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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히어로

마카롱

 

짜증나. 도영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폰에는 문자가 떠있었다.

 

 

 [일이 터져서 못갈 것 같아 미안해]

 

 

 전화라도 해.. 이 예의없는 것아 히어로면 좀 더 젠틀하게 해보라고. 도영은 속으로 재현을 심하게 씹었다 약속을 몇번 깼는지 세는 것보다 얼마나 지켰는지 세는게 더 편할 듯 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약속시간 전에 연락했네. 저번에는 자기일 다 끝내고 연락해서 몇시간을 기다렸는지 한동안은 속상해서 연락도 안받았었다. 그때는 또 꼬박꼬박 연락이 와서 더 짜증났단 말이지. 진짜 병주고 약주고였다.

 

 

 다행히 영화가 시작하기 까지는 10분정도가 남았다. 목적이 사라졌으니 바로 나가도 상관은 없었으나 괜한 자존심에 도영은 태연하게 점원이 있는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봐야지. 위로 향하는 도영의 뒤에서 수근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저기 김도영 아니야? 여긴 웬일이래?

 

 

 도영은 부자다. 국내에서 다섯손가락에 꼽히는 대기업 회장의 손자이니 그럴만도 했다. 어릴때 부터 이런 곳 저런 곳 끌려다니니 이름도 저절로 알려졌다. 그래도 알만한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김도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재현은 달랐다. 전통 히어로 가문의 대를 잇는 자랑스러운 S급, 사이코키네시스 능력자, 어딜가도 알 수 있는 사람이 재현이었다.

 

 

 도영과 재현의 집안은 예전부터 가깝게 지내왔다. 나이가 비슷한 두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등을 떠밀려 쭈뼛쭈뼛 인사를 했다. 한 두번 만나고 나니 어느정도 아는체를 하고 좀 더 만나다보니 둘이서만 있을 정도로 친해졌다. 그 뒤로는 사석에서도 자주 만났다. 그렇게 친구관계를 유지한지 15년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소꿉친구로 정의시켰다.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오래보고 친한 사람은 서로밖에 없어서.

 

 

 도영의 15년 중에 8년은 짝사랑기간 이었다. 짝사랑은 순식간에 알 수도 없게 찾아와서 어느순간에 알게했다. 도영은 짝사랑에 취약했다. 완전히 티를 낼 수 도, 완벽히 숨길 수도 없었다. 도영은 완벽한 사람이었지만 넘치는 감정에는 서툰면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재현은 그런 도영의 감정을 알고있는 티를 내지 않았다. 도영이 보기에 애매한 행동도 있었으나 재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했다. 차라리 도영은 재현이 그러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나만 아프면 되니까 만약 재현이 도영의 마음을 알면 그가 어떻게 행동 할지 전혀 예측을 할 수 없어서. 겁이나서 8년을 침묵했다.

 

 

 영화 내용이 뭐였는지는 그다지 기억하지 못한다. 영화에 집중을 못했기 때문에. 기분도 꿀꿀한데 지금 로맨스 봐서 뭐할런지. 영화관을 나와 핸드폰을 켜니 연락이 와있었다.

 

 

 [나 다 끝냈어 어디야?]

 

 

 뉴스를 보니 헤드라인을 장식한 기사가 보였다. '우리의 히어로 정재현, 이번에도 큰 활약' 우리의 히어로는 무슨, 내 시간은, 내 감정은? 걔는 평생에 내 히어로는 못 될거야. 속으로 욕을 해대면서도 도영은 재현에게 연락을 넣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참으로 한심했다.

 

 

 [영화관 앞. 밥 먹었어?]

 

 

 

그래서 이번엔 뭔 일이었어? 도영은 고기를 입으로 넣으며 물었다. 화재 때문에 건물에 사람들이 갇혀서 구하러 갔었어. 사람이 많지는 않아서 금방 끝냈고. 다행이네. 영화는 어땠어? 그다지 재미는 없었어. 기억도 안나고. 못나가서 미안해. 됐어 히어로가 사람 구해야지 약속에 왔으면 넌 나한테 머리털 뽑혔어. 응 고마워. 됐네요 술이나 마실란다.

 

 

 형, 괜찮아? 괜찮아 걸을 수 있어. 그러면서도 비틀거리는 도영에 재현은 도영의 팔을 잡았다. 그러다 넘어져. 도영은 고개를 들어 재현을 봤다. 왜 할말있어? 으응 딱히 그냥 나 혼자 갈래. 이 상태로 같이 가면 술기운에 모든 말들이 나올 것 같았다. 아직 계획하지 않았던 말이 툭 튀어나올까봐 겨우겨우 이성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재현이 그 마음을 알리가. 형 이 상태로 혼자가면 위험해. 요새 이 부근에 납치범들이 많이 나와서 별로 안좋아. 히어로들한테 소중한 사람들은 약점이 될 수 있다는거 알잖아. 소중한 사람? 참내. 도영은 기가찼다.

 

 

 "소중한 사람? 내가 너한테 어떤 소중한 사람인데?"

 

 "어?"

 

 "나는 너한테 어떤부류의 소중한 사람이냐고. 가족은 아니니까 뭐, 소꿉친구?"

 

 "…"

 

 

 괜한 심술이 났다. 술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와 이성을 잠식했다. 도영은 재현의 손에서 벗어났다. 재현은 도영을 빤히 보고만 있었다. 평소에는 할 말 다하는 애가 왜 망설여. 아무마음도 없으면서 왜 있는 것처럼 망설여. 그냥 친한 형이라고 하면 되잖아. 뭘 망설이는데 왜 내가 딴 맘 먹게 만들어. 도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씹었다.

 

 

 "짜증나. 그냥 형이니까, 많이 친한 형이니까 이러면 되는 거 아니야? 뭘 망설여. 왜 이상한 생각하게 만드냐고. 너 나한테 다른 마음 없잖아. 나 놀리는 거야, 지금? 왜 나를 기대하게 만들어?"

 

 

 말이 끝도없이 쏟아진다. 힘 빠져. 며칠간은 연락도 하지마. 진짜 짜증나니까 도영은 뒤로 돌아 걸어나왔다. 재현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저 뒤를 지켰다. 그게 더 짜증이 났다. 와 붙잡지도 않네. 나쁜 놈 이번에는 진짜 연락 안받을 거야.

 

 

 술을 마셔서 그런지 갈증이 탔다. 여름이 끝나가지만 더운 바람이 계속 불어와 식은 땀이 났다. 주변에 편의점이.. 도영은 불이 환하게 켜져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샀다. 집가서 씻고 먹어야겠다. 시간이 꽤 늦었는지 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괜히 소름이 돋았다. 뭔가 뒤에 있는듯한 오싹한 기분 뭐지 왜이리 어수선해

 

 

 '요새 이 부근에 납치범들 많이 나와서 안좋아'

 

 

 "아 그거 때문인가..?"

 

 

 아이스크림이 든 봉지를 앞뒤로 흔들었다. 어! 세게 흔들었더니 앞으로 휙 날아가버렸다. 아이코 내 소중한 아이스크림. 도영이 봉지를 들고 일어나자 무언가 도영을 끌었다.

 

 

 "뭐야 누구.. 읍!"

 

 

 도영의 입에 손수건을 갖다댄다. 축축한게 약품을 묻힌건지 이상한 냄새가 났다. 의식이 흐려졌다. 아, 오늘 진짜 짜증나는 날이네. 술기운에 반항도 못 한 도영은 몸이 기우뚱하는게 느껴졌지만 신경쓸 수 없었다. 눈이 감겼다. 나 이제 죽는건가.. 곧 누군가 도영의 몸을 받았다.

 

 

 ..기요, 저기요? 으응, 조금만 더.. 헉 눈이 번쩍 뜨였다. 눈이 다 떠진건 아니지만 자신의 눈에 보이는 건 하얀 천장과 한 남자였다. 여기.. 천국인가요? 네? 도영은 자신이 천국에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천사 뺨치게 잘생겨서. 그래도 복 받았네, 김도영. 잘생긴 천사도 보고. 남자는 도영이 중얼거리는 말에 갸우뚱했다가 곧 웃어보였다. 여기 천국 아니고 저희 집인데, 아직 정신은 안돌아오신건가요? 네? 저 죽은 거 아닌가요?

 

 

 남자는 자신을 이태용이라고 소개했다. 납치범이 도영을 끌고 가려는 것을 보고 납치범을 막으려고 기절시켰는데, 납치범은 데려가기 싫어서 납치범은 묶어놓고 경찰이 데려가도록 했고 도영은 자신이 데려왔다고 했다. 납치범을 기절시키다니 대단하시네요. 능력빨이죠 뭐. 초능력자이신가요? 아 네. 그럼 히어로이신건지? 아, 그 반대에요. 네? 저는 빌런이에요 아, 제 입으로 이런말 하려니까 좀 쑥쓰럽네요. 도영은 덮고 있던 이불을 들어올렸다. 어? 안심하셔도 돼요! 아무짓도 안할건데.. 정말요? 네! 각서 쓸 수 있어요 아니 각서까지는;; 그럼 믿어주실거에요? 네 뭐

 

 

 도영은 이불에서 나와 기지개를 폈다. 혹시 제 짐 보셨어요? 짐이라고 해봤자 핸드폰이랑 아이스크림이 끝이었지만 도영은 열심히 제 짐을 찾았다. 아 핸드폰은 주변에 떨어져있어서 금방 찾았는데 다른 짐이 있으신가요? 주변에 아이스크림이 든 봉지를 보셨어요? 죄송해요 그건 못 봤는데.. 괜찮아요 뭐 구해주신 것만으로 엄청 감사하니까. 도영이 나갈 채비를 하자 태용은 급하게 도영을 붙잡았다.

 

 

 

  "저기.."

 

  "네?"

 

  "아.. 그 실례가 될 진 모르겠지만 그 날 술을 드신 것 같아서 깨어나면 속 아프실까봐 콩나물국 준비했는데, 드시고 가실래요?"

 

  "..푸흡"

 

 

 

 도영은 바람빠지듯 힘 없이 웃었다, 이 사람 진짜 빌런 맞아? 되게 웃기네.

 

 

 "네 좋아요 저야 감사하죠"

 

 

 도영은 몸을 돌렸다. 태용은 기쁘다는 듯 웃었다.

 

 

 태용의 집에 있던 시간 동안 도영은 태용에 대해 몇 가지 깨달았다. 그는 부자라는 것 (부모님의 재산을 통째로 받았다고 한다), 혼자 산다는 것 (부모님은 안계시고 할머니와 살다가 할머니까지 돌아가신 후 쭉 혼자였다고 한다), 그가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태어날 때 부터 있던 것이라고 하며 그 능력은 Invitation:공중부양 과 Strength:힘 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도영을 오래전부터 알았다는 것

 

 

 "저를요?"

 

 "네"

 

 "어떻게??"

 

 

 

 도영씨 회사 D기업이죠? 네. 그곳에 있는 유난히 큰 나무 있잖아요. 아, 저희 회사에서 가장 큰 나무 말이죠? 도영의 회사에는 유난히 큰 나무가 하나 있었다. 도영이 앉은 자리에서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터라 도영도 잘 알고 있었다. 근데 그 나무가 왜요? 저 그 나무에 자주 올라가거든요. 어떻게요? 저는 날 수 있잖아요. 아하. 그 나무가 커서 누워있기도 편하고, 잎이 많아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도 않아서 제 아지트 삼았었거든요. 그 나무에 앉으면 일하는 도영씨가 잘 보였어요. 그래서 저를 관찰했어요? 에이, 그럼 실례잖아요. 어쩔 수 없이 보일 때만 봤죠. 그 때는 그 나무만 좋았던 터라 나무에만 신경을 썼거든요. 근데 지금은. 지금은? 도영씨가 궁금해졌어요. 당당한 그의 말에 도영은 웃어보였다. 저도요, 태용씨가 궁금해졌어요.

 

 

 꽤 오랫동안 태용의 집에 있었다. 어차피 자취해서 걱정할 사람도 없었고, 태용이 며칠동안 푹 쉬라고 한 것도 있고 (도영은 자신이 양심이 없는 것 같아 나가려했지만 자신을 붙잡는 듯한 눈을 한 태용을 뿌리칠 수 없어 받아들였다) 태용을 더 지켜보고 싶었다. 빌런이라기에는 따뜻하고 친절한 이 남자가 궁금해서, 태용 또한 도영이 궁금하다고 하니 쌤쌤이었다.

 

 

 태용씨 네?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요? 왜 빌런이 됐어요? 음.. 힘들면 말 안해도 괜찮아요. 아니요 말 하기에는 조금 길어질 수도 있어서요. 일단 빨래 좀 돌려놓고 올게요. 무거워보이는 빨래바구니를 들고 아무렇지 않게 베란다로 나가는 태용을 도영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으며 봐라봤다. 태용은 자신이 원하는 건 뭐든 해줬다. 왜 그렇게 잘해주냐고 물어보면 제가 도영씨 붙잡았잖아요 했다. 정말 친절했다. 그래서 더 호감이 갔다. 도영은 태용의 마음에 천천히, 깊숙히 들어왔다.

 

 

 태용은 베란다에서 나와 도영의 앞에 앉았다. 제가 활동하는 곳은 히어로 연구소에요. 그 곳 말고는 움직이지 않아서 저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있지 않아요. 하긴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 곳에서만 활동하는 이유가 있어요? 간단하게 말하면 부모님의 흔적을 찾고 싶어서요. 저희 부모님이 예전에 히어로 연구소에서 일하셨는데, 모종의 이유로 그 곳에서 돌아가셨대요. 저는 그 때 어려서 할머니댁에 있었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10살 정도였어요.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나서 부모님의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갔지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빌런이 된거에요. 들어가서 찾아보고, 건지는 게 없으면 연구일지나 흐트리고 오고 그러는 거죠. 소심한 복수? 태용은 살짝 웃었다. 도영은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흘렀다. 왜 울지 이 착한사람이 그런일을 당해왔다는게, 빌런이 된 이유가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났나. 어쨌든 도영은 울었다. 태용을 위해서.

 

 

 "도영씨?"

 

 "…"

 

 "도영씨 울어요?"

 

 "..미안해요 당사자는 태연한데 남이 울고있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도영씨 감정이니까, 나 대신에 울어줘서 고마워요"

 

 

 태용은 도영의 옆으로가 그를 살포시 안았다. 나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꽤 행복한 일이네요. 그래도 너무 심하게는 울지말아요. 마음 아프다. 태용씨 네? 나 태용씨가 좋아졌나봐요. 당신을 위해서면 우는 것도 웃는 것도 내 의지라서, 당신은 항상 내 옆에 있어줄 것 같아서, 나의 히어로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태용씨가 좋아졌어요. 저 이상하죠? 태용은 도영의 말을 들으면서 도영의 등을 토닥였다. 아니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도영씨가 좋아졌어요. 짧은 시간에 사랑에 빠졌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도영씨, 저희 사랑이란거 해볼래요? 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용의 집에 있는 동안에는 핸드폰을 그다지 보지 않았다. 태용과 있으면 시간이 금방가서 핸드폰을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쉬고 싶기도 하고, 주변사람들한테는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이 오기전에 회사에 미리 얘기를 해 월차를 냈고, 부모님께도 짧게 연락을 드렸다. 더 할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 폰을 보니 재현에게서 온 연락이 보였다.

 

 

 [형 뭐해, 집에 잘 들어갔어?]

 

 [집에 없는 것 같은데, 어디야?]

 

 [회사에도 없으면 어떡해 걱정되잖아 보면 연락 아무거나 한 번이라도 넣어줘]

 

 

 쭉 이어진 문자를 보니 웃음이 났다. 나쁜 놈 평소같으면 연락도 안하면서 찔리긴 했냐? 도영은 물론 연락하지 않았다. 폰을 꺼버리고 태용과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었다. 꽤나 큰 침대에서 하루종일 누워있었고, 배고프면 맛있는 것도 해 먹고, 여름의 끝자락을 버티기 위해 에어컨 아래서 낮잠도 잤다. 하루하루가 소소하지만 행복했다. 웃는 도영의 옆에는 웃는 태용이 있었다. 하지만 이따끔 재현이 생각났다. 마음 한 자락에 걸려서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아, 신경쓰여. 도영은 재현을 만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태용씨 네? 나 내일 나갔다 와야겠어요. 어디가게요? 짝사랑 만나러요. 도영의 옆에서 잘 준비를 하던 태용은 급하게 몸을 일으켜 도영을 쳐다봤다. 짝사랑이요..? 왜요..? 고백하러? 태용의 당황한 목소리에 도영은 자신도 몸을 일으켜 태용과 눈을 맞췄다. 아니요. 태용씨 있는데 무슨 고백이에요. 8년간 짝사랑해오던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한테 가서 말하려고요. 이제 안좋아한다고. 8년이면 오래 좋아했네요? 오래 좋아한 만큼 오래 아팠어요. 놓자 하면서도 못 놓았었는데 이제는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무 무리하진 마요. 무리까지야. 그치만 도영씨 마음씨 여려서.. 아플거니까.. 도영은 태용을 안았다. 고마워요, 걱정해줘서 나 아프면 태용씨가 나 구해줄거죠? 나만의 히어로니까. 당연하죠. 나는 도영씨만의 히어로에요. 그날 밤 재현의 폰이 울렸다.

 

 

 [내일 만나자. 내가 일하는 곳으로 와]

 

 

 도영은 한 숨을 쉬었다. 어제 태용 앞에서는 잘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심장이 아플정도로 쿵쾅거렸다. 막상 아무말도 못 하면... 아니야 저 멀리서 뛰어오는 재현이 보였다. 도영은 숨을 길게 쉬었다.

 

 

 "왔어?"

 

 "..응"

 

 "본론만 말할게. 나 너 좋아했어. 8년동안. 어느순간에 반했는지도 모르고 왜 좋아했는지도 몰라. 그래도 진심으로 좋아했어."

 

 "..응"

 

 "넌 나를 어떻게 생각했어? 나는 네 생각에 잠도 못 잔적도 있고, 네가 하는 행동에 설레서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던 적도 있고, 네가 약속을 어길때나 다른 사람과 붙어있을 때 가슴이 아팠던 적도 있어. 너는 나한테 많이 소중한 사람이었어."

 

 "왜 좋아한다고 말 안했어? 형이 조금이라도 말해줬으면 나는.."

 

 "왜 말 안했냐고? 네가 나한테 마음이 없어보여서. 아무렇지 않아보여서. 내 행동 하나하나가 다 너를 향해도 너는 무덤덤했으니까"

 

 "…미안해. 형이 그런 행동을 하는게 익숙해서 아무것도 몰랐어."

 

 "익숙한 관계이기에 나는 더 상처받았던 거야. 이제 알았으면 됐어.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그 날 왜 망설였어?"

 

 

 

 제발 내가 생각한 답이 아니기를, 전혀 다른 답이기를 도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혼자만의 불안정했던 관계를 부수고 옛날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내가 너한테 흔들리지 않기를.

 

 

 "형이 말했던 것 처럼 망설였었어. 진짜 그 말을 해도 되는지, 내가 형을.."

 

 "그만."

 

 

 

 도영이 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근데 이미 늦었어. 무슨 소리야? 나 이제 너를 좋아하지 않거든. 8년이나 좋아했다며. 그렇게 빨리 포기할 수 있어? 사실 나도 좀 웃겼어. 이렇게 빨리 포기가 될 줄은 몰랐거든. 근데 다른 사람한테 사랑을 받아보니까 알겠더라. 내가 얼마나 피곤한 삶을 살았는지. 다른 사람? 응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났어. 너처럼 망설이지도, 애매하게 굴지도 않는 나만을 좋아해주는 사람. 이제 그 사람이랑 사랑해보려고. 그러니까 너는 너의 인생을 살아.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짝사랑 하지마. 재현에게 흔들리기 전에 미리 선을 그었다. 도영은 뒤로 돌았다. 빠르게 걸어가는 그를 재현이 붙잡았다.

 

 

 "내가 만약에 그때 망설이지 않았으면.. 우리는 사랑할 수 있었어?"

 

 

 

도영은 자신을 붙잡은 팔을 잡아 내려놓았다.

 

 

 

"모르지. 그래도 알 수 있는 건 지금 같은 상황은 안 올 수 있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와서 후회하지마."

 

 

 

 도영은 다시 걸었다. 재현은 그 날과 같이 도영의 뒤에 서있었다. 도영은 뒤를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울면 안돼. 김도영, 너의 히어로가 있는 곳으로 가자. 너를 달래줄 사람이 있는 곳에서 울자. 태용이 보였다. 태용이 도영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자 도영은 태용에게 달려가 안겼다. 태용은 도영의 등을 쓸었다.

 

 

 "수고했어요. 도영씨"

 

 "..태용씨.."

 

 "응 나 여기있어요. 울어도 돼요."

 

 

 태용은 도영을 토닥이며 생각했다. 당신을 안고 내 아지트에 날아가야겠다고. 그곳에서 당신을 웃게 하겠다고. 펑펑 울고 나서 다 흘려보내요. 그 다음에 내가 당신을 웃게 해줄게요. 나는 당신의 히어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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