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중등교원임용고사: 사랑에 대해 논하시오
익명
도영은 떨리는 마음으로 교무실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 오늘 새로 부임하게 된 김도영이라고 하는데요.”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 쪽으로 오세요.”
도영은 경쟁률이 그렇게 높다던 좆같은 임용고시를 한 번의 재수 끝에 합격했다. 그래, 진짜 개고생했지.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희생했던가! 그리하여 도영은 시티고등학교에 음악선생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선생님께 간단하게 학교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에 도영은 교무실 자리를 배정받았다. 여기가 내 교직생활을 시작하게 될 자리구나.
“김선생님도 초임이시죠? 옆자리에 정선생님도 초임이세요. 오시면 같이 인사 나누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도영은 가져온 짐을 정리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 자리에는 짐만 있고 사람은 없었다. 가지런히 꽂힌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 고등학교 영어 자습서, 고등학교 영어…인 것을 보니 영어 선생님인 듯 했다. 교과가 달라서 학교 안에서 크게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같은 초임이니 나이도 비슷할테고. 옆에 선배가 앉는 것 보다는 이 쪽이 서로 편하겠지. 단순히 업무적인 쪽만 생각하던 도영은 옆 자리의 주인공을 마주하게 된 후 생각했다.
미친. 로또 사야겠다.
일터에서 완식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미친미친핵존잘. 도영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옆에서 어색하게 안녕하세요, 하고 말하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악! 왜 이렇게 어색하게 말이 나가는 거야! 이런 존잘남은 김도영 2n년 연애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속에서 싸우고 있는 비즈니스 자아와 연애세포 자아를 애써 무시했다.
“영어교과 정윤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저는 음악교과 김도영이에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도영쌤도 초임이시라고 들었어요. 저도 초임인데 같이 잘 지내봐요.”
미친. 김선생님도 아니도 도영쌤이래. 이름도 어쩜 정윤오냐. 얼굴이랑 이름이랑 개잘어울린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도영은 간신히 정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눈 앞에 나타난 제 완식에 어찌할 줄 모르는 도영과 달리, 정쌤은 사교성이 좋은 편인지 많은 말을 걸어왔다. 개학을 할 때 쯤이 되니 정쌤이 자기보다 한 살 어리고 티오가 좁쌀만해졌다는 그 영어교과 임용을 초시에 합격했다는 것(이 부분에서 도영은 정쌤이 솔직히 좀 재수없다고 생각했다.), 영어교육과가 아니라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해 교직이수를 했다는 것, 그리고 도영이 나온 대학과 근처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대화는 물꼬가 트였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대학을 나왔다는 걸 알게 되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공통점인 대학생활을 위주로 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그 지역에 대학생들이 자주 갔던 술집 JCC포차의 안주가 아주 맛있었다거나, 또 그 집 사장님이 알고보니 시카고 출신이더라는 것(그래서 사장님이 그렇게 키가 크셨구나 하는 의미없는 맞장구가 더해졌다)과 같은 시답지않은 이야기였다. 이미 졸업한 대학에 대한 별 거 아닌 추억팔이 정도였고 김도영은 집행부와 학생회 활동 때문에 피곤했던 대학생활에 대해 별로 회상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정쌤과 친해질 기회를 만들어준 자신의 대학에 감사했다. 도영은 B대학을 입학포기하고 C대학을 간 과거의 자신을 속으로 칭찬했다. 아주 잘했어. 미래를 예견한 좋은 선택이었어.
개학을 한 후 도영은 주로 5층에 위치한 음악실에서 수업을 했고, 정쌤은 1학년 영어교과 담당을 맡게 되어 1학년 교실이 있는 2~3층에서 수업을 했다. 2층에 있는 교무실을 쉬는시간마다 오가는 것은 체력거지인 도영에겐 힘든 일이었으므로 점심시간 전에는 거의 항상 음악실에서 살았다. 그러다보니 교무실 바로 옆자리임에도 정쌤과 도영이 만나는 것은 점심시간과 아이들의 수업이 끝난 오후가 거의 다였다. (그렇다고 완식남을 위해 쉬는시간 10분을 쪼개 쓸데없이 교무실을 왔다갔다 하고 싶지는 않았다….) 급식실과 교사식당은 옆 건물에 있었는데, 그 건물로 가는 통로가 4층에 있다는 핑계로 정쌤은 계속 5층의 음악실로 저를 데리러 왔다. 왜 4층에 있는 통로를 가기 위해 5층에 오는지, 그 핑계가 말도 안된다는 것을 알았으나 도영은 그 핑계가 정말이지 너무 귀여웠다. 특히 말이 안되는 억지스러운 핑계라는 점이 가장 사랑스러웠다. 도영은 일부러 점심시간 종이 친 후에도 음악실을 느릿느릿 정리했다. 그러고 있으면 어느새 다가온 정쌤이 정리 도와드릴까요?라며 살갑게 다가왔다. 같이 점심을 먹을 때에도 그냥 수업이나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할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이 좋았다.
“도영쌤, 오늘 회식 가시죠?”
“네, 가야죠. 정쌤도요?”
“네. 퇴근하고 다같이 가자고 하시던데요. 오늘 애들 동아리 하는 날이라 야자도 없다고.”
회식은 뭔 회식이야. 도영은 대한민국의 좆같은 단체 문화에 이미 대학생활에서 모든 정이 털린 상태였다. 퇴근했으면 각자 자유시간 좀 가지면 안되나? 물론 정쌤을 오래 보는 건 좋지만.
“도영쌤은 차 가지고 오셨어요?”
“아뇨, 저는 아직 차가 없어서. 정쌤은요?”
“그럼 제 차 타고 같이 가시면 되겠네요. 잘됐다.”
어쩌면 회식도…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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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은 몇 시간 전과 180도 바뀐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식 죽어라. 거지같은 사회생활과 회식에서 그나마 도영이 기대했던 것은 옆자리나 맞은 편 자리에 앉을 정쌤의 얼굴 뿐이었다. 교무실에서 나와 같이 차를 탈 때만 해도 희망이 있었다. 정쌤의 차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고 무엇보다도 정쌤의 얼굴처럼 깔끔했다. 관리를 잘 한 게 보이는 차 안에서 도영은 새삼 정쌤의 깔끔한 성격에 다시 한 번 반했다. 역시 내 완식이야. 정쌤과 나눈 대화도 나쁘지 않았다. 정쌤은 첫 회식이라 걱정된다는 둥 귀여운 고민을 털어놓았고 도영은 그 깜찍한 고민에 공감하는 척 했다. (도영은 걱정보다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도영은 둘이 같이 가면 테이블을 떨어뜨려 놓지는 않겠지? 따위의 고민을 하였으나 티는 내지 않았다. 그러나 도영의 희망은 회식 장소에 들어가는 순간 산산조각 났다. 쓸데없이 꼰대인 교장선생님의 의견에 따라 신입 환영회인만큼 신입들은 한 테이블당 한 명씩 찢어놓기로 했다는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교장선생님은 내 인생에 도움이 된 적이 없지…. 그 때부터 도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정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보이는 거라곤 선배 교사들이 주는 대로 술을 받아먹고 있는 정쌤의 단단한 등판 뿐이었다. 하… 회식 개싫다….
“도영씨 잔이 비었네~ 한 잔 더 해요.”
이럴 게 뻔해서 오기 싫었던 건데. 어색한 웃음을 지은 김도영은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술을 받아 마셨다. 내 잔이 비든 말든 너랑 뭔 상관이냐…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받아 먹다보니 뭔가 취기가 조금 오르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내 눈앞에 정윤오도 없어서 기분도 안 좋은데 그냥 술이나 마셔야지. 언젠가부터 자작까지 하기 시작한 도영이 정신을 차린 것은 차 안에서였다.
“도영쌤. 정신이 들어요?”
“어. 정쌤이다.”
“맞아요 저 정쌤이에요. 다행이다. 쌤 주소 알려주세요. 지금 택시예요.”
“주소요…? 왜요…?”
“집 들어가셔야죠. 벌써 시간 꽤 늦었어요.”
“아… 싫은데.”
그 말을 끝으로 도영은 다시 정신을 잃었다. 아, 목말라.
“형, 나 물 좀.”
형 벌써 출근했나?
“혀엉. 나 물 좀 달라니까.”
아니 형은 왜 대답이 없어.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눈을 뜨자마자 도영은 욕을 했다. 이런 미친. 눈 앞에 보이는 건 너무나도 낯선 공간이었다. 하얀 벽지와 어두운 색상의 가구로 심플하게 장식된… 뭔 놈의 침대는 또 이렇게 넓고 그렇냐… 여기가 어디냐…. 여전히 목이 말랐으므로 도영은 침실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다행히 나가자마자 쉽게 정수기를 찾을 수 있었다. 아, 이제야 좀 살겠네. 정신을 완전히 차린 도영은 남은 물을 마시며 천천히 어제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우선 회식에서 술을 엄청나게 많이 마셨고… 그 다음에는… 뭐 했지? 곰곰이 생각하다 택시에 같이 탔던 정쌤의 모습까지 기억한 도영은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럼 나 지금… 설마… 정쌤 집에 있는 거…?
“깼어요?”
“헉.”
“속은 좀 괜찮아요?”
김도영… 드디어 미쳤구나. 술을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회식 자리에서 취해서 완식남 등에 업혀서 와? 취해서 작업을 건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상태로 쓰러져서 이런 민폐를….
“정쌤… 저 어제 어떻게 된 거예요?”
“기억 안 나세요?”
“네…. 혹시 저 어제 정쌤한테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아니에요. 실수는요. 어제 몸을 못 가누시길래 제가 집 데려다 드리겠다고 같이 택시 탔거든요. 그런데 주소를 안 알려주셔서 그냥 제 집으로 모셔왔어요. 괜찮으시죠?”
괜찮다마다요… 진짜 죄송합니다…. 도영은 대역죄인이 된 마냥 정쌤에게 사과를 했고 정쌤은 웃으며 전혀 민폐가 아니었으니 씻고 같이 출근이나 하자고 했다. 정쌤은 심지어 씻고 나온 저를 위해 북어해장국도 끓여주는 엄청난 정성을 보였다.
“선생님 이걸 도대체 언제 준비하셨어요? 너무 죄송해요….”
“그냥 대충 끓인 거예요. 빨리 먹고 출근해요.”
아무래도 완식존잘남은 얼굴만 잘생긴 거로도 모자라서 다정함으로도 저를 죽이려는 모양이었다. 알게 된 지 겨우 한 달만에 사고로나마(?) 집을 튼 사실에 대해 도영은 최대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행히 큰 주정은 안 부렸던 것 같고 헛소리도 안 한 듯 싶었다. 그 정도면 됐지 뭐! 그래! 죄송하다는 핑계로 밖에서 밥이나 한 끼 먹자고 해야겠다!
“도영쌤. 근데 정말 어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세요?”
“네…. 역시 제가 뭔가 술주정을 부렸던 거죠?”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어제 저 이제 이름 불러주기로 하신 것도 까먹으셨나 해서.”
“네?”
“아니 그렇잖아요. 나는 도영쌤이라고 하는데 쌤은 저보고 정쌤이라고 하시니까. 그래서 어제 쌤한테 좀 서운하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알겠다고 저보고 윤오쌤~ 하셨잖아요. 기억 안나세요?”
“헐… 네.”
“쌤 어제 엄청 귀여웠는데 좀 아쉽네요. 기억을 못하신다니.”
“그… 정쌤.”
“기억 못하시니까 그냥 정쌤이라고 부르실 거예요?”
뭐지? 방금 뭐야?? 정윤오 지금 좀 삐진 거야???? 도영은 완식의 귀여움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 진짜 개귀여워. 연하남 미쳤냐고 너무 좋아. 어떡해. 게다가 그 초깜찍 연하남이 나보고 귀엽다잖아.
“윤오쌤.”
“봐요. 그렇게 부르니까 얼마나 좋아요.”
김도영은 달아오르는 윤오의 귀를 목격하고 말았다. 심장이 간질간질하게 뛰었다. 세상 사람들!!!! 제 썸남이 이렇게 귀엽습니다!!! 하고 소문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이건 비단 김도영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날의 ‘윤오쌤~’이 무슨 신호라도 되었던 건지,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썸을 타기 시작했다. 짧은 점심시간이지만 윤오의 차를 타고 나가 둘이 외식을 하기도 했고, 퇴근 이후에도 연락을 주고 받고 주말이 되면 윤오의 집에 가 같이 영화를 봤다. 갈 때마다 새로운 음식을 해주는 윤오가 너무 좋아 도영은 온 세상에 제 썸남을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방 집까지 가는 썸타는 사이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냐 이거지.”
“그러니까 네 말을 정리하자면 학교에서 같은 초임교사에 교무실 옆자리로 만났고, 어쩌다가 썸을 타고 너는 주말마다 그 썸남의 집을 들락날락하는 사이가 됐고. 그게 벌써 두 달이나 됐는데 고백을 안한다?”
“그래!!!! 벌써 윤오쌤 집에 8번이나 갔다고. 근데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다니까????”
심지어 손도 안 잡았다고. 이 말까지 하면 왠지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서 도영은 입을 다물었다.
“설마 손도 안 잡았냐?”
“…형. 설마 그 정도겠냐?”
“그치? 그럼 뽀뽀를 안 한다는 거?”
“그래. 그렇다고 고백을 하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해서 미안해 태용이 형. 사실 손도 못 잡아 봤어….
“그럼 그냥 니가 하면 되잖아. 완전 니 스타일이라며.”
“그렇게 하기엔 또… 주말마다 만나는데도 나 안 건드리는 거 보면 알고보니 나만 착각한 거일 수도 있잖아.”
“그럼 완전 어장관리하는 개새끼고.”
“아니야! 그런 것 같진 않았단 말이야.”
그럼 어쩌라는 거야,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하는 태용을 보며 도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지난 주에는 혹시 보고 싶은 영화 있으세요?라며 먼저 의사를 묻기에 일부러 이번엔 꼭! 진도를 나가겠다는 일념으로 농도 짙은 로맨스 영화를 골랐다. 솔직히 어깨가 맞닿는 거리에 썸남이 있고 눈 앞에선 키스신이 나오는데 당연히 뭐라도 하고 싶겠지. 안 그래?
안타깝게도 윤오는 전혀 안 그런 모양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로맨스 영화를 보더니 심지어 결말이 슬프다며 눈가까지 촉촉하게 붉혔다. 아니 지금 나랑 영화 소모임을 하고 싶은 건가? 영화 동아리 담당 하고 싶었나??? 김도영은 거의 노래에 빙의한 상태였다. 궁금해서 잠이 안 와. 그 때 왜 그랬어??? 구차해도 묻고 싶어. 그 때 난 뭐였어???? 그래 도대체 난 뭐였어 이 자식아. 엉엉 나쁜 놈아.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자신이 어장 속 물고기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나마 그 불안을 떨치고 싶어서 태용이 형을 만나서 얘기한 건데….
어장관리하는 개새끼…. 태용은 그런 어록을 남기고 떠났다.
하. 심란한 마음을 안고 김도영은 진지하게 정윤오에 대해 고민해봤다. 과연 정윤오가 정말 태용이 형 말대로 ‘어장관리하는 개새끼’일까? 솔직히 태용이 형에게 들려준 설명만 들으면… 그렇게 생각해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내가 본 정윤오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겨우 윤오쌤 한 마디를 들은 후로 언제나 저와 대화를 할 땐 빨간 귀를 가지고 있던 윤오의 모습이 생생했다. 진심을 귀로 말하는 구나 싶어서 귀여웠는데. 엉엉 나쁜 자식아….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내일 윤오의 집에 어떻게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윤오는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윤오를 만나면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둘 사이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학생 시절의 도영에게 썸의 한계는 3주가 끝이었다. 그 이상으로 길어지면 더 만나도 썸 같지 않고, 또 그 때까지 서로 용기를 내지 못하는 관계는 어차피 답이 없는 관계라는 생각에서였다. 도영은 이 생각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었으나 윤오와의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의 생각이 틀리길 바랐다.
그래. 일단 저질러보자. 니가 안 하면 나라도 한다 이거야. 도영은 내일 윤오에게 고백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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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게까지 다짐을 하고 윤오의 집 앞까지 오기는 했는데…. 도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 할 수 있을까? 고백까지야 그냥 저지른다 쳐도 혹시라도 차이면 앞으로 학교 가서 얼굴을 어떻게 봐. 그나마 5년마다 새로 발령을 받는다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여전히 4년 9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이래서 다들 사내커플 하지 말라는 건가.
“어? 도영쌤, 왜 벨을 안 누르고 계셨어요?”
갑작스레 문을 열고 나온 윤오의 모습에 놀란 도영은 방금 와서 그랬다며 허둥지둥 둘러댔다. 윤오는 잠시 쓰레기를 버리려고 나왔다며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권했다. 망설이는 도영을 집 안에 집어넣은 것은 윤오였다. 도영은 에휴… 하며 한숨을 푹 쉬곤 익숙하게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금세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온 윤오가 캔맥주를 꺼내왔다. 익숙하게 그 맥주를 건네 받고 옆에 앉는 윤오의 온도를 느낀 도영은 울고 싶어졌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바싹 붙어 앉기는 하면서 왜 손은 안 잡냐고…. 나는 어쩌다가 이 얼굴에 치여서…. 그러다가도 웃고 있는 윤오의 얼굴을 보면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정윤오 얼굴 충성충성^^7 상태가 되긴 했다. 아 모르겠다 그냥 정윤오 얼굴 너무 좋아. 오늘은 꼭 고백하고 내 남자로 만들고 말겠어.
영화는 시작되었지만 도영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영화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영화 재미없어요?”
얼굴을 붙이며 말해오는 윤오의 모습에 놀란 도영이 아, 아뇨, 하고 말을 더듬자 윤오는 웃으면서 도영의 손을 잡았다. 저기요. 갑자기요?? 왜 애태우다가 두 달만에 손을 잡는 거야????
“이러면 손에만 신경 쓰려나?”
윤오가 손을 놓으려 하자 도영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손으로 윤오의 손을 덥썩 잡았다. 내 손아…? 미친거 아니니…? 왜 나대고 난리야…. 윤오가 웃는 모습을 보니 더 쪽팔려졌다.
“알았어요, 손 안 놓을테니까 걱정 마요.”
아… 혀 깨물고 죽고 싶다. 근데 또 손에 닿는 온기가 좋아서 죽기 싫다. 진작에 좀 이러지! 이런 불평과는 달리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 아… 나 어떡해 진짜 정윤오 너무 좋아…. 그치만 갑자기 왜? 또 헷갈리게 만든다 정윤오…. 소파 위에 다리를 모으고 웅크려 앉아있던 도영이 얼굴을 무릎에 묻자 윤오는 영화를 일시정지 시켰다.
“오늘 유독 집중 못하네. 무슨 일 있었어요?”
“내 손…. 왜 잡았어요?”
아무런 생각 없이 묻고 싶었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한 번 튀어나오기 시작한 말은 미친듯이 쏟아져 나왔다.
“잡고 싶어서요.”
“그럼 지난 두 달간은 안 잡고 싶었어요? 나는 나 혼자 윤오쌤 집에 온다고 들떠서 맨날 기대하고… 근데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고. 난 혼자 이상하다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분명히 나랑 있을 땐 나랑 같은 마음인 것 같았는데 왜 둘만 있을 때 아무런 진전이 없는지. 나만 윤오쌤 좋아했어요?”
“도영쌤.”
“억울해서 그래요. 난 진짜 두 달 동안 기다렸단 말이에요. 근데 자기는 그냥 한참 기다리게 하다가 좀 생각 정리하려고 하니까 갑자기 손 잡고… 내 생각 다 흔들어 놓고…. 맨날 웃는 얼굴로 대하면서 나를 들었다 놨다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안 울어요.”
그 말을 끝으로 도영은 엉엉 울기 시작했다. 몰라 생각해보니까 서러워 죽겠어. 정윤오 이 이기적인 놈아! 너 좋을 때만 흔들고 사귀자고도 안하고. 난 뭐였어 도대체! 엉엉. 다행히 이 말들은 속으로만 삼킨 도영이었다.
“도영쌤.”
등에 닿는 윤오의 손이 느껴졌고 머리 위에서 익숙한 낮은 음성이 들렸지만 고개를 들기 싫었다. 울어서 얼굴이 망가진 것도 있었지만 그냥 지금은 미워 죽겠다고. 물론 오늘도 손을 안 잡았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슬펐겠지만….
“도영씨. 내 말도 좀 들어주면 안돼요?”
“싫어요.”
“에이, 그러지 말고. 도영아.”
“내가 형이거든?”
울다 말고 시뻘건 눈으로 째려보며 말하는 도영이 귀여워 윤오는 조금 웃었다.
“알았어요, 도영이 형. 이제 내 말 조금만 들어줘요. 네?”
아무 말이 없어진 도영의 모습을 긍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는지 윤오는 입을 열었다.
“맞아요. 내가 도영씨 헷갈리게 했어요. 근데 나도 헷갈려서 그랬어요.”
“….”
“도영씨 말이 다 맞아요. 나도 도영씨랑 같은 마음이에요. 나는 그 마음을 어느정도 확신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어요. 도영씨가 너무 좋았는데 도영씨도 나만큼 감정의 크기가 큰지, 또 정말 나를 좋아하긴 하는지, 그냥 같은 동료로 느끼는 호감 정도가 아닌지 고민 많이 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대로 밀어붙였는데 도영씨는 나한테 마음이 없었으면, 그건 도영씨한테 민폐가 되는 거니까요.”
“…그러면서 맨날 일부러 먼 음악실까지 날 찾아왔어요?”
“그 정도는 그냥 동료로서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매번 주말마다 집으로 날 초대한 거는요? 그것도 다른 동료교사한테도 할 수 있어요?”
“그럴리가요. 도영씨가 나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연애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 싶어서 그랬던 거예요. 이렇게 계속 하다보면 도영씨도 나한테 더 마음을 열고 나를 더 좋아하게 될 까봐.”
“그럼 나를 왜 그냥 내버려뒀어요. 우린 그동안 진짜 영화만 봤잖아.”
“미안해요. 도영씨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서… 용기를 내기가 힘들었어요.”
그랬구나. 눈물을 뚝뚝 떨구며 도영은 그 동안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생각해보면 도영도 언제나 윤오가 다가오기를 바랐을 뿐 큰 티는 내지 않았다. 그래도 윤오는 집에도 자기를 계속 초대하고 호감을 꾸준히 보였는데, 생각해보면 도영은 속으로만 그 난리를 쳤지 윤오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미안해요….”
“도영씨가 나한테 왜 미안해요.”
“그냥 다요…. 내가 너무 용기를 못내서….”
윤오는 울고 있는 도영의 허리를 껴안았다.
“도영씨. 나 봐요.”
“싫어요…. 지금 너무 얼굴 엉망이에요.”
“그런 게 어딨어요. 빨리. 도영이 형.”
아, 진짜. 그 와중에 내가 도영이형 소리에 약한 건 또 눈치 채서. 결국 못이기는 척 고개를 슬쩍 들자 윤오의 입술이 다가왔다. 쪽. 가볍게 붙었다 떨어진 입술에 도영이 멍한 표정을 짓자 윤오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해요, 김도영씨. 좋아해, 도영이 형.”
“…그럼 뽀뽀 한 번만 더해줘요.”
“좋아요.”
그렇게 김도영의 사내연애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