을 펴서 내 앞으로 가져왔다. 그러더니 내 손을 달라는 것 처럼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얌전히 오른손을 건냈다. 그리고
“앗, 차가!”
“히히.”
영흠이 다시 돌려준 손바닥 위에는 반짝이는 얼음 알갱이들이 우수수 쌓여있었다. 얼음이, 이 난방 빵빵한 콘도에서, 갑자기, 손바닥에 있었다. 나는 놀란 토끼눈으로 손바닥을 한참 보다 고개를 들어 영흠을 쳐다봤다. 영흠은 아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하얗고 긴, 털이 복슬한 꼬리를 입에 물고있었다.
어?
“꼬,”
“꼬리.”
“꼬리…꼬,”
“한국말 왜 못해 갑자기?”
“아니, 꼬리? 꼬리…어?”
“신기하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흠은 말할 때만 꼬리를 잠깐 입에서 떼었다가 다시 입으로 가져가서 앙, 물었다. 히히 웃는 얼굴 위로 뭉툭하게 세모난 귀가 하얗게 올라와있었다. 아니지, 머리 위로 올라와있었다.
영흠은 귀를 몇번 털다 접다 폈다 했다. 그러더니 다시 나를 빤히 봤다.
“왜 만지고 싶어요, 안 해?”
“아니, 내가 왜, 영ㅎ”
“만지고 싶잖아.”
그러니까. 내가 왜 만지고 싶냐고. 나도 있는데, 판판하고 매끄럽고 예쁘게, 씻을 때 마다 보는데. 말랑하고 폭신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갑자기
“내가 남자라서 그래?”
나는 말문이 막혀서 가만히 있었다.
“도영 생각보다 촌스럽다.”
“에?”
“포비아야?”
“아니, 그게 아니라.”
포비아가 아니라요. 저는 제가 헤테로라고 생각하고 이십삼년을 살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이게 무서운 게 아니라요, 지금 나도 내가 너무 낯설거든요.
“그럼 나 남자라고 생각하지 말아봐.”
“그게 어떻게 돼.”
“표범이다 생각해. 나 표범 맞으니까.”
“예?”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하면 만질 수 있어?”
“…예?”
“왜 갑자기 자꾸 존댓말해.”
“저, 아니, 그게 아니라요.”
“만지기 싫어서 그래?”
아니 그거는 진짜로 아니거든요. 벙찐 나를 영흠이 세모눈을 한 채로 쳐다봤다. 실망이야, 도영. 아까부터 나 끼 열심히 부렸는데. 영흠은 들으라는 식으로 중얼중얼 속삭였다.
“인간들 재미없어.”
“어? 예?”
“너처럼, 남자는 만지면 안 되잖아요, 그런 인간 재미없어.”
“아니, 안 되는 게 아니라.”
“안 되는 건 아닌데 너는 못하겠다. 근데 쳐다는 보고 싶고. 만져는 보고 싶은데 이상하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흠은 테이블을 대충 발로 밀더니 내 앞으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한번 망설임도 없이 내 손을 잡아서 자기 가슴께에 가져다대었다.
“이러면 도영이 한 거 아니니까 괜찮지?”
“저, 아니, 그러니까...”
“괜찮아. 처음이면 형이 한 번 봐줄게.”
그리고 영흠은 가만히 다가와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차가운 손으로 내 목을 감쌌다가 꼬리로 귀를 쓸어주고 있었다. 이상해, 이상한데, 너무 낯선데 아주 괜찮은 일처럼 느껴졌다. 뭐가 맞는 느낌이었다. 내 입술 위에서 영흠의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는 게 신기했다. 처음이라 형이 봐준다더니, 열린 문 밖으로 댐처럼 뭐가 쏟아져나왔다. 나는 숨을 잡지 못하고 헉헉대었다. 영흠은 다시 꼬리로 등을 토닥여줬다. 그래도 진정이 되지는 않았다.
“도영, 나 취소할래.”
“어?”
“너 재미있어.”
영흠은 눈을 반짝이며 말하다 내 코끝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에, 구여친이 질러댔던 온갖 쌍욕을 모두 이해했다. 어. 나는. 남자 좋아하는 거였네.
나만 몰랐네.
나는 영흠의 매끈한 가슴을 손으로 쓸어대며 생각했다. 걔는 얼마나 승질이 났을까. 무신사룩 입고 다니는 헤테로 알고리즘 게이 남친이랑 연애하느냐고.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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