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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디오니소스님

​에테르

 

퍼시잭슨과 번개도둑 AU 

 

술잔이 하늘을 날았고 탁하고 테이블에 떨어졌다. 만일 술잔에 독이 묻어있었다면 전체 인원이 다 죽었을 정도로 술잔은 돌고 돌았다. 오늘 도영의 컨디션은 좋지 못했다. 그 상태로 끌려온 술자리의 후폭풍이 걱정되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술에 취하지 않았다. 소주 한 병 정도 마시면 적잖이 취해서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도영이지만 오늘은 소주가 한 병, 두 병을 넘어가서는 몇 병을 마셔도 거뜬했다.

 

 

"야, 우리 과일 소주 시켰었어?"

 

"아닐걸? 여기 과일 소주 없던데?"

 

 

아,아닌가? 기분 탓인가 보네. 술이 취하질 않아서 안 그래도 이상한데, 소주도 과일 맛이 나는 것마냥 달았다. 소주잔을 들고 코로 냄새를 킁킁 맡았다. 이건 포돈가?

 

 

"야, 뭘 또 킁킁거리고 있어?"

 

"야 이거 포도 냄새 나지 않냐?"

 

 

도영이 소주잔을 옆자리 지훈에게 들이밀었다. 지훈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소주잔을 건네받고 냄새를 맡더니 이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도영에게 취했냐? 라 말했다. 뭔 포도야 그냥 알코올 냄샌데, 야야, 됐고 짠해. 짠 도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주잔을 부딪쳤다. 아 이거 완전 포도 냄새나는데. 입에 털어 넣은 소주에선 달디 단 포도주의 맛이 났다. 아. 나 취한 건가 보다. 제대로 취했다. 도영이 주섬주섬 짐을 챙기자 지훈이 도영을 붙잡았다. 야, 어디 가. 나 취한 거 같아서 집가려고 여기서 안 취한 새끼가 어딨어. 지훈의 강경한 말의 도영은 다시 자리에 앉혀져 술잔을 비워댔다.

 

 

"오늘 김도영 잘 마신다?"

 

"그러게, 술이 다네."

 

 

구라 안치고 진짜 달다는 말이었다. 아니 똑같은 술병에서 나온 술인데 왜 자신의 술잔에 따라진 술만 이렇게 달 수 있는지 도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영의 달다는 말에 주변 동기들은 오오오거리며 더 마시라며 도영을 부추겼다. 결국 술자리에서 살아남은 건 도영밖에 없었다. 회비를 걷은 총대를 깨워 계산을 시키고 테이블에 엎어져있는 동기들을 깨워 택시를 태워 보내고 나서야 도영은 집에 갈 수 있었다. 보통 같으면 도영도 테이블에 엎어져있는 친구들 중 하나였을 것이 분명한데 오늘은 술을 목구멍에 들이부어도 멀쩡했다. 도영이 택시도 타지 않은 채 걷기 시작했다. 달빛이 오늘따라 밝았다. 말일이면 초승달이어야 할 텐데 보름달이네. 아, 아닌가? 수능 과탐으로 지구과학을 공부했던 도영이지만 수능이 끝난 후 누구보다 더 열심히 놀았던 도영인라 자신의 지식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신입생 인지라 요 한 달 동안 개강파티다, 대면식이다 개강 총회다 뭐다 모든 술자리에 참석했던 도영이었다. 내가 요 한 달 동안 술에 단련된건가?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사실 내가 취했는데 티가 안 났던 게 아닐까? 도영이 편의점에 들려 숙취해소제를 하나 사 입에 털어 넣었다. 혹시 모르는 거니깐..

 

들어온 집은 조용했다. 아버지란 사람은 못 본 지 오래고 형은 성인이 되자마자 대학도 안 가고 독립하더니 연락이 끊어졌다. 집안엔 도영과 어머니 두 사람뿐이었다. 닫힌 어머니의 방문을 힐끔 보곤 도영은 방으로 들어갔다. 몸에 가득한 술 냄새에 샤워를 하곤 덜 말린 머리로 침대에 누웠다. 몇 십 분을 걸었으니 몸이 피곤했던 건지 잠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

 

도영이 꿈에서 깨어났다. 창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아 커튼을 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방금 꾼 꿈이 잊혀지지 않았다. 꿈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만난 사람들이라곤 하지만 꿈속에 나오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의 사람을 도영은 만난 적이 없었다. 아까 전 동현의 생각을 잠시 해서인지 꿈속에 동현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보다는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꿈속에서 동현은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꿈속 사람들은 무슨 캠프파이어를 하는 것 마냥 가운데에서 불이 피어져 오르는 원탁에 앉아 진지한 모습으로 말을 했다. 꿈을 곱씹던 도영은 잠시 고민을 하다 결론을 내렸다. 개꿈이네. 잠이나 자야지. 도영이 다시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리곤 잠을 청했다.

 

 

평일에도 달렸으면서 일주일 내내 술집에 출석 도장을 찍어야 하는 것 마냥 동기들은 주말에도 술을 퍼마셨다. 저녁에 놀자고 부르는 동기에 도영은 자신의 잘못된 생활습관으로 좆 창 나버린 위와 간을 생각하며 거절을 했다. 나 여기서 더 마시면 진짜 복구 불가야. 지금도 양배추즙 사먹어야 할 것 같은데? 온종일 티비를 보며 뒹굴뒹굴했다. 성인이 되면 뭐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뭐 별거 없었다. 그냥 민증을 내밀면 피씨방에 밤늦게까지 있어도 되고 청소년기에 마셔보고 싶던 맛없는 술을 원하는 만큼 마셔도 된다는 점? 그것 빼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아, 그리고 가장 큰 점은 신검을 받으라고 우편이 온다는 거다. 어릴 때 편지를 썼던 군인 아저씨가 이제 내가 된다니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뒹굴뒹굴하는 도영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였다.

 

 

"어, 엄마 왜?"

 

"너 저녁에 약속 있어?"

 

"아니 없는데?"

 

"그래.... 집에...."

 

 

엄마는 말을 잠시 멈췄다. 엄마 뭐라고? 도영이 엄마를 부추겼다. 말이 없던 엄마는 금방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야, 같이 저녁 먹게 집에 있으라고 웅 아라써 응 그래 이따 봐 아들. 일이 바쁜지 전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기왕 핸드폰 든 김에 도영은 유튜브를 켰다. 인생에서 하지 말아야 할게 술, 담배, 도박이라고 하지만 사실 진짜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페북, 유튜브, 트위터였다. 트위터는 하지 않았지만, 오직 유투브 만으로 하루의 절반을 날린 도영이었다. 노을이 져 방안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도영이 그제야 방안에서 기어 나와 거실로 나왔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여섯 시가 넘어있었다. 도영이 부엌으로 가 먹다 남은 찌개의 뚜껑을 열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다행히 쉬지는 않은 듯했다. 곧 엄마가 퇴근하고 오니까 찌개를 데우고 기다리면 저녁 시간이 얼추 맞을 것 같았다. 냉장고를 들여다보니 김치를 제외하곤 반찬 하나 없었다. 도영이 언제부터 냉장고에 있었는지 모를 계란을 두 개 꺼냈다. 조심스럽게 계란을 톡톡 깨곤 프라이팬 위에 올렸다. 투명하던 계란이 금세 불투명하게 변했다. 다 익힌 계란 후라이를 접시에 옮기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찌개를 껐다. 장갑을 끼고 찌개를 식탁에 옮기는데, 타이밍 좋게도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어, 엄마. 계란 후라이 했어. 얼른 옷 갈아입고 밥 먹어"

 

 

평소 같으면 고맙다며 금방 옷 갈아입고 나온다는 엄마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제서야 도영이 고개를 돌려 현관을 바라봤다. 익숙하지만 한동안 볼 수 없었던 남자가 말없이 신발을 벗고 천천히 도영에게 다가왔다. 도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쩐지 꿈에 갑자기 나온 게 어이가 없었는데 오늘 만나려고 그런 거였나 싶다. 당황해 자신을 쳐다보며 말없이 서 있는 도영에 동현은 자연스럽게 도영을 지나쳐 부엌 안으로 들어왔다.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어봤다. 감각은 느껴지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도영이 밥솥에서 밥을 푸는 동현의 머리를 인정사정없이 갈겼다. 차마 자신은 아프기 싫은 도영이었다. 동현이 소리를 지르며 밥그릇을 놓칠 뻔했다. 꿈이 아니구나. 도영이 세게 때려 얼얼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세게 때린 건지 손바닥이 빨갛게 변해있었다. 뒤통수를 부여잡고 낑낑거리며 어이없어하는 동현에 도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움직였지만, 그 행동은 열리는 현관문에 의하여 제지되었다. 신발을 벗고 집안에 풍기는 찌개의 냄새에 부엌으로 다가오던 엄마는 누가 봐도 한 대 때린 듯한 도영과 누가 봐도 한 대 맞은 듯한 동현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발길을 돌려 안방으로 들어갔다.

 

 

 

....

 

 

 

 

잘 차려진 저녁상에 어색함이 가득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던 엄마와 동현은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밥만 먹었다. 그에 도영도 덩달아 입을 꾸욱 다물고 입에 밥을 퍼 날랐다. 

 

 

"먹지 마 두 개밖에 안 했어"

 

 

도영이 계란후라이를 집으려는 동현의 젓가락을 쳐냈다. 동현이 젓가락을 입에 물고 치사하다 말했다. 너 고작 계란 후라이 하나 가지고 치사하게 굴래? 치사? 치사한 게 누군데 도영이 욱한 마음에 숟가락으로 동현의 이마를 내려쳤다. 비폭력 주의자 도영을 폭력주의자로 만든 동현은 이마에 묻은 밥풀을 매만지며 소리를 지르려 입을 열었다.

 

 

"둘 다 그만 안 둬?"

 

 

엄마의 뒤에서 포효하는 용 한 마리가 보였다. 깨갱, 작은 토끼 두 마리는 엄마의 눈을 피하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고 보니 갑작스럽게 찾아온 동현이 당황스러울 법한데 엄마는 너무나도 차분했다. 마치, 동현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도영이 옆에 앉은 동현을 쳐다보곤 밥을 한 숟갈 퍼 드시던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알았어? 뭐를? 이 인간 오는 거? 그에 동현이 너는 형한테 이 인간이 뭐냐며 타박했지만, 도영은 들리지 않았다. 도영의 엄마는 그제서야 숟가락을 내려놓고 도영의 얼굴을 쳐다봤다.

 

 

"알았지, 그렇게 티가 났는데."

 

 

마시던 물에서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올 것이 왔다 했지. 엄마의 말에 도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뭔 소리야 저게. 동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엄마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급해서요. 아니야, 니가 오죽 급했으면 그랬겠어. 이번엔, 도영이래..? 네, 엄마. 도영을 앞에 두고 엄마와 동현은 티키타카 하기 바빴다.

 

 

"애는 언제 데려가려고."

 

"아, 원래는 오늘 데려오라고 했는데...작별 인사는 해야 하니깐....음..늦어도 내일 새벽?"

 

 

분명 자신을 얘기라는 게 맞을 텐데 이 사람들은 도통 도영을 대화에 끼워주지를 않았다. 언제 데려간다 만다를 얘기하면서 막상 자신에게 제대로 전달해 주는 것이 없었다. 저기요, 제가 택배도 아니고 저도 제 몸의 통제권을 가지고 있거든요?

 

 

"저기, 내 얘기 하는 거 맞지?"

 

 

도영의 두 사람의 대화를 끊고 말했다. 동글동글 꼭 닮은 두 사람의 눈이 그제서야 도영을 바라봤다. 엄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동현에게 물었다. 너, 얘한테 얘기 안 해줬니? 그에 동현도 맞받아치듯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얘한테 얘기 안 하셨어요? 내가 무슨 짐짝도 아니고 서로 미루기 바빴다. 상황을 이해한 두 사람은 한숨을 쉬곤 도영에게로 몸을 돌렸다. 동현이 도영의 눈을 마주 보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영이 침을 꼴깍 삼켰다.

 

 

"도영아,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너는...데미갓이야"

 

 

동현의 눈이 진지했다. 근데 데미갓이 뭔데 나 데미안은 아는데? 분명 진지한 분위기가 맞는데 뭔 말을 하는지 몰라서 이해가 안 됐다. 오해도 이해를 해야 하는 거지 데미갓이 뭔데? 도영의 얼굴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하고 전광판 마냥 쓰여 있었다. 동현이 마른세수를 하고 생각 정리를 하더니 다시 말했다. 너는 아니, 우리 아버지는 신이야. 쿠웅. 충격을 받을 거라는 예상을 하는 건 경기도 오산이었다. 뭐라는 거야. 도영이 시니컬하게 웃으며 귀를 후벼 팠다. 형 미쳤나 봐. 한동안 못 봤던 게 설마 사이비 이런데 끌려가서였나 보네. 한눈에 봐도 믿지 않는 듯한 도영에 엄마도 나서서 도영에게 설명했다. 도영아, 장난이 아니고 너희 아버지 신이셔. 믿었던 엄마마저도 사이비라니 도영은 착잡했다. 신? 하느님이야? 엄마 기독교였어? 뭐 하나님 아버지 이런 거 말하는 거 아니지?  도영의 말에 동현이 손을 떨었다. 도영아 너 그거 신성모독이야 너 그러다 지옥가.

 

 

 

 

 

매일 얼굴을 보는 건 아니지만 같이 사는 엄마의 말은 믿어도 칠 년 만에 본 동현의 말은 믿기지도 믿고 싶지도 않았다. 참다못한 엄마도 나서서 도영을 설득시켰지만, 현실주의자이자 비관주의자인 도영은 설득당하지 않았다. 하긴 갑자기 가족이 찾아와 너는 사실 신과 인간의 혼혈이라 말하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싶기도 하다.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믿지 않는 도영에 동현이 벌떡 일어나 투명한 물컵에 물을 따라왔다. 야, 정수기 물 마셔. 도영이 동현을 꾸짖었다. 동현이 잘 보라며 도영의 눈앞에 유리잔을 가져다 대고 흔들었다. 투명하던 물이 서서히 붉게 변했다. 멍하게 물의 색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던 도영이 손뼉을 쳤다. 와 대박!! 형, 무슨 이은결이야..? 도영이 흥분을 해서 티비에서 봤던 컵에 안쪽 면에 약품을 바르고 물을 따르면 화학변화를 하는 그런 게 아니냐며 동현에게 물었다. 와중에 호칭도 야에서 형으로 바뀌었다.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도영에 엄마는 저 눈치 없는 게 정녕 내 배에서 나온 게 맞냐며 차라리 취하는 게 낫다고 동현이 든 잔을 뺏어 들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동현이 자리에 앉은 도영의 눈을 맞추더니 이내 무엇인가 떠올랐는지 말했다. 도영아, 너 어저께 술 마실 때..이상하지 않았어? 동현의 말에 도영의 눈이 커졌다. 저 새끼 내가 어저께 술 마신 건 어떻게 알았지? 당황한 도영에 동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잔을 들고 물을 따라왔다. 투명하던 물은 아까처럼 다시 붉은색으로 변했다.

 

 

"도영아, 너 어저께 술 마실 때 물, 아니 술맛이 좀 변하지 않았어?"

 

 

도영이 소주잔에서 풍기던 포도의 향을 떠올리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소주에서 과일 향, 아니 와인 향이 나지 않았어? 맛도 그렇고, 동현의 말이 맞았다. 도영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동현이 붉은 액체를 다시 무색 액체로 바꾸었다. 도영에게 잔을 건네니 도영이 멍하게 잔을 쳐다봤다. 그에 동현이 마셔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도영이 머뭇거리다 이내 한 모금을 목으로 넘겼다. 어저께 먹은 맛과 같았다. 입술에 남은 와인의 맛을 혀로 핥아 다시 되새기며 동현을 올려다봤다.

 

 

"그거야,"

 

"뭐가."

 

"그게 우리 능력이야."

 

 

뭐를...? 우리가 걸어 다니는 양조장인 거? 도영이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자 동현이 참았던 분노를 그제서야 터트리며 소리 질렀다. 야이 답답아 아버지가 디오니소스라고. 동현의 말에 도영의 머릿속으로 대가리에 포도 장식을 한 캐릭터가 스쳐 지나갔다. 인터넷을 달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 너 때문에 흥이 다 깨져버렸으니까 책임져. 알겠습니다. 디오니소스님. 머릿속에서 춤을 추는 캐릭터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도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동현은 도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 마냥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거 아니라고...결국 웃음이 터져버린 도영을 진정시킨 건 엄마였다. 웃느라 광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볼을 감싼 도영이 그제서야 진지하게 엄마와 동현의 말을 경청했다.

 

 

 

두 사람의 말에 의하면 어릴 적에 사라진 애비라는 사람은 알고 보니 신이고 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사라졌지만, 우리를 계속 지켜주고는 있었다는 거였다. 아버지가 신인만큼 동현과 도영은 신의 힘을 쓸 수 있는데 그 힘을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하기도 하며 신의 힘이 발현되면 괴물들이 이를 느끼고 공격을 하러 오기 때문에 이를 피해서 동현이 데미갓 캠프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도영은 20살이 되고 3개월이 지났는데도 그 힘이 나타나지 않길래 신의 힘을 물려받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데 엊그저께 예언의 신 아폴론으로부터 신탁이 내려왔는데 이에 관한 내용이 바로 디오니소스의 또 다른 아이가 힘을 얻었다는 것이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동현은 또 다른 내연녀가 있었냐며 디오니소스를 다그쳤지만 털어서 나오는 것은 없었다. 그 말은 즉슨 그 또 다른 아이는 도영이라는 이야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동현의 꿈에 술을 마셔도 거뜬한 도영이 나와 급하게 집을 찾아온 것이라 했다. 그에 아르테미스도 달빛을 비추어 도영을 지켜보았다고 했다. 어쩐지 달이 초승달이 아니라 보름달이더라. 솔직히 믿기지 않는 말이었으나 그제 꾼 꿈도 그렇고 물을 술로 바꾼 것도 그렇고 그제 술 마신 것도 그렇고 앞뒤 상황이 퍼즐처럼 딱딱 맞아떨어져 믿을 수밖에 없었다. 도영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으로 정보를 집어넣었다.

 

도영이 당황해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어거지로 굴려 말했다.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어 중간에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니깐, 우리 아빠가 신이고 나는 혼혈인데 이제 힘을 쓸 수 있게 돼서 위험하니깐 그, 데미안 캠프 거기에 간다고?"

 

"데미갓 캠프"

 

"응, 그래 그거"

 

 

동현이 그제서야 도영이 이해한 걸 알았는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도영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사실 자기가 뱉으면서도 뭔 개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기도 했고 이게 팩트라면 자신은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미칠 노릇이었다. 거의 7년 만에 만난 친형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 너는 신의 아들이라는 말인데 신은 개뿔, 늦잠 자는 게 더 중요해서 교회도 다니다 때려치운 도영의 마음속에선 니체가 살고 있는지 신은 다 죽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신성모독 엄청나게 했는데 거기 가면 나 혼나는 거 아니야? 도영이 무슨 고민에 빠졌는지 모르는 동현이 손을 들어 도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도영이 울상을 지었다.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세요. 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으니 입을 꾹 다물었다. 엄마는 예상보다 아주 덤덤했다. 도영이 이해하는 걸 기다리던 엄마는 창고 방에서 큰 캐리어 하나를 꺼내오더니 도영에게 짐을 싸라고 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고 마음의 준비는 이미 오래전에 끝냈으니 자신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 엄마는 아무 말 없는 도영을 꼬옥 안아주었다. 질질 끌어봤자 보내기만 싫어지니 얼른 데려가라며 동현을 재촉했다. 아직 밥도 다 안 먹었는데 얼른 보내고 싶나 보다. 올림포스의 신 중 하나를 만나려면 어느 정도 깡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도영의 엄마는 그 중 올림포스에서 아프로디테를 사냥할 정도로 아름다운 신인 디오니소스를 쟁취한 강단 있는 분이었다. 삶의 풍파가 많았던 엄마는 이깟 이별쯤은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엄마 나 근데 밥 아직 다 안 먹었는데..."

 

 

눈치를 보던 도영이 말을 꺼냈다. 식탁 위에 차려진 저녁상의 그제서야 존재를 눈치 챈 엄마는 미안하다며 도영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찌개가 다 식어 차가웠다.

 

 

 

...

 

 

 

 

"너 성인이 된다는 게 뭔지는 알아?"

 

"몰라, 잘못하면 소년원 말고 감방 가는 게 성인 아냐?"

 

 

이야기할 분위기를 잡는 동현을 받아줄 도영이 아니었다. 동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뭐가 그리도 급한 건지 동현이 재촉해서 뭘 챙겨야 할지 생각할 틈도 없이 빠르게 짐을 챙겼다. 엄마에게 인사를 마치고 주차장을 졸졸 따라가니 동현이 한 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고작 28밖에 안 된 군대를 다녀왔다면 막 입사를 해서 일을 배울 나이의 동현이 어디서 돈이 나온 건지 비싼 차를 탔다. 밥 먹고 후다닥 챙긴 캐리어를 트렁크에 던지든 싣고 도영을 태운 동현이었다. 이거, 마이바흐 아니야..? 도영이 눈을 가늘게 뜨곤 차를 스캔했다.

 

밤이라 그런지 도로는 조용했다. 야근하는 사람들이 밝혀준 빛들로 도시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말 없던 동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연락, 못한 건 미안해..형이 정신이 없었어."

 

 

도영이 대답 없이 동현을 힐끔 보곤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정신이 7년 동안 없는 게 정상인가 싶기도 했다. 동현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이 차가 크게 나서인지 동현이 떠나기 전 도영과 동현은 크게 싸운 적도 없었다. 다른 형제들처럼 투덕거리지도 서로 욕 한번 한 적도 없는 사이좋은 형제였다. 그래서 더 동현이 연락도 없이 사라진 게 충격이었던 도영이다. 동현이 사라졌을 때 종일 전화기 옆에 붙어 동현에게 전화해댔고, 동현이 자주 가던 피씨방부터 노래방, 다니던 학원까지 돌아다니며 찾아댔다. 급기야 실종신고를 한다며 경찰서를 찾아가려 했을 때 엄마는 도영을 뜯어말렸다. 자식이 사라졌는데 엄마는 이상할 정도로 담담했다. 그 당시엔 너무 흥분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돌이켜보니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나이가 들어 엄마에게 말린 이유를 물었지만, 엄마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혼자 생각 정리를 했고 혼자 감정을 정리해서 애써 동현의 존재를 잊고 살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은 동현이 갑자기 나타날 때를 대비해서 할 말을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준비한 게 무색할 정도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또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이렇게 엄마도 알 정도였으면 도영에게도 말해줄 법한데, 말한다고 이해 안 해줄 것도 아니었는데 몇 년을 말도 없이 잠수를 탄 게 섭섭했다.

 

 

"내가 예언에 안 나왔으면 영원히 볼 생각 없었겠네, 그러면."

 

 

도영이 말하면서도 목이 멨는지 물기 가득한 말을 내뱉었다. 동현이 어쩔 줄 모르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게 아니라, 말을 하려 했다. 숨기려던 건 아니었다는 둥 그런데 네가 알면 위험해지니깐. 인간한테 신의 향이 묻으면 괴물이 쫓아오니깐 그랬다. 동현이 구구절절 설명하다가 결국엔 갓길에 차를 세웠다. 말하고 나니깐 더 서운해지는 것 같아 도영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렀다. 눈물을 닦으면 지는 것 같아 그냥 고개를 돌려 동현에게 얼굴을 숨겼다.

 

 

 

 

 

"도영아, 미안해. 형이 정말 잘못했어. 찾아가려고 했어. 내가 힘을 조절할 수 있고 향을 조절할 수 있게 되면. 그때 그러려고 했어. 형이 너무 형 생각만 했나 봐"

 

 

도영이 매이는 목으로 겨우 되받아쳤다.

 

 

"그럼 뭐해, 여태껏. 연락 하나 없었는데. 지금 와서 얘기하면 뭐해. 평생 안 보고 살려고 했어?"

 

 

도영의 말에 등을 토닥이는 것을 멈춘 동현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뗐다.

 

 

"도영아, 사실 네 졸업식 갔었어. 전부. 너 초등학교 졸업식에 나와서 상장받는 것도 봤고. 중학교 졸업식에서 반 애들이랑 단체로 춤춘 것도 봤고 어저께 밴드부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다 봤어. 너를 어떻게 안 보고 살겠어 형이"

 

 

이러는데 어떻게 미워해. 동현의 말에 도영이 더 크게 울어 재꼈다. 바빠서 오지 못하는 엄마에 졸업식 때마다 꽃다발 하나 없이 혼자 있던 도영이었는데, 그때 동현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서러웠다. 말을 하지 바보야. 동현이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도영의 눈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달래주면 더 서럽다고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 뒤로 한참을 더 울고 달래고 나서야 차는 움직일 수 있었다. 도영이 부은 눈을 손으로 식히며 진정했다.

 

 

창밖을 바라보던 도영의 눈에 신기한 일이 펼쳐졌다. 물론 물이 술로 변한 것도 신기했지만. 아니, 서울 한복판에 이런 숲이 있다고? 국토의 70%라지만 이렇게 숲이 크다고? 어디서 나온 지 모를 숲길을 따라 차는 달렸다. 어쩐지 동현이 네비 하나 안 찍고 달린다 했다. 네비 찍어도 안 나오는 곳을 가는 거라는 것을 도영이 그제서야 깨달았다. 숲 냄새가 좋아 창문을 열고 향을 한껏 맡았다. 어디가 끝인지 모를 만큼 경사진 언덕을 달렸다. 꽤 오랜 시간을 달리고 나서야 하얀 벽과 나무로 된 대문이 보였다.

 

 

"지금 중간계, 아니 중간계와 하늘 그사이에 온 거야. 여기서부터는 창문은 닫고 가야 해"

 

 

동현이 클락션을 두 번 누르자 큰 대문이 열려 길을 터줬다. 동현의 말에 도영이 창문을 올렸다. 굽이 굽은 비포장 길을 따라 쭈욱 올라가는데 승차감이 나쁘지 않았다. 이래서 비싼 차를 탔나 싶기도 했다. 언덕이 꽤 높았다. 몇십 분을 내리 달리니 아까 열린 대문은 뭔지 궁금하게 또 다른 대문이 있었다. 하얀 벽들을 둘러싸곤 까만 쇠창살이 길을 막고 있었다. 이번엔 클락션을 울리지 않았다. 동현이 안전벨트를 풀더니 도영에게 내리지 말고 기다리라 하고 심호흡을 하더니 차에서 내렸다. 대문 앞으로 가더니 금색으로 그려진 그림에 손바닥을 붙였다. 얼마 안 있어 높디높던 쇠문이 천천히 열리자 동현은 빠르게 차에 타고 다시 엑셀을 밟고 문을 지나쳤다. 문을 지나치기 무섭게 문은 빠르게 닫혔다. 그 뒤로 몇 분을 가서야 건물들을 볼 수 있다. 밤늦은 시간이라 사람은 없었고 조용했다. 숲속이라 그런지 벌레가 우는 소리와 물소리만 고요하게 울렸다.

 

 

차에선 내린 도영이 캐리어를 들고 멍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들고 있던 캐리어의 무게가 준 것을 느껴 고개를 돌려보니 예쁘게 생긴 남자가 도영의 캐리어를 같이 들고 있었다. 도영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에 남자는 죄송하다며 도영에게 사과했다. 주변에 예쁘게 생긴 사람들이 몇 명 다가왔다. 동현이 도영에게 아버지의 신전을 모시는 님프라 소개하곤 따라오라며 도영을 이끌었다. 동현을 따라 걷는 도영에 뒤론 님프라 소개한 자들이 따라왔다. 도영이 눈치를 보다 동현에게 물었다.

 

 

"저분들도, 같이 가?"

 

 

아, 저분들은 신전에서 네가 사는 걸 도와주실 거야. 도영이 힐끔 뒤를 돌아보자 님프들이 방긋방긋 웃어주었다. 도영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티비에서만 보던 건물들이 도영의 눈앞에 펼쳐졌다. 도영이 신기함을 숨기지 못하고 감탄했다. 신전 앞을 지키는 사람들이 도영에게 꾸벅 인사하자 도영도 따라서 꾸벅 인사했다. 동현이 그에 푸흐흐 웃었다. 동현이 한 신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야"

 

 

신전은 다른 신전들과 마찬가지로 하얗고 큰 기둥이 있었다. 밤눈이 어두워서인지도 모르지만 사실 신전이 다 그게 그거 같았다. 이곳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도영이 동현을 따라 신전에 들어왔다. 넓고 하얬다. 뒤를 따라오던 님프들은 신전에 들어오자마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피곤하니 설명은 내일 들으라는 동현의 말에 도영이 님프가 안내해주는 방으로 향했다. 언제 가져다 놓은 것인지 도영의 짐이 모두 옮겨져 있었다. 침대는 푹신했고 또 몸은 피곤했다. 보통 깔끔함을 중요히 여겨 씻고 자는 게 생활화된 도영이지만 오늘 밤만큼은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미청년이라 전해져 내려온 디오니소스의 아들들은 꽤나 잘생기긴 했다. 선이 굵은 동현와 다르게 도영은 유전자가 진하게 내려져온 건지 얇은 선에 꽤나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신들의 아이는 넘쳐나지만 12신의 아들은 특별하다. 그것도 올림푸스의 12신 중 유일한 인간 혼혈인 반신 반신의 디오니소스가 인간을 통하여 낳은 자식이니 눈길이 갈 법도 했다. 처음 동현이 데미갓 캠프에 왔을 때도 수많은 눈이 동현을 지켜보았는데 도영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많으면 많았지 도영을 쳐다보는 눈을 더 적지는 않았다. 보통 같으면 인간과 아이를 낳아도 신들의 그 특유의 바람끼 때문에 한 인간 당 한 아이만 낳고 사라지기 일쑤인데 글쎄, 이복형제도 아닌 친형제라니 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도영은 수군거리는 주변 사람들을 애써 무시한 채 님프들이 안내하는 곳을 따라다니며 지리를 익히고 겨우 적응을 하고 있었다. 도영도 몰랐던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남에 입을 통해서 듣게 되는 것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기를 여기로 데려다 놓은 동현은 어딜 간 건지 밤늦게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뭐를 하고 다니는 건지 피곤함에 쩔어서 말도 못 걸었다.

 

 

이 넓은 캠프장에 친해진 거라고는 헤스티아의 아들인 문태일과 쿤, 텐과 텐의 친구 등등 몇 명 되지 않았다. 사교성이라곤 포도 씨만큼도 없는 도영이라 그 외엔 친구가 없었다.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 맨정신으로 있는 것보단 차라리 취한 것이 낫다고 생각해 연회장에서 잔을 하나 챙겨 들고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잔에 포도주를 채워 마시는데 그 모습을 우연하게도 텐이 목격한 것이 텐과 친구가 된 계기였다. 텐의 잔에도 와인을 채워주며 텐과 와인 파티를 벌이는데 텐이 하나둘, 자신의 친구를 데려와 소개를 해주며 하나둘 알게 됐다. 오로지 텐의 인맥으로 채워진 도영의 인맥이었다. 신기한건 인종도 나라도 다른 이 곳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말이 통하는 거였다. 배운 적도 없는 그리스어가 도영의 목에서 툭, 튀어나왔다. 태국인인 텐과 중국인인 쿤과 이야기가 통하는 것이 신기했지만 애초에 신이 있다는 것도 저번 주에 처음 알았는데 말이 통하는 것 정도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적응기간이라 훈련소를 배정받지 못한 도영은 훈련을 받으러 떠난 텐과 그 일행으로 인해 쓸쓸히 홀로 연회장에 가야 했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이렇게 혼자 다녔는데 그동안 텐과 많이 친해진 것인지 텐의 빈자리가 컸다.

 

나눠주는 접시에 고기 몇 점과 구운 채소를 얹어 빈 테이블에 홀로 앉았다. 포크로 고기를 찍어 질겅질겅 씹었다. 한식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지옥에서 온 육식주의자만 있는지 오로지 고기, 구운 채소. 디저트. 먹을 거라곤 이게 전부였다. 물론 신전에 있는 님프에게 원하는 요리를 말하면 곧바로 만들어 주지만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으니 도영은 이를 몰랐다. 같은 메뉴를 계속 먹으니 질릴법했다. 도영이 앞에 놓인 금띠가 둘러진 잔에 와인을 채웠다. 오늘은 스파클링 화이트 와인이었다. 이쯤 되면 알코올 중독이 아닌가 싶지만, 신의 자식이라는 것을 인식한 이후부터는 취하는 것을 조절할 수 있는 도영이었다. 이에 대해 텐은 다른 신은 없는 디오니소스만의 능력이라 말했다. 홀로 앉은 도영이 만만했던 것인지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도영의 귀에 넘어왔다. 요 며칠 동안은 그래도 쿤이랑 텐과 함께 다녀 자신을 향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일부로 들으라는 것인지 목에 확성기라도 단 것처럼 목소리가 컸다.

 

 

"글쎄, 디오니소스도 따지고 보면 데미갓 아니야? 그럼 쟤는 반쪽에 또 반족이니깐, 하프도 아니고 쿼터네?"

 

 

주변에서 도영을 보며 낄낄거렸다. 쿼터란 말은 배라에서 밖에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1/4이라고 쿼터라고 하는 거야? 배라는 골라 먹는 재미라도 있지 나는 뭐야? 이것들은 자신이 귀도 없는 줄 알고 잘만 떠들어 댄다. 밥 먹는데 밥맛 떨어지게. 도영이 욱한 성질머리를 주체 못 하고 기어코 밥상을 엎었다. 신의 아들은 맞는지 그 긴 식탁이 한 번에 엎어졌다. 다행스럽게도 도영이 이 구역 왕따인지라 식탁엔 아무도 없었다. 사실 도영이 이때까지 참아온 것도 대단했다.

 

 

"뭐 쿼터? 내가 무슨 배스킨라빈스인 줄 아나 디질려고"

 

 

배스킨 라빈스...누군가 중얼거렸다. 원래 예쁜 꽃엔 가시가 있다고 하지만 이건 가시 정도가 아니라 거의 독을 품고 있는 정도였다. 아무 말없이 가만히 있던 도영을 만만하게 생각하던 아이들의 얼굴이 금세 하얗게 질렸다. 디오니소스가 광기의 신이란 것을 모두가 잊고 있었다. 밥상을 엎은 도영은 그냥 광기, 그 자체였다. 눈이 돌아간 도영이 엎어진 식탁을 뛰어넘어 가장 목소리가 크던 남자아이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꼴에 신의 아이라고 책에 나오는 것 마냥 머리를 길러 잡기도 쉬웠다. 처음 이곳에 왔던 동현은 아무 말없이 소심하게 남의 눈치를 보던 솜뭉치 같았다면 도영은 솜뭉치는 개뿔, 만렙토끼였다. 그 당신의 동현을 생각하며 도영 또한 만만하게 보던 사람들은 금방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신력이 눈빛으로 간 것인지 도영이 자신을 쳐다보는 그 많은 사람을 오로지 눈빛 하나로 제압했다.

 

 

"뚫린 입이라고 뱉으면 다 말인 줄 아는데, 어디 한 번 죽어서도 그 입이 영원하나 보자"

 

 

머리채를 쥔 손아귀의 힘이 꽤나 셌다. 버둥거리며 도영의 손을 빼내려던 남자아이는 도영에게 욕지거리를 내뱉곤 이거 놓으라며 소리 질렀다. 눈이 돌아간 도영에 누구도 도와줄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굳어있었다.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도영에 남자아이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도영은 이 순간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학교나 여기나 자기들이 잘못한 가해자면서 부당하다고 들고 일어서면 지가 피해자인 것처럼 울기 바빴다. 운다고 봐주는 건 영유아기 이후로 끝이다. 내가 모부도 아니고 운다고 봐줄 생각은 없었다.

 

 

"울어? 울면 안 되지, 내가 잘못한 거 같잖아 아니야?"

 

 

도영이 잡은 머리를 무릎으로 치려는 순간 누군가 도영의 손을 감싸 쥐고 막아섰다. 도영이 눈을 한 번 굴리고 자신을 막은 사람을 쳐다봤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남자였다. 뭐야, 이 말티즈 같은 건. 도영이 남자를 노려보자 남자는 깨갱거리더니 더듬더듬 도영에게 말했다.

 

 

"쟤네가 잘못한 건 아는데 이러다가 너까지 처벌받아. 쟤네는 내가 네메시스 님께 말씀드릴게"

 

 

네메시스는 누구지. 남자의 표정과 행동을 보자니 자신을 위한 일이란 건 알 수 있었다. 도영이 손을 풀어 남자아이를 놔줬다. 뚱한 표정으로 싸움을 말린 말티즈 같은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의 등장에 도영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남자아이가 벌벌 떨었다. 자신이 뱉은 말 하나로 제우스의 아들까지 달려올 줄 몰랐겠지. 말티즈 닮은 남자가 싸늘한 표정으로 님프를 불러 남자아이를 끌고 가게하고는 박수를 두어 번 쳤다. 그에 싸움 구경을 하기 위해 몰렸던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난 이태용이야. 제우스의 아들"

 

 

태용이 손을 내밀었다. 도영이 떨떠름하게 손을 잡아 악수했다. 난, 김도영. 디오니소스의 아들. 도영을 보곤 태용이 해맑게 웃었다. 아까 전 싸늘하게 님프를 불러 끌고 가게 한 남자와 동일 인물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신들의 왕이라는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태용에게선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도영은 올림푸스의 난봉꾼을 대표하는 제우스의 자식이 이 캠프에 과연 몇 명이나 존재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니, 다들 헤라한테 괴롭힘당하지 않을까? 도영이 머릿속으로 만화책에서 봤던 제우스의 자식과 아내들을 괴롭히는 헤라를 떠올렸다.

 

 

도영의 예상과는 다르게 헤라는 태용을 미워하지 않았다. 회의장에 나타나 어디서 빼돌린 건지 번개를 한 손에 쥐고 울먹거리며 이제 와 애비 노릇을 하려는 한심한 사람은 죽어도 마땅하다며 제우스에게 달려들어 심장에 번개를 내리꽂으려 하는 태용을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당시 심장은커녕 손가락도 베지 못한 채 제우스의 한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엉엉 우는 태용을 달래 준 것이 헤라였다. 제우스를 독재자라 칭하는 헤라로서는 꽤나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많은 제우스의 아이를 증오하던 헤라는 태용을 양아들로 삼았다. 제우스의 힘을 가지고 헤라를 등에 업은 태용은 아무도 건들지 못했다. 그래서 그 남자아이가 사시나무 떨듯 떤 것이기도 했고.

 

 

태용과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는 와중에 누군가 사람들을 해치고 태용과 도영에게로 다가왔다. 와아, 디오니소스의 자식이야? 그 말에 도영이 인상을 구겼다. 뭐야 이 자식아? 머리채 놓은 지 5분도 안 돼서 한 놈 더 잡게 생겼네, 도영이 고개를 돌려서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다. 꽤, 아니 욕 나올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도영을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옆에 있는 태용도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다 잘생기고 예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 중 돋보였다. 웃은 얼굴에 침도 못 뱉는 다지만 지금 도영의 기분은 하데스의 지옥을 뚫을 정도로 최악이었기 때문에 침은 뱉는 건 물론 뺨도 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비꼬는 거야 아니면 진짜 놀란 거야. 도영이 코를 찡긋거리다 이내 소리쳤다.

 

 

"꺼져, 포도주에 대가리 박고 숨 못 쉬어서 디지기 싫으면"

 

 

도영의 말에 정적이 흘렀다. 그 누가 아프로디테의 아들에, 얼굴을 마주하고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모두가 남자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남자가 성큼성큼 도영에게 다가갔다. 관객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태용이 말릴 새도 없이 남자가 도영에게 손을 뻗었다.

 

 

"진짜 귀엽다."

 

 

큰 손이 도영의 볼을 감싸 쥐었다. 화가 나 울그락 붉으락 했던 도영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가득 찼다. 뭐야 이건. 도영이 볼을 감싼 손을 치울 생각도 못 하고 굳어져 어버버거렸다. 도영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금빛으로 빛났다. 이곳에 들어와서 본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남자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날려 햇빛에 반짝거렸다. 자신을 뚫어지라 보는 금안을 마주 보자니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시선을 피했다. 피한 시선으로 곧게 뻗은 콧대와 석류처럼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랑 결혼하자.

 

그 말 이후 남자의 얼굴엔 말도 못 할 양의 포도주가 뒤집어썼고 입던 하얀 옷은 붉게 물들었다. 도영은 분명 한 잔 분량의 술이 나올 것으로 생각하고 부은 것인데 가진 능력인지 잔에서는 끊임없이 와인이 나왔다. 나오는 와인을 다 뒤집어쓰고도 실실 웃던 남자를 보고 도영은 무서움을 느껴 뒷걸음치며 도망갔다. 저거 또라이야 완전.

 

 

 

 

...

 

 

 

 

도영은 그 자리에서 도망쳐 곧바로 신전으로 뛰어왔다. 별다른 일은 없냐는 님프의 말에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이곤 방으로 들어왔다. 동현을 그때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도영이 뒤늦은 후회를 시작했다.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부터 오늘은 나사 빠진 미친놈이 자기를 보고 결혼을 하자고 하질 않나, 이상한 것 투성이였다. 가장 큰 문제는 들고 온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데이터도 안 터지고 전화도 안 되니 스마트 폰은 그냥 고물 딱지가 되어버렸다. 여기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면서 사는 거야? 님프에게 이곳에서 여가생활은 무얼 하는지 묻자, 님프는 대련이나 수영과 같은 괴상한 것들을 추천해줬다. 여기 21세기가 맞나요? 도영이 핸드폰을 침대 한구석에 던지곤 그대로 드러누웠다. 침대에 누워 생각(사실은 그냥 잠)에 빠진 도영을 누군가가 찾아왔다. 님프가 도영의 방문을 똑똑 두드려 도영을 불렀다.

 

 

"에로스의 막내 아드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게 누군데, 아직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 파악을 못 한 도영이었다. 만화책에선 신의 자식이라곤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만 알려주지 도영 나이 또래까지는 알려주지를 않으니 알 턱이 없었다. 도영이 누웠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방밖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났다. 님프가 문을 열어줄 틈도 없이 텐이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고 도영의 방으로 들어왔다. 너였구나, 에로스의 자식이. 살짝 욕 같지만 텐은 딱 에로스 그 자체였다. 피가 좀 진하다 그치? 텐이 도영이 누워있던 침대로 곧장 뛰어들었다. 프시케를 만나기 전 에로스처럼 텐은 개구지고 또 아이 같았다.

 

 

"도영, 재현이한테 고백받았다면서? "

 

 

정재현? 그게 누군데? 도영이 이 캠프에 들어와서 한 말은 일 순위가 그게 누군데? 이 순위가 그게 뭔데 일 것이 분명했다. 신들이 영원히 산다고 하지만 자식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싶다. 신화에 나오는 이름들도 외우기 급급한데, 아직까지도 정정하게 살아있어 자식을 낳아대니 도통 이름을 외울 수가 없었다. 국가에서 다둥이 혜택 카드라도 쥐여주어야 할 것 같았다. 도영이 테이블에 놓인 물을 한 컵 마시고 잔의 윗부분을 따라 손가락으로 쓸었다.

 

 

"너한테 결혼하자고 했다면서, 네가 포도주로 거절했고.

 

그제서야 재현이 누군지 눈치챌 수 있었다. 아, 그 미친 새끼구나. 도영이 재현의 얼굴을 떠올리곤 다시 인상을 구겼다. 텐이 도영의 표정에 웃음을 터트렸다. 도영이 입을 툭 내밀곤 불만을 터트렸다. 안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다들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도영의 말에 텐이 도영의 등에 손을 뻗어 살살 달래주었다.

 

 

"도영, 너의 아버지가 열두 신중 하나이셔서 그래. 열 두신은 신화가 쓰이고 난 후부터는 자식을 낳지 않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었거든, 뭐. 지금은 깨졌지만. 원래 모두가 다 아는 사람일 수록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는 법이잖아"

 

그리고 보기 드문 형제잖아. 너랑 동현이 형 텐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포도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도영이 입을 떨어 푸우우 소리를 내곤 텐의 옆으로 누웠다. 푹신한 침대가 도영의 몸을 감싸주었다. 도영이 포도 쪽으로 손을 뻗자 텐이 포도를 대신 따서 도영에 입에 넣어주었다. 톡하고 포도가 달콤한 향을 내뿜으며 입안에서 터졌다.

 

 

"형이랑 나처럼 동복형제가 드물어?"

 

"드물긴 하지, 같은 사람에게서 두 명이나 자식을 낳는다는 게. 신들은 워낙 제멋대로잖아. 여기 캠프에서도 자기가 데미갓이긴 하지만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아"

 

 

그건 완전 쓰레기네. 도영의 말에 텐이 낄낄 웃었다. 그냥 그렇다고. 애들이 말하는 건 신경 쓰지마 처음 왔을 때 나한테도 그랬어. 아까 전 재현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채 도영과 텐은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떠들었다. 텐이 훈련하러 다녀온 이야기부터 아버지를 안 닮았는지 자신은 화살을 잘 쏘지 못한다는 이야기까지 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텐의 말에 호응해주었다. 나는 언제쯤 훈련에 받으려나. 사실 움직이기도 싫어하는 도영인지라 영원히 적응 기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텐과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야기하는데 똑똑 님프가 도영의 문을 두드렸다.

 

 

"아르테미스의 아드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늘따라 도영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야기 맛집인가 보네 여기가. 도영이 들여보내 달라 말하니 님프가 여는 문을 통해 쿤이 들어왔다. 네가 아르테미스의 아들이었구나 몰랐네. 사실 쿤은 얘기해줬지만, 도영이 까먹은 거였다. 분명 도영의 방인데 텐이 방주인인 것 마냥 쿤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쿤은 훈련을 마치고 씻고 바로 도영에게 온 것인지 머리를 다 말리지 않아 축축했다. 쿤이 텐의 인사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도영을 바라보곤 외쳤다.

 

 

"도영! 재현이 결혼하자고 했다면서!"

 

 

그제서야 잊고 있던 재현의 존재를 떠올렸다. 아, 맞아 걔. 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걔가 누구야? 도영이 투덜거렸다. 소문이 어디까지 난 것인지 훈련하러 다녀온 이 둘에게도 퍼져있었다. 매일 똑같은 일상만 반복하는 이 캠프에서 도영의 등장이 얼마나 재밌는 얘깃거리인지 도영은 아마 모를 것이다. 재현은 아프로디테 아들이야. 쿤이 포도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더니 도영에 옆에 누우며 말했다. 하얀 도영의 베개가 쿤으로 인해 축축해졌다. 아프로디테? 어쩐지 잘생겼더라. 도영이 아까 본 얼굴을 곱씹었다. 유전자가 세긴 세구나. 도영의 머릿속에 결 좋은 머리를 날리며 애교살 접어가며 웃던 재현이 떠올랐다.

 

 

"도영, 방금 재현 얼굴 생각했지"

 

 

웅. 도영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잘생겼지? 웅. 쿤이 부정하지 않는 도영에 푸하하 웃었다.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고 잘생긴 건 잘생긴 거니깐. 도영이 웃는 쿤이 얄미워 손으로 찰싹 쿤의 팔을 때렸다. 아야 하며 맞은 팔을 비비며 쿤이 당시의 상황이 궁금한지 물었다. 근데 어쩌다 고백받았어? 도영이 고민하고 고민하다 더듬더듬 그 당시에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그래서 와인을 부었어."

 

 

도영의 말에 쿤과 텐 모두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웃느라 흘린 눈물을 닦는 텐을 도영이 밉지 않게 노려봤다. 재밌냐 친구가 괴로운 게 즐겁냐! 도영이 옆에 놓인 베개로 팡팡 쿤과 텐을 때렸다. 도영의 억울하고 분한 표정이 웃긴 지 쿤과 텐은 도영을 놀리기 바빴다. 화난 토끼처럼 코를 씰룩거리며 한 발을 쿵쿵 바닥에 차는 도영은 좋은 놀림감이었다. 이 뒤로 님프가 저녁 시간이라 말할 때까지 도영은 텐과 쿤에게 놀림을 당했고 진이 빠진 체 그대로 침대에 잠들었다.

 

....

 

 

 

 

 

난데없는 공개 청혼에 잔뜩 놀림을 당하고 잠이 든 도영을 깨운 건 다급한 님프의 손길이었다. 도영이 무거운 눈을 뜨고 일어나자 님프가 세숫물을 들이밀고 중요한 손님이 기다리시니 어서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에 덩달아 다급해진 도영은 영문도 모른 채 씻고 향유까지 바르며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중요한 손님이라니 혹시 아버지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이는 건 한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창문을 열어 날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흰 셔츠를 입은 단단한 상체가 보였다. 저기, 도영이 조심스럽게 남자를 불렀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도영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저 미친 또라이 이제 불법 침입까지 해? 재현이 보조개를 예쁘게 만들어가며 도영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잘생기긴 드럽게 잘생겨서 짜증 날 지경이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님프들이 신났던데 너 때문이었구나?

 

 

"형, 늦잠 잤나 봐요."

 

 

얘는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야. 도영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웃음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재현이 신이나 도영을 덥석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갑작스럽게 끌어안아 진 도영의 몸이 굳어졌다. 저희 어제 처음 봤는데 왜 그러세요. 재현은 가만히 있는 도영에 껴안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더 세게 도영의 몸을 끌어안았다. 때마침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도영아, 아프로디테 아들이 여기, 말을 하며 들어오던 동현이 재현과 도영의 모습을 보더니 말을 멈췄다. 갈 곳을 잃은 눈이 바닥을 보더니 몸을 돌려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내 아내의 애인을 본 듯한 슬픈 심정의 표정으로 뛰쳐나간 동현이었다. 굳어있던 도영이 그제서야 몸을 움직여 재현을 떼어냈다. 응접실 문을 열고 동현을 크게 불렀다. 오해야! 오해라고!!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사라진 동현을 찾으려 뛰어가는 도영 뒤로 님프들이 작게 웃었다. 가차 없이 자신을 떼어낸 도영에 섭섭했는지 재현이 입을 삐죽였다.

 

 

해명하는 도영의 옆에 재현이 서 있어 오해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왜 저한테 이러시냐며 재현을 신전 밖으로 내쫓고 나서야 동현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너 아프로디테 아들이랑 사겨?"

 

"안 사겨 어제 처음 봤거든?"

 

 

동현이 머뭇거리다 다시 물었다. 그럼..썸타? 아 어제 처음 봤다고 썸은 무슨 썸이야 도영이 아무리 말해도 믿어주지 않는 동현에 화를 냈다. 그제서야 동현이 믿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동현이 하려던 말을 도영에게 전했다. 너의 대학 문제는 병결 휴학처리 해 놨다. 군대는 면제가 될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고 사실 이야기 해준 것은 많았으나 도영의 귀에 들리는 것은 군대가 면제라는 이야기뿐이었다. 쓸데없이 사지가 멀쩡하게 태어나서 수능 등급도 1등급을 맞아본 적이 없는데 군대는 1급의 현역을 가게 생긴 도영에겐 좋은 소식이었다. 면제인 애들을 신의 아들이라 불린다는데 그게 사실이었다. 이 말의 시초가 여기서 나온 걸까?(아님) 신이 아들이 돼서 면제받을 줄을 꿈에도 몰랐는데. 도영이 신이나 방방 뛰었다. 동현이 기뻐하는 도영을 보곤 웃었다. 밝아 보여서 다행이네.

 

 

잔뜩 신이 난 도영이 신전 밖으로 나왔을 때 보이는 것은 아까의 근심, 걱정이었다. 재현이 신전의 기둥에 기대어 도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표정하게 있던 재현은 도영을 보자마자 금세 표정을 바꾸곤 싱글벙글 웃었다. 도영이 뒤를 돌아 다시 신전 안으로 돌아가려다 꼬르륵 울리는 뱃고동 소리에 별수 없이 연회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재현이 도영의 옆에 붙어 도영에게 잔뜩 치근덕거렸다. 어제는 흥분한 상태라 화가나 재현에게 와인을 뿌린 것이지만 오늘은 나름 정신이 멀쩡해서 어제처럼 재현에게 못되게 굴지는 못 할 것 같았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연회장이요."

 

"왜요?"

 

 

배고파서요. 도영의 단답에도 재현은 잘만 웃어댔다. 어제 정신 나간 말만 안 했어도 나름 착하게 굴 자신이 있는 도영이지만 재현의 얼굴을 마주하면 들리는 것만 같은 어제의 고백음성에 도영은 재현에게 차갑게 굴었다. 형은, 어떤 음식 좋아해요? 글쎄. 도영이 재현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훠궈? 훠궈인가? 도영이 바른대로 다 대답해주다가 이내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데 쟤는 왜 자꾸 존댓말 하지? 초면에 반말부터 시작했던 텐과 다른 태도에 도영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몇 살이신데. 저한테 존댓말 하시고 형이라고 그러세요?

 

 

"저, 형보다 한 살 어려요."

 

 

제 호구조사는 어떻게 한 건지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자신의 소문이야 이미 퍼질 때로 퍼져있는 마당에 숨겨봤자 어차피 알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저 그쪽한테 관심 많아요 분홍빛 오로라를 뿜으며 생글생글 보조개 예쁘게 접어가며 웃는 재현에 도영이 걸음을 멈추고 재현에게 말했다. 거절은 확실하게 하자 도영아.

 

 

"저기 혹시나 하고 말씀드리는 건데요. 전 남자한테 관심 없어요"

 

 

도영의 말에 재현이 깨달았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곤 머리를 굴리더니 도영에게 다시 질문했다. 그럼 여자가 더 좋으신 거예요? 재현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자니 뒤통수에서 땀이 삐질삐질 나는 것만 같았다. 으응. 그렇지.. 재현이 도영의 대답에 재현이 걱정하지 말라며 도영을 안심시켰다. 여자가 더 좋다니깐 뭔 걱정하지 말래 미친놈이. 여기 사람들 뇌 구조를 알 수가 없다. 걱정하지 말라는 재현은 도영을 더 불안하게 했다. 사람들 앞에서 한 공개 고백보다 더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정확하게도 도영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재현이 도영에게 잠시만 기다려보라 말하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나뭇잎이 그늘을 만들어주는 시원한 길이었는데 갑작스럽게 햇빛이 뜨거워졌다. 비너스의 탄생 그림처럼 햇살이 스포트라이트처럼 재현을 감싸 안았다. 도영이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아 여기가 신의 세계가 맞긴 하구나. 도영이 선글라스를 챙기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옛날에 신을 보면 눈이 멀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조금 시간이 지나 빛이 멎은 것 같아 도영이 감았던 눈을 떴다. 밝은 갈색의 풍성한 머리가 바람에 날리는 것이 보였다. 재현이 있던 자리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도영이 보기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도영이 자신을 바라보며 밝게 웃는 여자에 당황했다. 여자가 붉은 입술을 열고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네? 도영이 바보같이 되물었다. 이제 여잔데 어때요? 웃음 짓는 여자의 볼에 위치한 보조개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아, 미친

 

 

"재현니?"

 

 

성을 알 수 없어 성을 빼고 부른 것인데 여자의 볼이 붉어졌다. 이제 제 이름 불러주시는 거예요? 감동 어린 표정으로 재현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도영의 손을 붙잡았다. 도영이 그제야 제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재현이란 것을 눈치챘다. 데미갓이라더니 이제 변신도 할 수 있어? 기상천외한 일들이 하루아침에 벌어지니 이를 이해하려는 뇌에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았다. 부담스러워 재현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살살 빼내었다. 욕이라도 뱉고 싶은데 자신을 마주한 얼굴이 너무나도 티 없이 맑은 사람의 얼굴이라 차마 욕을 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냥 남자인 얼굴을 마주 보는 게 더 편한 것 같았다. 도영이 마른세수했다.

 

 

"그냥, 원래대로 돌아와 줄래?"

 

재현은 다행히도 도영의 말을 잘 들었다. 다시 빛이 쏟아져 도영이 아예 등을 돌렸다. 남자로 돌아온 재현을 도영이 힐끔 쳐다보곤 다시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여자보다는 남자인 재현이 편했다. 이제 이틀 본 사이인데도 벌써 질리는 것 같았다. 역시나 자신을 졸졸 쫓아오는 재현에 도영이 한숨을 쉬었다. 재현은 도영에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가 좋은 거냐며 감동 받았다고 쉴 새 없이 쫑알거렸다. 병신에게 먹이 금지라고, 저런 애들은 무시가 답이다. 관심을 주면 안 된다. 재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데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겼다. 야. 네?

 

 

"나도 여자로 변할 수 있어?"

 

"네, 근데.."

 

 

근데 뭐? 도영의 물음에 재현이 머뭇거렸다. 혹시 무슨 제약이 있나? 아직 이곳 세계를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 도영인지라 모르는 것이 많았다. 뭐를 바치거나 뭐 기도를 열심히 드려야 하나? 재현의 망설이는 입술에 도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재현이 도영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전 있는 그대로의 형이 좋아요. 도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너 정말 불도저같이 플러팅하는구나. 쯧쯧 혀를 찼다.

 

 

"야, 너 우리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된 거 알지? 근데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냐"

 

"사랑에 시간이나 이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도영에게 대답하는 재현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그래 네가 아프로디테의 아들이 맞구나. 이름 값하는 사랑과 미모의 여신에 아들이었다. 첫날부터 결혼하자며 들이대고 와인이 자신의 몸에 뿌려졌는데도 꿋꿋이 계속 사랑을 고하는 사람에게 뭘 기대하고 물은 건지. 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다고 자기가 좋다는데 어떻게 말릴 수도 없고 도영이 말을 잃었다.

 

재현이 하는 말을 무시하며 걸으니 연회장엔 금방 도착했다. 연회장에 몰려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도영과 재현을 보기 시작했다. 수군거릴 얘기가 늘었으니 알만했다. 음식을 받는 줄에 서서 뒤를 돌아보니 재현이 어딜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친구를 찾아 같이 먹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네 밥은 따로 먹을 수 있어서. 음식을 받고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어제와 같은 음식을 포크로 찍어 한참 들여다봤다. 맨정신에 이걸 먹을 수 있을까. 결국 도영이 잔을 들어 포도주를 채웠다. 한 모금을 마시는데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재현이 자신의 앞에 있었다. 낮부터 술 먹는 거예요? 도영이 놀란 나머지 사레가 들려 기침을 시작했다. 재현이 건넨 티슈로 입을 막고 고개를 틀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도 아니고 예고 좀 하고 나타나면 좋겠는데 재현은 도깨비 감투를 쓴 것 마냥 안 보이다 불쑥 나타났다.

 

 

"괜찮아요?"

 

 

재현의 말에 손사래를 치고 기침을 참았다. 두어 번 더 기침하니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겨우 기침 몇 번으로 눈에 눈물이 고였다. 도영이 제발 인기척 좀 내고 다니라며 재현을 타박했다. 재현이 입을 삐쭉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도영이 다시 접시로 눈길을 돌렸다. 그제서야 재현이 들고 온 접시에 메뉴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너는 메뉴가 달라?"

 

"저는 이걸로 주문했으니까요"

 

주문할 수 있는 거였어? 도영이 잡은 포크를 쥐고 부르르 떨었다. 근데 왜 아무도 안 알려줬지? 어쩐지 나눠주시는 분들 표정이 신기하다는 표정이더라. 어이없어하는 도영의 표정을 보던 재현이 자신의 접시와 도영의 접시를 바꾸어 주었다. 제꺼 드세요. 제가 형 꺼 먹을게요. 아니야, 다시 달라고 하면 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도영을 재현이 붙잡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올망한 눈에 도영이 결국 자리에 앉았다. 굳이 도영은 자신에게로 오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도영이 날름 재현이 건네준 접시에 있는 작은 파프리카를 포크로 찍어 입에 쏙 넣었다. 오물거리는 입에 재현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맛있어요? 어, 응 누가 보면 지가 만들 줄 알겠어. 뿌듯한 표정을 짓는 재현을 외면한 채 입에 음식을 욱여넣었다. 오랜만에 먹는 채소에 입안이 산뜻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네. 기분이 제법 좋아졌다. 오랜만에 먹는 다른 음식 때문인지 뭔지 도영은 알 수 없었다.

 

 

"형 먹는 거 진짜 귀엽다. 저랑 결혼해요."

 

 

도영이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데자뷰에 와인 잔에 든 와인을 자기도 모르게 재현에게 뿌렸다.

 

 

 

 

...

 

 

이곳의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인지 바깥 세상의 꿈을 꿨다. 이곳에 오기 전 바깥세상의 초등학교를 다니는 1학년 김도영. 태권도 학원을 마치고 떡꼬치 소스를 입에 묻혀가며 먹고 있으니 비명 소리가 들렸다. 조그마한 남자아이가 봉고차 문에 매달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봉고차가 음냠냠, 다 먹어버리겠다며 남자아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하는 목소리가 다급했다. 8살 노란 띠 김도영. 흰 띠에서 막 노란 띠로 업그레이드된 상태인지라 악당을 물리칠 수 있는 묘한 자신감에 휩싸였다. 8살 자신이 떡꼬치를 내던지고 남자아이를 구하러 뛰어갔다. 꿈이라 그런 것인지 도영이 남자아이를 감싸 안고 주먹을 휘두르니 봉고차가 소리를 지르고 두고 보자 하며 사라졌다. 기세등등해진 도영이 남자아이에 얼굴을 들여다보고 괜차나? 하고 빠진 앞니를 숨겨가며 묻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참, 기상천외하고 어이가 없는 꿈이었다. 다만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이 재현이라서 도영은 비명을 질렀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못 하고 도영은 비몽사몽 하게 재현을 더듬었다. 형, 저 좀 흥분되려고 그래요. 하며 발그레해진 재현에 도영이 급하게 손을 뗐다. 재현의 정신 나간 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 도영의 외침에 재현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밖에서 기다리니깐 들어와서 기다리라던데요? 도영이 쓸데없이 친절한 신전의 님프들을 떠올리곤 마른세수를 했다. 어제도 그 난리를 쳤으면 들여보내질 말았어야지요... 도영이 님프에게 화살을 돌렸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해 마다하지 않는 님프들인지라 아름다운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재현에게 친절한 것이 당연했다. 도영이 마른세수하며 재현을 타박했다. 차라리 사람들이 날 보고 수군거릴 때가 좋았지. 도영은 제 앞에서 알짱거리며 말을 거는 재현을 보며 생각했다.

 

 

다음부터는 기다려도 밖에서 기다려. 내 방까지 들어오진 말고. 잠이 덜 깨서 웅얼거리는 도영의 말에도 재현은 귀를 기울였다. 알았다며 맑게 웃는 재현에게 차마 욕을 뱉진 못했다. 너는 연속으로 와인을 뒤집어쓰고도 나를 쫓아다니고 싶니. 그래 사람이 밝아서 좋다. 밝아서. 능글거리는 재현의 페이스에 자꾸 말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벗어나는 게 조금 힘들었다. 도영이 이제 방에서 나가자며 재현의 등을 두드렸다. 문 앞에서 님프가 건네는 물 한잔을 마시고 눈을 비볐다.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눈곱의 존재에 도영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뒤늦게 자신이 세수도 하지 않고 재현을 마주했다는 걸 깨달았다. 도영이 재현을 두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남겨진 님프와 재현이 뛰어가는 도영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세수를 마치고 쭈뼛쭈뼛 도영이 느리게 걸어왔다. 세수를 하고 나니 드디어 잠이 좀 깨는 것 같았다. 도영을 발견한 재현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늘 온 이유는 뭐야?"

 

 

도영이 재현에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재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아침이나 먹을까 해서요. 그럼 전날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 갑자기 오지 말고? 도영이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혹시 제가 사는 이 신전이 아침에 문을 여는 해장국집인가요?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인지 예의범절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프로디테 님 애를 어떻게 키운 건가요? 도영이 막힌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고개를 다시 내리는 보이는 재현의 얼굴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새삼 보이는 오똑한 코와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은 입술이 두드러졌다. 오냐오냐 키울 만하군요. 도영이 자신도 모르게 수긍해버렸다.

 

 

"어젯밤에 디오니소스 님께 신전에 방문해도 되는지 물으려고 기도드리니깐 그러라고 신탁이 내려왔거든요"

 

 

아버지의 허락 소식을 왜 남의 집 아들에 입에서 들어야 하는지. 우리 집은 예나 지금이나 소통이 부족해서 문제다. 이곳에 와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버지의 존재가 갑자기 떠올라 도영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어두워진 도영의 얼굴에 재현이 안절부절못했다. 혹시 자신이 말실수했는지 더듬어보는 재현이었다. 혹시 제가 말실수라도? 재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말실수는 어저께 결혼하자고 한 것부터가 문제였는데 인제 와서 말실수를 묻는 것도 퍽 어이가 없었다.

 

 

"아냐 아냐 됐어. 야 근데 너는 와인을 그렇게 맞았는데도 날 계속 쫓아다니고 싶냐?"

 

 

도영의 말에 재현이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듯 웃어넘겼다. 옷이야 빨면 되고 몸이야 씻으면 되죠. 도영이 할말을 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먹으러 왔다면서 밥 먹으면 바로 가야 해 알겠지? 재현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허허 웃었다. 도영이 가늘게 눈을 뜨고 대답을 재촉했지만, 재현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안 가겠다는 거야 뭐야. 밥을 먹으면서도 자신을 쳐다보는 재현에 체할 것 같아 결국 도영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재현에게 말했다.

 

 

"밥 먹으러 왔으면 밥 먹자 재현아. 체할 것 같아 "

 

 

아 죄송해요. 재현이 보조개를 만들어가며 웃었다. 헤실헤실 웃는 게 붉게 올라온 홍조 때문인지 아기 복숭아 같았다. 저희 이렇게 같이 아침 먹으니깐 신혼부부 같지 않아요?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도영이 사레가 걸려 콜록 걸렸다. 신호라도 주고 말할 것이지 갑작스러운 플러팅에 조만간 혈압이 올라 쓰러지지 않을까 싶다. 도영이 냅킨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렸다. 기침이 잘 멈추지 않았다. 재현이 걱정됐는지 도영의 옆에 쪼그려 앉아 괜찮냐고 물었다. 안 괜찮아 그리고 애초에 너 때문이잖아. 화를 내고 싶지만, 기침 때문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기침은 멎어 들었다. 도영이 괜찮아지는 것을 본 재현이 다행이라며 해맑게 웃었다. 너는 화병은 안 걸릴 성격이다. 그치? 도영의 표정에서 살짝 화가 드러나자 재현이 눈치껏 자리에 가서 앉았다. 밥을 다 먹고 이제 치워지는 접시에 도영이 드디어 재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워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갑작스럽게 제 눈앞에 세팅되는 디저트에 도영이 말을 잃었다. 님프님들 원래 저한테 디저트 같은 거 안 주셨잖아요? 도영의 원망 어린 눈빛을 님프들이 애써 외면했다.

 

 

 

"와, 맛있다."

 

 

그러게 맛있네. 이 맛있는 걸 왜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까. 제집 마냥 커피를 리필 받는 재현에 도영이 눈알을 굴렸다. 아마 이 신전이 디오니소스의 신전이 아니고 아프로디테의 신전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꿈을 꿨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재현은 도영에게 쉴 새 없이 작업을 걸었다. 너는 얼굴 아니었으면 진짜 나랑 경찰서 갔다. 구린 멘트도 소화하는 얼굴이라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진작 어디 쓰레기통에 처박혔을 재현이었다. 모든 걸 뚫는 창처럼 재현은 도영에게 작업 걸기 바빴고 모든 걸 막아내는 방패처럼 도영은 튕겨내기 바빴다. 그 둘을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님프였다. 오랜만에 펼쳐지는 재미난 광경에 님프들이 도영 몰래 웃었다.

 

 

 

 

 

 ...

 

 

 

 

 

재현은 도영을 보자마자 신이나 말을 걸었다. 재현의 등 뒤로 붕붕 돌아가는 강아지 꼬리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재현이 자신을 쫓아다닌 지 벌써 이주나 지났다. 도대체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알고 이렇게 찾아오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텐과 같이 음식을 먹거나 산책을 하고 있어도 재현은 도영 앞에 ‘짠’하고 나타났다. 그때마다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텐은 좋은 시간 보내라며 사라졌다. 이 불도저 사랑꾼이 나름 도영은 적응이 된 건지 이제 재현의 불꽃 같은 플러팅도 쿨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힐끔힐끔 자신들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도영이 보이는 눈들에 욱한 마음에 튀어나올 뻔한 욕을 간신히 억누르고 조심조심 말했다.

 

 

"이러는 거 좀 불편하니깐 좀 떨어져서 걷자."

 

 

도영의 말에 재현이 두 걸음 떨어져 도영을 따라 걸었다. 이렇게 걸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도영은 알았다. 도영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재현이 도영의 뒤에서 말을 걸었다. 뒤통수에 눈이 달리진 않았지만 웃고 있는 재현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따 같이 호수에서 수영할래요? 3월에 수영이라니 날이 이렇게 추운데. 이렇게 추운데? 추운 적이 있었나 여기? 재현의 말에 문뜩 이상함을 느끼곤 재현을 돌아봤다. 갑자기 돌아 자신을 쳐다보며 다가오는 도영에 재현이 눈을 피했다. 귓가가 데일 듯이 뜨거워졌다.

 

 

"여기, 3월이 맞아?"

 

도영의 말에 고개를 든 재현은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까만 눈동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흑요석 같은 새까만 눈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아 고개를 돌리면 바람에 날리는 까만 머리카락은 모든 빛을 머금은 것 같았고 그에  상반되는 보석처럼 빛나는 흰 피부에 얼굴을 붉혔다. 재현이 응? 하고 다시 물어오는 도영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3월 맞아요. 도영이 그 길고 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댔다. 정갈하게 잘 정리된 분홍빛 손톱이 붉은 입술을 매만질 때 재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원래 3월 날씨가 이렇게 따뜻했나?"

 

"여기는 원래 온화한 날씨예요. 데메테르가 평화를 내려서 그래요"

 

 

재현의 말에 도영이 눈을 굴렸다. 아. 어쩐지 계속 따뜻하더라 도영이 그제서야 집에서 챙겨온 두꺼운 자신의 옷과는 다른 님프들이 챙겨 입혀준 얇은 옷을 들여다봤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 자신인지라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신에게 이를 알려주는 사람이 재현이라는 것이 조금 신경 쓰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멈춰있는 도영을 보곤 재현이 작게 웃었다. 고민하는 도영은 그 모습을 알아채지 못했다.

 

 

"제가 호수 가는 길 알려 드릴게요 같이 가요"

 

 

고민하는 도영을 재현이 잡아 이끌었다. 길 알아둬서 나쁠 것 없지. 도영이 재현을 따라나섰다. 저번에 거의 끌고 가듯 알려준 화원도 겉으론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화원이 예뻐서 만족스러웠던 도영이었다. 재현은 여기서 오래 살아서인지 신기한 곳을 잘 알았다. 자꾸 자기에게 작업을 거는 것만 아니면 다른 것들은 다 괜찮은 재현이었다. 어느새 제 옆에 서서 나란히 걷는 재현에게 도영은 아무런 타박을 하지 않았다. 이러다 다시 작업을 걸면 자신이 하는 철벽에 다시 시무룩해져 뒤로 가는 재현이 나름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먹은 암브로시아? 섞은 타르트도 되게 맛있긴 했어."

 

"그래요? 그럼 저랑 나중에 또 먹으러 가요"

 

"음..싫어"

 

 

지금처럼 시무룩해지는 재현이 웃겼다. 도영이 손뼉를 치며 크게 웃었다. 그래, 먹으러 가자. 자신의 말에 다시 밝아지는 표정을 차마 크게 내칠 수 없었다. 언제까지 자신을 좋아할지가 의문이지만 나름 적응을 하니 놀리는 것도 재밌었다. 재현이 안내하는 대로 향하니 물 냄새와 함께 물소리가 들렸다. 멀리서부터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호수가 보였다. 기대감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도영이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를 보며 감탄을 했다. 파란 하늘과 호수가 이어져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신이 난 도영의 표정을 보고 재현이 웃었다. 되게 예쁘네. 도영이 쭈그리고 앉아서 호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호수라고 해서 탁할 줄 알았는데 물이 맑아 바닥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한쪽 신발을 벗고 슬며시 발끝을 담갔다. 차가운 물이 도영의 발가락 사이사이를 휘감았다.

 

 

"배 타볼래요?"

 

 

재현이 호숫가에 있는 나무배를 가리켰다. 도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재현은 호수 가에 있는 배를 끌어다 호수로 띄었다. 물살에 계속 움직이는 배에 도영이 살짝 겁에 질려 타길 망설였다. 재현이 신발을 배에 던지곤 바지를 걷어붙였다. 첨벙첨벙 물에 들어가 도영이 타기 쉽게 배를 고정하곤 도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영이 침을 꿀꺽 삼키곤 재현의 손을 잡았다. 도영이 무사히 타는 걸 확인하곤 재현이 배에 올랐다. 노를 저으니 배는 금방 호수의 중앙에 도착했다. 중간에 살짝 무서워하는 도영을 놀리려고 재현이 배를 일부러 흔드는 헤프닝도 있었으나 도영의 원성에 이는 금방 중단됐다. 호수 한가운데 있으니 바람이 시원했다. 호수가 출렁이는 물살에 맞춰 흔들렸다. 도영이 허리를 숙여 호수를 내려다봤다. 물이 맑아 물고기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도영이 손을 내밀어 물을 매만졌다.

 

 

"여기 물 되게 맑다."

 

"그쵸? 맑아서 안 깊어 보이는데 여기 되게 깊어요"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물고기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에 닿아오는 물이 시원해 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재현이 웃는 도영을 보며 안심했다. 좋아해서 다행이다. 첨벙거리며 손을 물에 담그고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손등에 걸쳐있던 팔찌가 쑥하고 빠져나갔다. 도영이 잡을 새도 없이 팔찌는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물이 어찌나 깊은지 팔찌가 바닥에 닿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팔찌가 돌 틈에서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도영과 재현이 놀라 서로 눈을 맞췄다. 헐 어떡해. 저거 엄마가 준 건데. 도영이 울상을 지었다. 재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호수로 뛰어들었다. 달라진 무게중심에 배가 기우뚱거리다 다시 중심을 잡았다. 도영이 놀라 호수를 들여다봤다. 재현이 호수 바닥으로 잠수하고 있었다. 투명한 물속에서 재현이 헤엄치는 것이 보였다. 갈색의 머리카락이 물속에서 흩날렸다. 팔찌를 발견한 것인지 무언가를 줍는 시늉을 하곤 재현은 금방 수면 위로 올라왔다. 푸하고 물을 뱉은 재현이 팔을 휘저으며 배 쪽으로 다가왔다. 뽀송뽀송하던 머리가 젖어 있었다. 가까워진 재현에 도영이 손을 뻗었다. 재현이 도영이 내민 손에 갸우뚱하더니 이내 아! 하고 팔찌를 건넸다.

 

 

"아니 팔찌 말고 너 잡으라고!"

 

 

속 터져 뒤지겠네. 재현이 도영의 손을 잡으려다가 이내 주춤했다. 형, 저 손 축축한데. 아 잡으라고 도영이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재현이 도영의 손을 잡았다. 메말라 있던 조각배가 축축하게 젖은 재현 때문에 짙은 색으로 변했다. 재현이 자리에 앉고 환하게 웃으며 도영에게 팔찌를 내밀었다. 아무리 엄마가 준 팔찌라고 해도 방금까지 깊다고 말한 호수에 뛰어들어 찾아올 만큼 소중한 건 아니었다. 가져와도 자신이 가져와야 할 것을 잠수해가면서 가져오는 재현을 보니 고마운 마음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걱정되기도 했고. 이게 진짜 누가 팔찌 주워달라고 했나 깜짝 놀랐잖아! 도영의 말에 재현이 시무룩해졌다. 목욕하고 나온 강아지처럼 추욱 늘어져서 자신의 눈치를 보는 재현에 도영이 팔짱을 풀었다.

 

"고마워 그런데 이렇게 안 해줘도 됐어. 괜찮아. 방금 화내서 미안해"

 

"그리고 걱정돼서 화낸 거야."

 

 

재현이 도영의 말에 환하게 웃었다. 머리에서부터 흐르는 물이 턱선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하얀 셔츠가 젖어서 재현의 몸에 달라붙었다. 드러난 몸의 윤곽이 도영이 고등학교 시절 본 미술 교과서에 나온 조각품 같았다. 괜스레 민망해진 도영이 걸치고 있던 로브를 건넸다. 감기 걸리니깐 덮고 있어. 로브가 젖는다며 한사코 거절하던 재현은 결코 도영을 이길 수 없었다. 재현이 다시 노를 저었다. 민망하고 미안한 나머지 도영이 쉴 새 없이 입을 쫑알거렸다. 팔찌에 대한 얘기부터 옛날에 수영을 배웠던 얘기까지. 도영이 물가를 머금어 색이 짙어진 바닥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재현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끔 재현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잊을 때가 있었다. 도영이 급하게 고개를 돌려 다시 호수를 바라봤다. 팔찌를 끼지 않은 손으로 다시 물에 손을 뻗었다. 물이 투명해서 도영의 얼굴이 비쳐서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됐다. 붉어진 얼굴을 보게 된다면 내가 나한테 오해할지도 모르니깐. 육지에 도착한 배에 마지막까지 먼저 내려 도영에게 손을 내미는 재현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잘해줘? 머릿속을 생각한 말이 입으로 같이 터져 나왔다. 아차 싶었지만 때는 이미 입에서는 말이 나온 상태였다.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줘..?"

 

 

마주한 재현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곤 재현이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얼굴에 다가오는 손에 도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에 드는 의문을 뚫고 들어온 건 아주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좋아하니까요."

 

 

재현이 바람에 날리는 도영의 머리를 정리했다.

 

재현이 걷는 자리마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죄책감 때문인지 아까의 물음에 대한 대답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평소엔 도영을 쫓아다니는 것이 재현이었는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에취하고 기침을 하는 재현에 도영이 안절부절못해서 재현에게 계속 물었다. 재현나 괜찬나?? 진짜 괜찬나? 재현이 자신을 보며 불안한지 오물거리는 입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잘했다 정재현. 물에 들어가기 잘했다. 오물거리는 니은 발음에 도영이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모르는지 도영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 수건을 찾아 헤맸다.

 

 

 

물에 홀딱 젖어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오는 재현을 보곤 동혁이 의심 어린 표정으로 도영을 쳐다봤다. 형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이번엔 와인 안 뿌리고 물에 빠트린 거예요? 동혁의 놀림에 도영이 열이 받아 동혁을 잡으려 뛰었다. 사람은 죽이면 안 되죠. 혀를 내밀고 도망치는 동혁을 도영이 쫓아갔다. 매번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는 동혁은 태일이 소개해준 동생이었다. 헤르메스의 아들이라는 동혁은 꾀가 많고 말재주도 좋았지만 우선 장난이 많았다. 처음엔 낯을 가리더니 나중엔 쉴 새 없이 장난을 쳤다. 지금처럼.

 

 

동혁을 쫓아서 옆구리를 찌르는 도영을 보고 재현이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쟈니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재현에게 수건을 건넸다. 넌 저게 부럽냐?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참 대단한 사랑이다.

 

 

 

 

 

...

 

 

 

 

 

재현이 훈련이 있는 날에는 꼭 재현은 도영의 얼굴을 보러 신전에 왔다. 대부분 늦잠을 자서 도영을 볼 수 없지만, 가끔 도영이 일찍 눈을 뜬 날에는 인사를 하고 훈련에 늦었다며 뛰어나갔다. 도영을 보는 날이면 재현의 시선은 도영에게서 떨어질 틈이 없었다. 뚫어져라 보는 시선에 도영이 뭘 그렇게 쳐다보냐고 물으면 재현은 한 순간이라도 더 많이 담아두려고 그런다고 말했다. 그때마다 도영은 재현이 자신의 마음속에 똑똑 노크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은 귀를 틀어막고 애써 무시하는 중이고.

 

정재현을 찾고 싶다면 우선 김도영이 있는 곳에 가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재현은 도영의 주위를 맴돌았다. 처음에는 그러지 좀 말라며 말렸지만, 고집은 드럽게 세서 쥐뿔도 들어먹지 않는 재현인지라 도통 도영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애초에 도영의 계속되는 거절에도 꿋꿋이 고백을 하는 재현인데 바랄 걸 바라야 했다. 중간중간 훈련 쉬는 시간엔 어떻게 자신을 찾아오는 것인지 초코렛 몇 개씩을 쥐여주곤 사라졌다. 오늘은 자신이 없다고 심심해하지 말라며 달달한 것이라도 먹으며 참으라는 재현의 말에 반박할 것투성이였지만 도영은 그냥 금색 포장지를 까서 입에 넣을 뿐이었다. 재현과의 대화가 자꾸 이어지는 게 자꾸 말려드는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이 모든 걸 튕겨내는 방패인 줄 알았는데 날카로운 창에 자꾸 흠집이 나고 있었다. 옆에 있는 동혁이 자기도 하나만 달라며 재현을 보챘다. 재현이 빈 주머니를 보여주며 실실 웃었다. 재현이 초코릿을 입에 넣는 도영을 확인하고 웃으며 뒤돌아갔다. 재현과 같이 온 마크가 재현에게 묻는 게 들렸다

 

 

"오웅, 형 도영이 형이랑 사겨요?"

 

"아니 그냥 내가 좋아해"

 

 

도영이 우물거리는 입을 멈췄다. 주머니에 가득한 초코렛이 만져졌다. 초코렛이 달았다.

 

 

 

 

...

 

 

 

 

신전에 오니 적응 기간이 다 끝나 이제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는 님프의 말에 도영이 울상을 지었다. 아직 적응 다 못한 것 같은데 궁시렁거리는 도영에게 훈련복을 건네며 내일 아침에 갈아입으라 말했다. 징징거리며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아침부터 님프들이 분주하게 도영을 깨웠다. 오늘부터 훈련이라도 했던 말이 생각이나 더더욱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서 절대 내려오지 않는 도영에게 훈련복을 쥐여주고 옷 방으로 밀어 넣은 님프들이었다. 도영이 울며 겨자 먹기로 옷을 갈아입었다. 학교 체육 시간에도 벤치에 앉아 하늘만 보던 도영인지라 몸을 움직일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왜 이런 의미 없는 땀 흘리기를 해야 하는지 도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훈련복은 다 통일된 건지 텐과 쿤이 입었던 것과 같았다. 옷을 입고 나오니 기다리는 손님이 있다는 님프의 말에 도영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게 밖에서 기다리라니깐. 재현을 내쫓을 생각으로 팔을 걷어붙이며 들어간 응접실에는 다행스럽게도 텐과 쿤이 앉아있었다.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하는 텐과 쿤에 도영이 빠르게 달려가 물었다. 훈련이 많이 어렵냐, 힘들지 않냐. 땀이 나는 거 아니냐. 도영의 물음에 텐과 쿤이 잠시 눈을 맞추곤 이내 크게 오버하여 도영에게 겁을 주었다. 그에 도영의 안색이 점점 파리해졌다. 도영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곧 죽을 표정으로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텐과 쿤이 도영을 데리고 훈련장에 가면서 도영을 살살 달랬다. 장난이었다고 뒤늦게 변명했지만 땀에 쩔은 체 자신에게 초콜렛을 건네던 재현이 떠올려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걔 엄청 힘들어 보이던데.

 

 

도착한 훈련장엔 제법 아는 얼굴이 있었다. 자신과 얘기했던 태용과 태일, 그 외로는 재현과 같이 있는 걸 본 몇 명 정도 그리고 재현뿐이었다. 자신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재현에 도영이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해줬다. 재현이 쪼르르 도영의 앞에 섰다. 무슨 커피숍 도장찍 듯 너도 꼭 얼굴도장을 찍는구나. 열 번은 충분히 넘었는데도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재현의 옆으로 태용이 인사했다. 안녕! 여기 사람들은 다 티 없이 맑나? 밝게 인사하는 태용에 유교맨 도영이 허릴 숙여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쪼르르 도영에게 인사하는 사람들이 다 하나같이 익숙한 얼굴이었다. 재현의 친구들. 모두 한 번씩 초코렛을 쥐여주려 온 재현의 옆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재현이 도영에게 주변인들을 소개해주었다. 기분이 묘했다. 왠지 남자친구의 지인을 처음 소개받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상견례 하는 것 같네. 도영이 피부에 닿아오는 어색한 분위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자신이 한 생각에 살짝 현타가 몰려왔다. 왜 이딴 생각을 하는 거지 내가? 자꾸 재현에게 말리는 것 같았다. 도영이 이건 그냥 친구를 새로 사귀는 거라는 자가 최면을 걸고 애써 웃으며 인사했다.

 

 

첫날부터 검을 쥐여주고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니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검은 왜 또 금속으로 만든 건지 무거워서 들고 있기도 버거운데 이걸 쥐고 흔들기까지 하니 수명이 깎기는 것 같았다. 도영이 휘두르는 검으론 남을 베는 것보다 무거워서 대가리를 내려 찍힐 것 같았다. 그리고 나름 훈련 한 번 안 받아본 초심자인데 훈련단장은 자비가 없었다. 이런 강도의 운동을 나에게 시키다니. 도영은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 이게 눈물인지 땀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옆에 있는 텐도 그 얇은 팔로 검을 들어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이를 악물고 하는 게 보여 도영은 뺀질거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군대 안 간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훈련을 여기서 몇십 년 동안 받게 생겼네. 땀이 뚝뚝 떨어지고 나서야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도영이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옆에 동혁이 부실 체력이라며 도영을 놀렸다. 받아칠 힘도 없어서 도영이 그냥 동혁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동혁이 무겁다며 투덜거렸지만, 도영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가만히 있으니 바람에 날려서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와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맛에 삼림욕 하는구나. 이 십 년 만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도영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그늘이 졌다. 도영이 감았던 눈을 떴다. 역광 때문에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도영이 눈을 끔벅끔벅 떴다. 서 있던 사람이 쭈그리고 도영의 앞에 앉았다. 재현이었다.

 

 

"힘들죠?"

 

 

건네는 수건에 도영이 일어나서 땀을 닦았다. 고마워 동혁이 못 견디겠다는 듯 자리에서 떠났다.

 

 

"이거 언제까지 해?"

 

 

훈련한 지 두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칭얼거리는 도영이었다. 재현이 도영을 달랬다. 일주일만 참아요. 이러다 살 빠질 것 같았다. 이 강도의 운동이면 아마 저녁쯤엔 쓰러져서 들것에 실려 나갈지 않을까 생각했다. 두런두런 재현과 이야기를 하니 쉬는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짧은 쉬는 시간인데도 이 사이에 어떻게 자신을 찾아온 건지 재현이 신기했다. 훈련을 다시 시작한다는 말에 도영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 모습을 보던 재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건넸다. 재현의 손을 당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영의 손보다 큰 재현의 손은 검을 쥐는 손이라 그런지 굳은살이 박혀 살짝 딱딱했지만 나름 부드럽고 따뜻했다.

 

 

*

 

 

 

왜 다른 님프들이 안 떠줘? 도영의 말에 동혁이 권력욕에 찌들었다며 놀렸다. 도영이 동혁의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동혁과 투닥버리리는 도영을 두고 태일이 앞치마를 건넸다. 비상시에는 님프들도 비상상황이니깐 우리가 일하는 거지. 도영이 건네는 앞치마를 둘렀다. 점심시간이라는 말에 쉬려고 앉는 도영을 일으켜 세운 건 태용이었다. 배식 담당으로 정해졌다며 미안하다고 전하는 태용의 눈에 죄책감이 가득해서 차마 원망 어린 눈으로 볼 수 없었다. 한 번도 배식 같은 건 해본 적 없는데 군대 취사병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기를 퍼서 접시에 담아 주었다. 도영의 앞으로 유타와 같은 어색한 사이가 올 때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을 피했다. 많, 많이 드세요.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어색함 참기 챌런지를 하는 것만 같았다. 슬슬 팔이 아파질 지경에 왔을 때 재현이 도영의 앞에 섰다.

 

 

"형, 절 사랑하는 만큼 주세요"

 

 

도영이 양념된 고기에서 소스만 떠 재현에 접시에 부었다. 재현이 울먹울먹한 눈으로 도영을 쳐다봤다. 혀엉하고 부르는 재현에 외침에는 묘하게 섭섭함이 섞여 있었다. 그에 그 눈빛을 이기지 못한 도영이 결국 유타에게 떠준 만큼 고기를 퍼 재현에 접시에 올렸다. 다시 밝아지는 재현의 표정에 도영이 빨리 넘어가라며 고갯짓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재현과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었다. 접시를 들고 힐끔힐끔 도영의 옆에 앉을 기회를 넘보는 재현을 보고 도영이 오지 말라며 손을 휘저었다. 그 모습을 보던 동혁이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밥 먹고 바로 운동하면 안 좋은데. 도영이 머릿속에 둥실 떠다니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점심을 먹자마자 훈련은 계속 됐다. 중간중간 주저앉아 쉬는 도영을 단장을 못 본 넘어가 주었다. 오후 훈련은 팀으로 나누어서 하는 건지 재현과 그 무리가 보이지 않았다. 도영이 안 보는 척 재현을 신경 쓰고 있었다. 같이 훈련을 하는 정우는 성격이 좋았다. 밝고 웃는 게 꽤 귀여웠다. 동생을 예뻐라하는 도영인지라 애교부리며 치대는 정우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정우가 중간중간 치는 개그가 자신의 스타일이기도 했고. 호수를 따라 달리면서 정우와 이야기를 하는데 정우가 도영에게 물었다.

 

 

"형, 그러면 재현이 형이랑은 언제부터 사겼어요?"

 

 

정우의 물음이 당황스러웠다. 안,안사겨! 정우가 그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진짜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달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정우를 쳐다봤다. 시끄럽다고 하려 했던 기사단장도 솔직히 궁금했는지 도영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도영이 횡설수설 변명했다. 그러다가 진한 현타가 몰려왔다. 내가 왜 이걸 변명하고 있어야 하지...?

 

 

"우리 그냥...그냥.."

 

 

우린 무슨 사이지...? 도영이 생각에 빠졌다. 뭐지 진짜 무슨 사이지? 분명 정재현이 자기에게 매일 고백을 하는 건 맞지만 자신은 계속 거절하고 있었다. 진전은 없다고 생각하는데(본인은). 지금처럼 가까워진걸 보면 친한 것 같긴 한데. 도영이 대답 없이 멍하게 있자 정우가 되물었다. 그냥요?? 도영이 정신을 차렸다. 그냥, 친한 형 동생 사이지. 도영이 억지로 하하 웃었다. 정우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성장기인지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예언의 힘이 제어가 안 됐다. 지금도 도영의 얼굴을 쳐다보니 도영의 미래가 펼쳐졌다. 정우에 머릿속에 입을 맞추는 재현과 도영이 스쳐지나갔다. 방금 내가 도영이 형 미래 본 거 같은데 친한 형, 동생 사이에도 키스를 하나? 내가 여기 캠프에 박혀 사는 동안 혹시 바깥세상에서 형, 동생의 정의가 바뀌었나? 도영의 대답이 5살 때부터 데미갓 캠프에서 산 정우에게 컬쳐 쇼크를 안겨줬다. 그날 정우는 아버지인 아폴론에게 기도드리며 물었다. 혹시 형동생 사이에 키스도 하고 연애도 하나요? 아폴론은 정우가 혹시 무슨 이상한 성인소설을 읽고 다니는지 걱정되어 요정들에게 묻고 다녔다.

 

하여튼 정우에게 충격을 준 발언 이후로 정우와 도영은 말이 없었다. 조그만 머리통으로 둘 다 열심히 각기 다른 고민을 하며 달렸다. 앞에서 도영의 이야기를 듣던 기사단장이 아무도 모르게 혀를 찼다. 세상 다 산 것처럼 혀를 차지만 사실 기사단장은 도영보다 열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세월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아서 그렇지. 도영의 대답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선 둘 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한쪽이 너무 둔했다. 아니, 눈치는 빠른데 본인에겐 둔했다. 지금도 붉어지는 얼굴이 누가 봐도 재현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재현 고생 좀 하겠네. 도영의 붉어진 얼굴은 체력 훈련을 마치고 다시 훈련 집합장소로 모일 때쯤에서야 진정이 되었다.

 

해가 지고 훈련이 마무리되자 도영이 신이 났다. 이제 집에 간다는 생각에 도영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도영이 짐을 챙겨 들고 가뿐한 표정으로 모여 있는 무리에게 인사를 했다.

 

 

"도영, 어디가?"

 

 

신전으로 향하려는 도영을 텐이 잡았다. 응? 집에. 도영의 말에 텐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도영...이거 우리, 저기 천막에서 잘 거야. 아, 좆됐다. 도영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혹시 탈주할 수는 없는 건가. 도영을 기다리는 신전이 보고 싶었다. 아니야, 신전이 날 기다리고 있어. 도영의 말에 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상한 소리 말고 씻으러 가요 형. 동혁이 수건을 건넸다. 여기, 샤워실에 벌레 나와? 동혁이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괜찮다며 도영을 끌고 샤워실로 향했다. 느리적 걷는 도영의 뒷모습을 재현이 보고 있었다.

 

 

"너도 샤워실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태용이 말했다. 재현이 훈련 때문인지 뭔지 몸에 열이 올라 빨개졌다. 안돼.. 재현이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웅얼거려 들리지 않는 말에 유타가 뭐라고 했냐며 다시 물었다. 안 돼요, 그건 아직 마음에 준비가 안 됐어요. 지랄 났다. 진짜. 유타가 뭐 씹은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빨개진 건 엉큼한 생각을 해서였다. 재현이 애가 타서 샤워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마 재현의 눈에 레이저가 나왔다면 저 건물을 벌써 타 재가 되어버렸겠지. 도영은 아직 샤워하는 중인지 같이 들어갔었던 동혁이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머리를 털며 나왔다. 재현의 눈이 동혁을 향했다. 동혁이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을 눈치채고 씨익 웃었다. 놀릴 거리가 잔뜩 생겨 요즘 살맛이 나는 동혁이었다. 전 도영이 형이랑 샤워했는데 동혁이 재현을 골렸다. 나와 봐 동혁아. 기억을 지우러 가자 우리. 재현이 동혁을 끌고 나갈 심정으로 말했다. 사실 심정이 아니라 사실이지만. 재현이 목을 우드득 꺾으며 동혁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동혁이 그제서야 장난을 멈추고 후다닥 마크에 뒤로 숨었다. 이 형, 사랑에 미쳤네. 그 뒤로 축축한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나온 도영에 재현은 행동을 멈추고 수줍게 웃었다. 옆에서 유타가 우웩 토하는 시늉을 했다.

 

 

"머리는 어디서 말려??"

 

 

재현이 신이 나 손까지 들어가며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재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텐이 먼저 선수를 쳤기 때문이었다. 숙소가면 드라이기 있어 도영, 나랑 같은 숙소 쓰자. 텐이 도영의 어깨를 감싸고 시선을 돌렸다. 허망한 표정의 재현이 허공에 손을 뻗으며 굳어있었다. 그것까진 안 된다고 텐이 입 모양으로 재현을 향해 충고했다. 훈련 첫날부터 친구가 아다 따이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재현도 물론 좋은 동생이지만 도영도 역시 친한 친구였다. 재현의 사랑은 응원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첫날부터 덮칠 재현은 아닌 거 알아도 혹시 모르니까. 허리를 부여잡으며 훈련에 임하는 꼴은 못 보지, 지금도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정우도 신이 나서 도영과 텐을 따라갔다. 재현이 멀어지는 도영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

 

 

 

 

원래 강도 높은 운동을 하면 입맛이 없어진다고 도영이 접시 위에 놓인 양파를 포크로 쿡쿡 찔러대며 장난을 쳐댔다. 먹는 거로 장난치면 천벌 받는다며 태일이 야단을 쳤다. 하지만 천벌은 이미 훈련을 받으며 충분히 받은 거 같은 도영은 신경도 안 썼다. 옆에 앉은 내일 훈련에 대비해서 조금만 더 먹으라며 쿤이 입에 소세지를 넣어줬다.

 

 

"원래 처음부터 이렇게 힘들어?"

 

 

도영이 소세지를 오물거리며 식탁에 엎드렸다. 도영의 눈치를 보며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테이블에 말소리가 뚝 하고 끊어졌다. 왜 뭐가? 힘드냐니깐? 이상해진 분위기에 도영이 다시 허리를 고쳐세우고 일어나 대답을 채촉했다. 이것들 또 나만 빼고 수군거리려구. 서로를 쳐다보고 대답을 미루는 모습에 도영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점점 날카로워지는 도영의 눈빛에 태일이 입을 열었다.

 

 

아프로디테가 아레스보다는 촌수가 위야. 사실 이 정도 나이 먹었으면 나이가 중요치는 않지만 그래도 나이가 위이기도 하고 알잖아? 아레스과 아프로디테 관계. 도영의 머릿속으로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밀회를 나누다 헤파이토스가 만든 그물에 걸린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근데 그게 힘든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아, 쫌 들어봐요. 형. 동혁이 도영을 타박했다. 알았다며 도영이 궁시렁거렸다. 뭐. 그만큼 깊은 관계라는 거지. 근데 정재현이 누구겠어. 아프로디테의 아들이지. 그럼 네가 훈련에서 계속 정재현이랑 같은 조인지 답이 나오지 않아? 힌트는 데미갓들의 훈련을 담당하는 신은 아레스라는 거야. 태일의 말에 도영이 테이블에 대가리를 박고 앓는 소리를 냈다. 내가 무슨 깡으로 아레스한테 따질 수 있겠어. 정재현 이 마마보이 자식. 그걸 홀라당 엄마한테 가서 부탁을 해? 도영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리고 다른 신들보다 12신 자식들의 힘이 더 세서 훈련을 같이하는 거긴 하지만 너는 초보자여서 훈련에 적응할 때까지는 우리랑 굳이 같이할 필요 없었어. 말을 마친 태일이 과일을 더 가지러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재현이 있는 쪽을 노려봤다. 화가 난 표정에 도영을 보고 놀란 정우가 옆에서 쟈니와 이야기하던 재현을 쿡쿡 찔렀다.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재현에 정우가 도영을 가리켰다. 재현이 정우의 손끝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흠칫 놀랐다. 너 이따가 죽어. 도영이 입을 벙긋거리자 재현이 멋쩍게 웃었다. 도영이 새침하게 눈을 흘기고 고개를 돌렸다.

 

 

 

 

 

...

 

 

 

 

 

"야, 왜 이렇게 찔끔찔끔 줘 감질맛나게."

 

 

그래야 자주 가지러 오잖아요. 형이 재현이 방긋방긋 이쁘게 웃으며 도영에게 말했다. 도영의 뺨이 붉어졌다. 도영의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어버버 거리는 도영에 재현이 큰 손을 도영의 머리 위에 올렸다. 크고 부드럽지만 살짝 굳은살이 박인 손이 도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글동글 까만 콩 같은 도영의 머리가 재현의 손바닥에 착 감겨왔다. 재현이 지나치게 동공이 흔들리는 도영을 마주 보고 잔잔한 미소를 피우며 말했다. 많이 드세요 형. 도영의 얼굴이 접시에 올려진 체리보다도 빨개졌다. 평소 같으면 재현의 손을 내치고 소리를 지를 도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자신을 보는 재현의 눈빛이 참을 수 없이 달달해 질식할 것 같았다. 숨이 턱하고 막혀오는 기분이 들었다. 불현듯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쳤다. 얼굴이 빨개져 아무 말없이 자리에 앉는 도영에 텐이 저 멀리서 도영을 보며 웃는 재현과 도영을 번갈아 보고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옆자리에 동혁이 언제 받아줄 거냐며 도영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받아줄 생각 없거든?"

 

 

도영이 씩씩거리며 외쳤다. 쿤이 귀를 막고 혀를 찼다. 도영 너무 튕기기만 해도 재미없어. 쿤의 말에 도영이 포도 하나를 던졌다. 순발력 좋은 쿤이 낼름 받아먹고 혀를 내밀었다. 어휴 얄미워 도영이 수저로 스튜를 떠먹었다. 벌써 이 캠프 안에서 자신이 언제쯤 재현을 받아줄까 하는 내기를 하는 게 유행이라는 것쯤은 도영도 잘 알았다. 도영이 화가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잔을 들고 입에 대는 걸 막은 건 기사단장이었다. 잔을 빼앗은 기사단장은 훈련 중 음주는 금지라 말했다. 뱉은 말과 달리 기사단장은 도영이 들었던 잔을 흔들곤 한 모금 마시며 테이블을 떠났다. 음주도 못하는구나 이제. 도영이 허벅지를 주먹으로 팡팡 내려쳤다.

 

신화에서는 신께 기도하면 쫓아다니는 사람도 자신도 풀로 만들어 주던데. 생각을 마친 도영이 자세를 고쳐 잡고 무릎을 꿇었다. 두 손바닥을 붙이곤 눈을 감았다. 자신의 인생에 기도란 걸 하다니, 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 저는 빼고 정재현 좀 풀떼기로 만들어주세요. 기왕이면 잔디로요, 길가다 밟아버리게"

 

 

그 소원을 들은 디오니소스가 얼마나 웃었는지 도영은 모를 것이었다. 아무런 답이 없는 아버지에 도영이 금방 손을 내리고 다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뭐야, 안 들어주잖아. 신화 다 구라였어. 도영이 억울한 감정이 들어 이불을 쥐어뜯었다. 얼굴에 빛이 나는 만큼 따라다니는 사람도 많은 것 같은데 왜 자신을 못 붙잡아서 안달이 났는지. 정재현의 취향은 알 수가 없었다. 훈련 전에 수영하는 재현을 구경하는 데미갓들이 여럿, 아니 떼거지로 있었는데 그중 자신을 닮은 사람 하나 없을까 봐. 솔직히 다른 신이면 모르겠는데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라 더 부담스러운 것도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들이댔는데 다른 사람한테도 그랬겠지. 그 아프로디테의 아들인데.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 고백을 해대는 재현을 생각하자니 왜인지 모르게 조금 화가 나는 것만 같았다. 살짝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지금 이 생각을 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소리를 질렀다. 정재현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왜 질투를 하는지 현타가 몰려왔다. 소리 지르는 도영을 보고 도영의 숙소로 놀러 왔던 동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밖으로 나왔다.

 

 

 

 

...

 

 

 

 

 

집에서 쉬고 싶다. 훈련을 끝낸 후 씻고 들어온 도영이 침대에서 누워 크게 소리쳤다. 며칠째 고강도 운동을 하니 신전의 푹신한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고 싶었다. 훈련에 들어오니 피골이 상접해졌다. 정우가 한 손으로 도영의 허리를 감아도 남을 정도로 살이 빠졌다. 실제로 도영의 허리를 감고 히이익거리며 감탄할 때 질투심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재현을 발견하고 다시 히익거리며 비명을 지른 정우였다. 도영의 빠진 살을 안타까워하는 게 한두 명이 아니지만 그중 가장 가슴 아파하는 건 정재현이었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몰래 초코바 같은 간식거리 하나씩을 건네는 재현에 도영이 알게 모르게 감동을 받았다. 이곳에서 한 번도 볼 수 없던 인간세계의 음식이었다. 전쟁 통에도 살이 찐다는 다이젤까지 먹으니 좀 살 것 같았다. 그래도 한 사일 정도 훈련을 하니 나름 적응되는 것 같았다. 도영이 퉁퉁 부은 발바닥을 마사지하며 다이젤을 우물거렸다.

 

 

"아 이거 진짜 맛있다."

 

 

정우가 도영의 옆에 나란히 누워 같이 과자를 먹었다. 이거 재현이 형이 준거예요? 정우의 말에 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대박. 인간세계 과자는 구하기 힘든데? 헤르메스님한테 부탁해야 하는 거잖아요? 헤르메스의 아들인 동혁이 정우의 말에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해댔다. 거기서 우리 아빠가 왜 나와? 그렇게 동혁과 정우가 한참을 투닥거렸다. 언제부터 도영의 숙소가 아지트가 되었는지 한 침대에 두, 세 명씩은 누운 것 같다. 도영의 숙소를 들어오려는 재현을 연애는 아침에나 하라는 말과 함께 쿤이 웃으며 내쫓았다. 그 말에 당황한 게 도영이었다는 것이 흠이었다.

 

 

-부스럭

 

 

천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고 앉고 있던 매트리스가 움직이는 게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별로 친하지도 않은 윈윈이 무심한 표정으로 도영의 옆에 앉아있었다. 윈윈이 자연스럽게 초코렛 하나를 입에 넣고 도영을 바라봤다.

 

 

"도영이 형, 형 재현 형이랑 언제 결혼해요?"

 

 

자신에게 재현과의 사이를 묻는 게 도영과 친해지기 위해서 묻는 관문인 것 마냥 윈윈도 도영에게서 재현을 물었다. 도영이 크게 놀라 변명을 시작했다.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말부터 오해하지 말라는 말까지. 윈윈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도영의 대답을 하나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변명이 변명 같아야 변명이지. 말로는 아니라면서 서로를 보는 눈빛이 퍽 달달하니 믿을 사람은 하나 없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구애를 할 때 먹이를 바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재현이 도영에게 먹이를 바친 구애의 행위는 도영에게 꽤나 잘 먹혀들어 갔다.

 

 

"아쉽다, 결혼식 가면 주는 넥타르 케이크 진짜 맛있는데."

 

 

윈윈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겨우 그런 이유로 우리가 결혼해야겠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까짓 넥타르 케이크가 뭐라고 남은 인생을 정재현에게 가볍게 넘기다니. 차마 아직 친하지 않은 윈윈이라 심한 말은 못 하고 분노를 속으로 삼켰다. 와중에 동혁이 우리라고 했다..하며 정우와 꺅꺅거렸다. 가장 즐겨보는 드라마, 영화가 나이대별로 꽃남, 트와일라잇, 후아유, 키싱부스인 로맨스 광 동혁의 광대가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갔다. 요즘 아버지에게서 얻은 1TB 용량의 드라마, 영화보다 재밌는 게 재현 도영의 사랑 이야기였다. 2D짜리 모니터에서 보는 드라마보다 고화질에 두 눈 생생하게 보는 풀 HD의 삼차원 세계에서 펼쳐지는 현실이 동혁의 삶을 즐겁게 했다.

 

 

"야, 내 얘긴데 네가 왜 더 난리야"

 

 

괜히 민망해진 도영이 베개를 들고 동혁에게 집어 던졌다. 동혁이 베개를 잡아채곤 이제 좀 받아주라며 도영을 타박했다. 받아주긴 뭘 받아줘! 도영의 말에 단체로 야유하기 시작했다. 계속 그렇게 안 받아주면 재현이 형이 질려서 도망간다구요! 도영이 질려서 자신에게 플러팅을 안 하는 재현을 상상했다. 이제 아침에 신전에 안 달려오는 정재현. 가는 길목마다 안 나타나는 정재현. 쉬는 시간마다 물을 안 챙겨주는 정재현. 간식을 안 챙겨주는 정재현. 흠, 좋은 것도 같고 안 좋은 것도 같았다. 고민하는 도영의 표정이 퍽 진지해졌다. 주변인들은 자 마음을 자각 못 하는 도영이 조금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게 못내 웃기기도 했다, 도영의 눈썹이 진지해 차마 대놓고 웃을 수는 없었다.

 

재현은 충분히 좋은 동생이었다. 낯짝을 가리는 도영에 취향에 딱 맞기도 했고 착하기도 했다. 재현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게 뭔 상관이냐며 상담을 자처해줄 만큼 이제 친한 사이긴 했지만 나를 좋아한다는 거면 상황이 달라진다. 애초부터 재현과의 관계가 불순한 의도로 형성된 건 맞지만 그래도 나름 몇 주 동안 정이 들어서 내칠 수 없었다. 버릇처럼 내뱉는 재현의 고백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한 적은 없었다. 처음에야 와인이라도 뿌리고 달아났지만 어느 순간부터 당황스러움인지 뭔지 얼굴이 시뻘게지고 심장도 두근거려서 아무 말도 못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고백할 때마다 도망치는 도영을 보고 재현이 고백하는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도망치고 다시 재현을 만나면 어색했다. 그때마다 재현이 일부로 분위기를 풀어주려 노력한 것도 알고 있다. 점점 어두워지는 도영의 얼굴에 태일이 이제 들어가서 자자며 아이들을 내쫓았다. 동혁과 나머지가 못내 아쉬운 듯 힐끔거리며 숙소에서 나갔다. 도영의 고민은 텐이 도영을 억지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줄 때까지 계속됐다. 태일이 불을 끄곤 자리에 누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이 조용했다.

 

 

"있잖아,"

 

 

도영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재현이는 나를 왜 좋아하는 걸까?"

 

 

글쎄? 도영은 왜라고 생각해? 나는, 나는 잘 모르겠어. 도영의 말에 옆 침대에서 텐이 일어나 램프에 불을 켰다. 붉은 불빛이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도영이 멍하게 나무로 고정된 천막 천장을 보고 있었다. 도영의 옆자리인 태일과 텐이 도영 쪽을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나는 도영이 같이 있으면 편해서 좋아, 가끔 투덜거리는 것도 웃기고 오물거리는 입도 토끼 같아서 귀여워"

 

 

텐의 말에 도영이 작게 웃었다. 나도 너 좋아 텐, 태일이 형도 정우도. 애들도 다.

그리고 재현이도. 도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도영은 재현이가 싫어?"

 

"아니, 그건 아니야."

 

 

도영은 갑자기 사라진 동현 때문인지 사람들을 만나는 게 어려웠다. 가장 가까운 사람도 사라져서 못 찾는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묘한 두려움이 있었다. 캠프에 와서 좋았던 건 사람들을 만나는 게 원래보다 편하다는 거였다. 문을 닫고 숨어있는 도영을 찾아 낸 게 텐과 재현이었다. 텐이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와서 도영에게 조금씩 얼굴도장 찍고 도영이 나오길 기다렸다면 재현은 반대였다. 재현은 도영의 방문을 성큼성큼 열고 들어와서 커튼을 쳐서 햇빛을 보게 하더니 나중엔 도영을 들쳐 엎고 밖으로 나오게 한 거였다. 재현을 통해 만난 사람들은 꽤 재밌었다. 재현 덕분에 캠프에 더 빨리 적응 할 수 있게 된 것도 맞다. 그래서 고마운 감정이 컸다. 재현이한테. 재현이는 좋은 사람이 맞다. 잘생긴 외모만큼이나 친절한 성격에 재현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재현과 함께 다니면서 재현을 보며 얼굴을 붉히는 사람을 여럿 봤었다.

 

 

"재현이가 아프로디테 님 아들이라서 나한테 그냥 고백하고 다닌 걸지도 모르지. 정재현은..인기가 많잖아.. "

 

"재현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

 

"아, 그럼 나한텐 왜 이러는데!"

 

 

도영이 텐에게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가 아차 싶어 다시 사과했다. 미안내. 순간 짜증 나서. 도영의 걱정과는 다르게 텐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무렇지 않아 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에로스)랑 재현이네 어머니(아프로디테)랑 친하..아니 유사모자관계잖아. 그래서 우리는 거의 같이 컸거든. 근데 재현이는 꽤 어릴 때부터 여기 살았는데 한 번도 누굴 좋아하거나 그런 적은 없었어. 누굴 졸졸 쫓아다니지도 않고 말을 먼저 걸지도 않아. 그래도 충분히 사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깐. 재현이한테 고백하는 사람은 많았는데 재현이가 한 번도 받아주는 걸 본적은 없어

 

 

"그랬던 이유는 뭔데?"

 

 

도영이 물었다. 텐과 태일이 대답을 망설였다. 우물쭈물하는 텐과 태일에 정우가 도영의 눈치를 보다가 이야기했다.

 

 

"좋아하는 사람은 있다고 들었어요, 첫사랑이라고."

 

 

정우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주저앉았다. 분명 재현을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왜 이렇게 심장이 철렁하는지.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생각에 도영이 입을 다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여기 있는 사람이야?"

 

"아니, 밖에 있다고 했어."

 

"언제까지 좋아했는데?"

 

 

한참을 답이 없었다. 도영이 대충 그들의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도영에 정우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형 오기 전까지요. 전에 재현과 나눈 대화에서 재현은 자신이 일곱 살에 캠프에 들어왔다고 했다. 나랑 사귀다가 첫사랑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될까? 십 년 넘게 짝사랑한 첫사랑이랑 만난 지 몇 주 안 된 나중에 누굴 고를까, 당연히 첫사랑이겠지. 환하게 웃는 정재현과 그 옆에 다른 사람을 떠올리니 눈물이 찔끔 나오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고백도 안 받아주다가 그런 생각하는 나를 보면서 남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내가 가지기엔 싫은데 남 주기에는 아까운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겠지. 제 처지가 꼴사나워 보였다. 재현이 계속 좋아하는 사람이면 진짜 좋은 사람이겠지. 만약에 사귄다고 하면 계속, 이 생각이 떠오르겠지 나는. 계속 이 기분을 느끼겠지.

도영이 이불을 끌어다 얼굴 끝까지 덮었다. 주변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소리가 들렸다. 텐이 그래도 지금 좋아하는 건 너니깐. 하며 도영을 달랬다. 텐의 말에 더 서러워졌다. 애초에 여지를 조금이라도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눈가가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처음부터 시작하면 안됐었는데,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말없이 이불을 뒤집어쓴 도영에게 그 누구도 말을 걸 수 없었다.

 

 

 

...

살짝 퉁퉁 부은 눈을 도영이 매만졌다. 눈가에 하얗게 올라온 눈물 자국을 급하게 비벼 없애는 도영이었다. 제 몰골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는데 주변이 조용했다. 그제서야 도영이 주변을 둘러봤다. 천막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앗, 미친 늦잠 잤나 봐. 가지가지 하는구나. 자책감이 들었다. 급하게 훈련복을 갈아입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천막 밖에서 수박 한 조각을 물고 오물거리는 마크가 보였다. 지금 훈련받아야 하는 시간 아닌가? 마크가 도영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효옹, 일어나셨어요?"

 

 

어엉,, 좋은 아침. 오늘 훈련 안 해? 아, 미뤄진대요. 마크가 태평하게 대답했다. 도영의 얼굴에서 의문이 비치자 마크가 오물거리던 수박을 씹어 삼키고는 제대로 말을 이었다. 오늘 상태 안 좋다고 단체 훈련은 다음으로 미룬대요, 상태? 무슨 상태? 마크가 말한 상태가 무엇인지 물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아침을 먹고 온 건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다 같이 숙소로 오고 있어서 정신이 팔린 나머지 물을 수 없었다. 와중에 도영이 가는 눈을 뜨고 재현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다행히도 재현은 그 무리에 속하지 않았다. 동혁이 도영을 발견하고 늦잠 자는 게으른 사람이라며 도영을 놀려댔다. 열이 받은 도영이 동혁을 잡으러 뛰었다. 기운 없던 몸도 동혁의 놀림 한방이면 금방 힘이 차올랐다. 쫓고 쫓기며 장난을 치는 도영과 동혁을 보며 정우와 텐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기운 차려서 다행이네. 분위기 띄우는 데는 동혁만큼 좋은 사람이 없었다.

 

 

 

결국 도영에게 잡혀 간지럼 당하는 동혁을 보곤 태일이 혀를 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쿤이 도영에게 말했다. 도영. 들어가서 짐 싸, 훈련 공지 나올 때까지는 훈련 대기야 쿤의 말에 도영이 동혁을 간지럽히던 손을 놓고 천막 안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천막 안에 따라 들어가니 가방 안에 짐을 아무렇게나 욱여넣는 도영이 보였다. 금세 짐을 싼 도영은 자긴 이제 들어가 본다며 손을 흔들곤 빠르게 천막 밖으로 나왔다. 가방을 메고 도영이 빠르게 걸었다. 백퍼센트의 확률로 재현이 같이 가자며 찾아올 걸 알았다. 아직 재현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조금 겁쟁이 같지만. 아니 겁쟁이가 맞아서 재현을 피할 예정이었다. 아직 시작도 안 한, 아직 자각도 못 한 사랑을 정리할 때까지.

 

이미 저만치 떨어져 빠르게 사라진 도영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재현이 뒤늦게 도영을 찾으러 왔지만 맞이하는 건 텅 빈 침대뿐이었다.

 

도영은 신전으로 달려와 짐을 풀곤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님프들이 오랜만이라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에 도영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너무 피곤해서 좀 잘 테니 오늘 아무도 들이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님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이 힘들었던 모양인지 살이 빠져 기운이 없는 도영에 안쓰러움을 토해낼 뿐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는 도영에 님프들이 잠이 잘 오는 향초를 키고는 머리맡에 따뜻한 차를 두곤 문을 닫고 나갔다. 방안이 고요했다. 아직 낮인지라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사실 막 자고 일어난지라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잠을 자겠다고 말해야 정재현이 신전을 못 들어올 것 같았다. 도영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조용히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어제 재현의 일로 조금 울컥했던 것이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꿈인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자신이 재현을 이렇게 피해 다녀야 하는지 모르지만 일단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솔직히 웃기기도 웃겼다. 있지도 않을 미래를 상상하고 또 나 혼자 오해하는 게, 얼마나 웃긴지. 도영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자신을 좋아하는 정재현과 정재현을 좋아하지 않은 김도영에서 무언가가 뒤바뀌듯 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이후로 김도영을 좋아하지 않는 정재현과 정재현을 좋아하는 김도영이 된 것 같았다. 재현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이 있는 재현이 만난 지 한 달밖에 아니, 첫눈에 반했다는 말하는 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저조차도 미워했던 동현을 몇 년 만에 다시 보고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용서하였는데 재현의 사랑이라고 다를 건 없어보였다. 사랑이란 게 참 간사해서 외면하고 오래 못 봤다고 금방 사그라드는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재현을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사실은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재현이 ‘짠’하고 나타나길 기다리는 것을 알았다. 내세울 것도 없는 자신인지라 괜히 받아주기 어려웠다. 모르는 사이 조금씩 스며드는 재현을 피하려 했지만 깨달은 순간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았다. 저 좋다는 사람을 어떻게 싫어하겠어. 그날 호수에 빠진 건 재현이 아니라 도영이었다. 가라앉은 건 팔찌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스며든 게 아니고 온몸을 적신 거였다. 정재현은 김도영을.

 

 

 

 

 

...

 

 

 

 

도영은 훈련을 끝난 후부터 보이지 않았다. 훈련이 끝난 날 신전 앞으로 찾아간 재현은 도영이 피곤해 자고 있다는 님프의 말에 발걸음을 돌렸었다. 많이 피곤한가 보네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을 후회하는 재현이었다. 그때 잠을 깨워서라도 만났어야 했는데. 밥 안 먹고 도영을 기다렸어야 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캠프 지리를 빠삭하게 알았는지 도영은 이곳저곳을 뒤져도 안 오지 않았다. 자신이 잘 못 한 게 있으면 얘기해달라고 고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애초에 화는 나지도 않았다. 도영이 자신을 피하는 데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 원인이 뭔지를 알고 싶은데 아는 사람은 코빼기도 안보이니 답답했다. 월 만나야 미안하다 말하고 고쳐나갈 텐데 보이질 않으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풀죽은 재현을 유타가 안쓰러운 듯 바라봤다.

 

 

"오늘도 못 봤어?"

 

"응, 코빼기도 안 보여.."

 

"텐이랑 쿤도 못 봤대?"

 

 

아는 것 같은데, 얘기를 안 해줘. 도영이 있는 곳을 아는 것 같은 쿤과 텐은 도통 재현에게 도영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재현이 진지하게 알려달라 얘기해도 꽉 다물어진 입술은 도통 열리지를 않았다. 그 이유는 만일 알려준다면 절교라는 도영의 귀여운 협박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재현만 고통받을 뿐이었다. 아프로디테가 난리가 났다. 귀엽고 예쁜 자신의 막내아들 안부를 묻고자 잠시 내려왔는데 보이는 얼굴에 힘이 없으니 아프로디테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괜찮다며 애써 웃는 자신의 아들에 올림푸스로 올라간 아프로디테는 에로스를 털어 원인을 알아보라 했고 이후 원인을 알게 된 아프로디테는 아들 관리 잘하라며 디오니소스의 멱살을 잡았다. 이후에 분이 안 풀려 에로스에 김도영을 끌고 와 화살을 쏘라고 명령하는 아프로디테를 주변에 있던 데메테르가 간신히 말렸다.

 

 

 

 

재현이 오늘도 불은 켜져 있지만 들어갈 수는 없는 신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도영이 분명 신전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들어갈 수 없으니 희망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재현이 흰 벽을 타고 들어가 도영의 창문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방 불이 꺼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몇 번 반복했다. 이런 제 자신이 조금 유난스럽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사랑을 포기할 순 없었다. 언젠간 이유를 얘기해주겠지, 도영이 먼저 다가오길 기다려봐야지 하면서도 도영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도영의 얼굴을 못 보니 금단현상이라도 온 것마냥 초조해졌다. 자신의 신전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길목에서 사과를 오물거리는 정우가 보였다. 밝게 인사하는 정우와는 다르게 재현이 힘없이 인사했다.

 

 

"형, 어디 갔다 오는 길이에요?"

 

"나..? 도영이 형한테.."

 

"앗, 도영이 형 만났어요?"

 

 

아니.. 재현의 말에 정우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제 방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던 게 도영이라고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여기 있는 걸 말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도영이라 정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서 자신이 찾아와 숨겨달라고 하는 도영을 받아준 게 사흘 전이었다. 재현의 상황도 그런대로 이해되지만 훈련 마지막 날 본 도영의 눈물이 다소 임팩트 있게 기억에 남아 도영의 편에 서버리게 된 정우였다. 하긴 나 같아도 썸남이 오랜 짝사랑 상대가 있다는 거 알면 좀 꺼려지긴 하겠다. 정우가 머릿속을 채우는 잡다한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형이 왜 피하는 걸까?"

 

 

재현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정우가 시선을 피하고 대답했다. 손끝 아니 옷자락이라도 봤으면 소원이 없을 텐데. 재현이 동그랗고 까만 도영의 머리통을 떠올렸다. 정우가 무거워진 분위기에 재현의 기분을 풀어보고자 이것저것 조심스럽게 얘기하는데 옆에서 재현의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서로 삽질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얘기라도 해보면 좋을 텐데. 오늘도 도영에게 나가서 말이라도 해보라 하는 쿤에 뭐라고 말하냐며 다시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 우울해하는 도영을 차마 끌고 억지로 얘기시킬 수 없었다. 옆에서 한숨 쉬며 우울해하니 자신의 기분도 다운되는 것 같은 정우였다. 그러다 궁금했던 것이 떠올랐다. 재현의 대답이 좋으면 도영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형, 그 첫사랑이요..."

 

"응? 누구?"

 

"옛날에 좋아했던 첫사랑이요. 그분은 이제 안 좋아하는 거예요?"

 

 

정우의 머릿속에 이젠 도영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재현의 모습이 그려졌다. 원래 드라마에서도 남자주인공의 첫사랑은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일 뿐이지 암. 그렇고말고. 기대하는 정우와는 다르게 재현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재현의 입이 서서히 열었다. 아직 좋아하는데? 안타깝게도 재현의 대답은 정우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재현의 말이 정우의 뒤통수를 크게 때렸다. 재현의 말이 메아리치듯 정우의 머리에 계속 맴돌았다. 미친 개쓰레기. 배신감이 휘몰아쳐왔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도영이 형한테 껄떡거린 거야? 이이, 난봉꾼!! 형은 다른 아프로디테 자식들과는 다를 줄 알았는데! 분노가 휩싸여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려는 정우를 보지 못하고 멍하게 딴 곳을 응시하던 재현이 무어라 이야기하려 했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쟈니의 존재에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정우가 화를 참지 못하고 결국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신전으로 뛰어갔다.

 

 

"정우 왜 저러는지 알아?"

 

 

쟈니가 멀어져가는 정우를 가리키며 물었다. 재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잘 모른다고 몸짓했다.

 

 

 

 

...

 

 

 

 

 

제 방 침대에 앉아 와인을 홀짝거리는 도영에게 사실을 말할까 말까 고민에 휩싸인 정우였다. 우울해하던 걸 잘 달래서 그나마 밝아진 도영인데 지금 이 얘기를 하면 더 땅 파고 들어갈 걸 알아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정우가 부담스러워 도영이 결국 왜 그렇게 보냐고 물었다. 아니, 아니에요. 정우의 싱거운 대답에 도영이 시큰둥해하며 절인 올리브를 집어먹었다.

 

 

"형, 형은 재현이 형 좋아해요?"

 

 

정우가 도영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놀란 도영이 올리브를 집던 손을 멈추고 정우를 쳐다봤다. 야아..그 얘기는 이제 안하기로 했잔나... 도영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 형이 대답해준 적 없잖아요 정우가 대답을 재촉했다. 도영이 대답을 망설이다 결국 얘기했다.

 

 

"좋아하긴 하는데. 포기하려고.. 난 그 첫사랑 못 이겨."

 

 

도영의 대답에 정우가 울컥했다. 재현이 형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형, 제가 진짜 좋은 사람 소개해줄게요 재현이 형은 이제 잊어요. 도영이 자신의 손을 부여잡고 아련하게 쳐다보는 정우를 뿌리쳤다. 얘가 오늘 왜이래 진짜. 정우가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올림푸스에 제대로 된 신하나 없다더니 데미갓도 마찬가지였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윗물이 그 모양인데 우리 세대라고 다를 리가 없지. 도영이 자신을 아련하게 쳐다보는 정우의 시선을 외면했다. 이거 신종 괴롭힘이야? 혹시 내가 너희 집에 계속 있어서 너 화났니? 정우가 아무 말없이 고개를 휘저었다. 저거저거 잘생기고 재밌어서 친해진 건데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또라이었다. 차라리 오지 말라고 말을 하지 이제부턴 태일이 형네로 숨어야겠다. 도영이 과일치즈를 오물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미션 임파서블도 아니고 숨어서 정우의 신전에 들어온 텐이 술에 취해 누워 자고 있는 둘을 보고 쯧쯧 혀를 찼다. 김도영 저거는 취하는 것도 조절도 가능하면서 취한 거 보면 일부로 그런 거다 일부로. 텐이 찹찹 도영과 정우의 엉덩이를 인정사정없이 때렸다. 텐의 손은 매웠다. 화살 쏘는 에로스 아들이라 그런지 이불을 뒤집어쓴 도영의 엉덩이 위치를 기가 막히게 찾았다. 도영이 엉덩이를 매만지며 투정 부렸다. 오늘 너까지 왜 그래

 

 

"도영, 정우 미성년자인건 알지?"

 

 

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스무 살인데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정우는 미성년자지. 도영이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텐이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미성년자한테 술을 줘? 도영이 그제서야 눈을 크게 뜨고서 벌떡 일어났다. 미친. 도영이 술에 취해 누워있는 정우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침을 질질 흘리며 정우가 몸을 뒤척였다.

 

 

"...여기서도 미성년자 따져서 술 마셔..?"

 

 

사실 아니지만 도영을 놀리고 싶은 텐이었다. 애초에 신의 자식들이라 몇천 년을 사는데 나이가 뭐 대수라고. 안절부절못하는 도영에 텐이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접어가며 웃었다. 깔깔거리며 웃는 텐에 도영이 상황 파악 못하고 멍하게 있었다. 뻥이야 도영아. 상관없어. 도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도영이 자신을 놀린 텐에 투정을 부렸다. 옆에서 놀랐다며 쉴 새 없이 쫑알거리는 도영을 보니 훈련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기운을 차린 듯한 도영에 텐이 안심했다. 도영의 쫑알거리는 소리에 잠에선 깬 정우가 텐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언제 왔냐는 말에 방금 왔다고 답한 텐이 도영과 정우의 사이에 누웠다.

 

 

"오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나 보고 싶었어 도영? 뭐래, 도영이 질색팔색하며 텐의 손길을 뿌리쳤다. 안 들키게 오느라 늦었지. 텐의 말에 도영이 괜히 미안해져 이불을 꼼지락거렸다.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신전 안에 콩 박혀서 자신과 놀아주는 주변이 고마웠다. 시간이 약이라고 그래도 좀 시간이 지나고 재현의 얼굴을 안 보니 생각 정리가 된 것 같았다. 아직 마주 보고 얘기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전보다는 괜찮아졌다.  

 

술이 덜 깨서 비몽사몽 한 정우의 방에 오래 있진 못했다. 평소보다 일찍 신전에 나선 도영이 멀리 돌고 돌아 디오니소스의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365일 따뜻한 날씨인데 오늘 따라 밤공기가 차가웠다. 숨을 들이쉬니 폐부에 찬 공기가 가득 찼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이지만 아르테미스 덕분인지 달빛이 길목을 밝혀주었다. 발끝을 내려다보며 걷는데 시야에 발 두 개가 나타났다. 그에 도영이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앞에 안 보고 다니면 넘어져요. 오랜만에 들은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얼굴인데 겁이 나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도영이 그대로 몸을 돌려 반대로 뛰어가려 했지만 자신의 옷자락을 잡는 재현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형, 얘기 좀 해요"

 

 

아니, 나중에 하자. 나중이 언젠데요? 재현의 말에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당황한 도영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재현을 바라봤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엔 한 치에 양보도 없었다. 도영이 입술을 짓이겼다.

 

 

 "형, 왜 자꾸 나 피해요?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잘못한 거 없어"

 

 

도영이 다시 고개를 돌려 재현을 외면했다. 얼굴을 보고 얘기하려니 용기가 안 났다. 잘못한 게 없다면서 왜 그러는 건데요? 그 말 한마디가 서러웠다. 왜 그럴까 진짜? 너는 왜라고 생각해? 도영의 목에 뱉지 못할 말이 맴돌았다. 차마 네 첫사랑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유치하고 제 자신이 한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재현은 이유를 듣기 전까진 도영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그냥 너 이러는 게 싫어. 네가 계속 그럴수록 내가 힘들어. 속에서 모난 말이 나왔다. 재현이 잘못하나 안 한걸 아는데도 그냥 미워져서 모난 말이 튀어나왔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말에 놀란 건 재현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렇게 차갑게 말할 수 있었는지 몰랐다. 말을 뱉고도 후회스러웠다. 다시 변명하려고 입을 벌려 봐도 목이 메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을 몇 년 동안이나 좋아한 게 질투가 났다. 괜한 자존심에 그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재현은 말이 없었다. 도영을 잡은 손이 스스륵 풀렸다. 재현의 표정이 울 것처럼 변했다. 고개를 숙인 도영은 그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자신을 붙잡던 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조금만 더 잡지. 도영이 고개를 올려 재현을 바라봤다. 울 것 같은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재현이 애써 눈물을 삼키고 그동안 미안했다며 뒤돌았다. 재현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멍하니 쳐다보는데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뚝 떨어졌다. 몇 분을 그렇게 멍하게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정재현을 찼다는 게 실감이 났다. 조금씩 뚝뚝 떨어지던 눈물이 어느새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힘들 때 생각나는 게 가족이라던데 바쁜 동현 때문에 신전에 있는 건 자신뿐인지라 위로받을 사람이 친구들뿐이었다. 도영이 엉엉 울며 가장 가까운 쿤의 신전으로 걸었다. 신전 앞을 지키던 경비들이 밤이 너무 늦었다며 도영을 가로막았지만 이내 눈물범벅인 도영을 보고 놀라 문을 열어주었다. 코를 훌쩍거리는 도영에 아르테미스 신전의 님프들이 도영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쿤 지금 자요? 울먹거리며 말하는 도영에 님프들이 서로 눈을 맞추었다. 옛 저녁에 잠든 쿤이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깨워야 할 것 같았다. 님프들이 옷소매로 도영의 눈을 아프지 않게 닦아주곤 쿤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쿤이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자신을 보고 안겨 오는 도영에 당황한 쿤이 눈물범벅인 도영을 보고 또 한 번 당황했다.

 

 

"도영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쿤은 울음 섞여 무슨 말인지도 모를 도영의 말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었다. 제 친구가 결국엔 정재현을 찼다는 건데 사실 좋아하고 있어서 서러워서 운다는 말에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그래도 딸꾹질까지 하며 훌쩍이는 도영이 안쓰러워 등을 쓸어주었다.

 

 

 

"내가 잘못한 거지? 그치?"

 

 

도영이 더 엉엉 울었다. 방문 앞에서 한참을 우는 도영을 방안으로 데리고 와 연신 달래주었다. 쿤이 님프에게 부탁해 텐과 정우를 불러왔다. 잠옷 바람으로 뛰어온 얼굴들에 아직 졸음이 가득했다. 당황한 표정들에 자초지종 설명을 마친 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달래줄수록 더 서럽고 감정이 격해져서 눈물이 더 터져 나오는 법이었다. 걱정 어린 얼굴들을 마주하니 조금 멎었던 눈물이 도로 터져 나왔다. 한참을 그렇게 울던 도영은 결국 지쳐서 잠이 들었다. 베개에 눈물 자국 남기며 잠든 도영을 뒤로하고 정우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재현이 형 개쓰레기예요. 도영이 형이 아까워요. 그에 텐이 언제 이렇게 도영이와 가까워졌냐며 현 상황으로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며 화난 정우를 진정시켰다. 그에 정우가 발까지 동동 구르며 답답한 가슴을 내려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요? 재현이 형 아직도 그 첫사랑 못 잊었다니까요? 정우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흥분한 정우의 설명을 들은 텐과 쿤의 표정이 흉흉해졌다. 재현이가 마음이 태평양 같아서 여러 사람을 품고 다니는 구나. 형제처럼 자란 텐과 재현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었다. 남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지는 문어발처럼 여기저기 마음 주고 다니는구나. 화가 난 세 사람이 동시에 자고 있는 도영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

 

 

 

 

 

도영이 요새 넋을 놓는 일이 늘었다. 원래부터도 침대에 누워 멍 때리다가 잠만 자는 게 일상인 도영이지만 요즘엔 유독 멍 때리는 것이 심해졌다. 멍하게 있다가 태일과 만나기로 하는 약속도 늦고 누가 불러도 대답 않고 멍하게 있는 것도 여러 번이었다. 신전에 있는 님프들과 동현은 그게 걱정이 됐는지 도영이 좋아하는 치즈케이크를 간식으로 주기도 하고 활동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어 일부로 화원으로 데리고 나가 산책도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사실 도영이 기운이 없는 이유를 텐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도영 자신조차도. 주변 사람이 더 애가 탔다. 도영을 위로하려고 별짓을 다 해봐도 도영은 시큰둥했다. 일부로 흔들리지 말라고 재현의 머리털이라도 보이면 주변인들이 나서서 도영을 데리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디오니소스의 신전엔 장미가 없다. 그 말은 즉 도영의 방 한 켠에 있는 시든 장미꽃은 다른 곳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도영의 방 창문에 매일 놓인 장미꽃을 누가 가져다 놨는지 도영은 알고 있었다. 캠프에 있는 신전 중에 이토록 향기롭고 아름다운 장미꽃을 키우는 곳은 오직 아프로디테의 궁전뿐이었다. 방을 이층으로 옮기던가 해야지 도영이 항상 생각하지만 절대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생각을 하며 코를 꽃에 묻었다. 가시 하나 없이 잘 다듬어진 장미였다. 너희 어머니가 흘린 눈물로 태어난 장미를 이렇게 나한테 가져다줘도 되냐? 도영이 말없이 가만히 향을 맡는 도영에 방문을 열고 들어온 님프가 그 모습을 보곤 말했다. 장미, 화병에 꽂아 둘까요? 응, 그렇게 해줘. 이미 방안에 장미가 꽂힌 꽃병이 여러 개지만 도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님프도 마찬가지였다. 포도 향이 나던 방안은 장미 향으로 가득했었다.

 

그러나 매일 오던 장미꽃은 그날부터 역시나 오지 않았다. 벌써 몇 주가 지나가 마지막으로 전해준 장미마저 시들어져 버렸다. 님프가 시든 꽃을 치우려 하는 것을 도영이 말렸다. 그거, 그냥 둬. 님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꽃병을 다시 자리에 두고 방을 나갔다.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야수처럼 장미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정재현이 미남은 맞긴 하니깐. 미남을 기다리는 건 맞는 거 같네. 분명 자신이 저지른 일인데도 후회가 드는 것 같았다. 자신이 거절한 후에 막상 재현이 찾아오지 않으니 가슴이 답답했다. 항상 웃고 있는 모습만 보여주던 재현이었는데 이렇게 차가운 모습만 보니 낯설었다. 그 싱그러운 웃음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길을 가다 재현을 마주치면 어쩔 줄 모르는 자신과 다르게 재현은 냉정하게 굴었다. 도영을 힐끔 보고 제 갈 길을 찾아 떠났고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그러면 도영은 재현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이내 자신도 뒤돌아 걸었다. 같은 공간에 있게 돼도 사이에 벽이 있는 것 같았다. 재현이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드는 걸 보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보이는 싸늘한 눈빛에 도영이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찬 건 분명 자신이 맞는데 왜 자기가 더 힘든 건지 모르겠다.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버린 걸까.

 

 

 

...

 

 

 

 

  

자신을 보지 않는 재현에 도영이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아무렇지 않을 거란 예상과 다르게 막상 재현이 자신을 무시하니 가슴이 조금 시렸다. 오늘은 훈련장에 늘 있던 훈련단장이 나오지 않았다. 하반신이 염소로 된 뿔이 달린 사티로스가 검을 빼 들고 동작을 지켜봤다. 사티로스의 지적을 들으며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검을 휘두르는 도영이었다. 휴식 시간이라는 말에 도영이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몇 주간 계속하던 훈련이지만 근육량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도영에겐 적응 불가였다. 빨개진 도영의 볼에 차가운 물병을 착하고 붙었다. 갑자기 느껴지는 차가움에 도영이 몸을 떨었다. 태일이 차가운 물병을 도영에게 건넸다. 덥지? 태일의 말에 도영이 칭얼거렸다. 뚜껑을 따곤 물을 꼴깍꼴깍 삼켜댔다. 메말라 있던 몸에 물이 들어가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전투 훈련이 삼십 분 뒤면 시작되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쓰러질 것 같았다. 진이 빠져 드러눕는 도영에 등 뒤로 차가운 물이 훑고 지나갔다. 쟈니였다. 적당히 차가운 물이 도영의 몸을 적셔 뜨거웠던 몸을 식혀주곤 다시 강으로 돌아갔다. 도영이 고맙다고 입을 뻥긋거리자 쟈니가 손을 흔들더니 자신도 휴식을 취하려 유타와 태용에게도 뛰어갔다. 도영이 자리에 앉아 슬쩍 재현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무표정한 재현이 물을 마시며 목을 축이고 있었다. 재현의 주위로 마크와 동혁이 분위기를 띄우니 재현이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멍하게 재현을 보고 있는데 재현이 고개를 돌렸다. 도영이 시선을 피했다. 재현이 자신을 보는 것이 느껴졌다. 시선을 무시한 채 태일에게 말을 붙였다. 이번 전투 훈련 끝나면 또 이거 언제 해요? 이거? 음... 아마 다음 주에 공지해주실걸? 그때그때 결계 상태 보고 하는 거라서. 그래서 저번에 훈련 다 못 마쳐서 지금 하는 거야. 공격 대비훈련

 

 

"결계 상태요?"

 

"아, 도영이 온 지 얼마 안 됐었지. 네가 너무 적응을 잘해서 잠깐 까먹었다."

 

 

여기 들어올 때 벽이 두 개 있었잖아. 하나는 인간세계와 신들의 영역을 막는 벽이고 하나는 괴물과 신들의 영역을 막는 벽이야. 바깥벽 결계는 옛날부터 강력하게 쳐져 있기도 하고 가이아 신께서 막아주셔서 상관없는데 안쪽 벽은 결계는 좀 오락가락하거든 12신의 힘으로 친거라 신들의 힘이 약해지면 같이 약해져서 괴물들이 쳐들어올 수 있거든, 그래서 하는 거야 이 훈련.

 

아아. 태일의 말에 도영이 감탄사를 뱉었다. 저번에 마크에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타이밍을 놓쳐서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쩜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은지. 당연한 지식이라고 생각되어서 도영에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여기도 꽤 위험한 게 많네. 도영이 남은 물을 입에 부어 마셨다.

 

사티로스의 고둥 소리에 맞춰 쉬고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하나둘 모였다. 사티로스가 대충 서 있는 사람들을 반으로 뚝 나누어 편을 갈랐다. 도영이 반대편 팀 사람들을 얼굴을 바라봤다. 다른 팀에 재현도 있었다. 도영이 재현을 힐끔 바라봤다. 도영이 재현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챈 정우가 도영을 끌고 구석으로 데려갔다. 더 좋은 사람 만나라며 투덜거리는 정우에 도영이 작게 웃었다. 팔짱을 끼고 사라진 둘을 재현이 눈으로 좇았지만 뒤 돌은 도영은 이를 알 수 없었다.

 

 

 

 

...

 

 

 

 

 

훈련은 예상보다 어려웠다. 실전이라며 검 두 개 덜컥 쥐여주고 상대편을 찾아서 공격하라는 초심자에 대한 고려는 하나도 안 된 규칙에 도영이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었다. 멀리서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면 도영은 그 반대로 걸어 나갔다. 다들 도영이 초보라는 것을 알아서 봐줄게 분명하지만, 몸에 초심자라고 글자가 붙여 써 있는 것도 아니고 얼굴도 안 보고 공격을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자신을 도영은 잘 알았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쉬고 싶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늘이 져서 시원했다는 거였다. 부스럭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기척에 도영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검을 검집에서 빼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도영의 눈앞에 날카로운 검 날이 보였다. 햇빛을 받은 검이 빛을 반사해서 눈에 들어오는 빛에 도영이 눈을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줄 알았다. 다행히도 날은 금방 거두어졌다. 재현이었다. 재현도 도영인 줄 몰랐는지 눈이 커졌다. 한참을 그렇게 굳어있는데 재현이 먼저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표정이 싸늘했다. 재현은 도영을 힐끔 보곤 뒤돌았다. 자기도 모르게 도영이 재현의 옷소매를 잡았다. 재현이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아봤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도영이 결국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공격 안 해..?"

 

 

자신이 생각해도 참 어이없는 말이었다. 재현이 자신을 바라보는 도영의 눈을 피했다. 재현도 머뭇거리다 이내 대답했다. 하면, 이길 자신이나 있어요? 도영이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 재현이 도영의 손을 떼어내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차가운 재현에 목이 메이는 것만 같았다. 이 와중에도 오랜만에 느껴지는 재현의 손길이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사실 도영도 자신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을 알았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자기도 차갑게 굴었으면서 재현이 차갑게 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고 애초에 대놓고 싫다고 말했던 사람에게 잘해줄 이유는 없다. 재현의 행동이 백번 이해됐지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라지는 재현의 뒷모습이 그날 밤과 겹쳐 보였다.

 

 

 

도영이 살짝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슬쩍 닦고는 터벅터벅 걸었다. 숨을 몇 번 깊게 쉬니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재현이 온 길을 반대로 한참 걸으니 하얀 벽이 보였다. 도영이 하얀 벽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주머니에서 나침판을 꺼내 위치를 확인했다. 이제 캠프 쪽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북서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도영이 나침판을 떨어트렸다. 멈춘 소리에 도영이 고개를 갸웃거리곤 나침판을 주우려 허리를 숙이는데 다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 위로 새들이 우루루 지나갔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도영이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괜스레 불안해져 다시 나침판을 확인하고 걷는데 아까의 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더 큰 소리가 도영의 주변에 퍼졌다. 도영이 그제서야 이 소리가 나는 곳이 벽 밖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한 번 더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얀 벽이 쩌억하고 갈라지고 부서졌다. 도영이 넋을 잃고 벽 쪽을 바라봤다. 벽들이 무너져 생긴 먼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츰 먼지가 가라앉으니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디오니소스의 사지를 끔찍하게 토막 내고 삼킨 존재. 도영의 아버지가 두 번 태어난 자라는 칭호를 얻게 만든 존재. 티탄. 신화에서 봤던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존재가 등장했다. 티탄은 어느 신과 같이 두 눈을 달고 두 발로 걷고 두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머리칼은 뻣뻣한 나무뿌리와 같았고 그의 눈은 생기 없이 탁했으며 그에게는 악취가 났다. 벽을 넘어 큰 거인이 손을 뻗어 도영 근처의 나무를 부서트렸다. 멍하게 있던 도영이 그제서야 티탄을 피해 달려 나갔다.

 

 

티탄은 도영의 모습을 발견하곤 도영에게로 손을 뻗었다. 도영이 제게 다가오는 손에 칼을 꽂고 도망쳤다. 도영 자신도 자신이 이런 속도로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는 날쌘 토끼와 같았다. 도영의 뒤로 티탄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티탄은 제 손에 박힌 검을 빼곤 도망쳐나가는 도영의 옆으로 던졌다. 쨍그랑거리는 금속의 소리가 도영의 귓가에 울렸다. 무서워서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티탄은 도영을 따라잡는 것을 멈추었다. 티탄이 주먹을 쥐고 그 자리에 서서 땅을 내려쳤다. 쾅 하는 굉음이 도영의 귀를 울렸다. 주먹이 올려진 땅에서부터 도영이 달리는 곳까지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도영이 뒤로 갈라지는 땅을 뒤돌아 힐끔 보곤 더 바쁘게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땅이 갈라지는 속도보다 빠를 수 없었다. 도영이 자신의 발밑까지 갈라진 땅에 더 이상 내딛지 못한 발걸음으로 갈라진 틈 사이로 빠졌다.

 

하나 남은 검을 벽에 꽂아 대롱대롱 매달렸다. 없는 근육을 쥐어짜 가며 땅 위로 손을 뻗었다. 손에 느껴지는 잔디의 촉감에 검을 디디고 땅 위로 올라왔다. 올라온 땅 위에서 마주한 것은 티탄이었다. 자신에게 다시 손을 뻗는 티탄에 도영이 검을 꺼내려 허리춤을 매만졌지만 만져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망갈 새도 없이 티탄은 도영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손에서 도영이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손을 들어 냄새를 킁킁 맡더니 티탄이 입을 열었다.

 

 

"너 자그레우스*의 아들이구나"

*디오니소스의 다른 이름

 

"자그레우스는 맛이 아주 좋았다고 하지. 너도 그런지 궁금하구나"

 

 

눈물이 울컥 쏟아질 것 같았다. 도영을 쥔 손이 티탄의 얼굴 가까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때 검 하나가 날아와 티탄의 손에 박혔다. 티탄이 고통 섞인 비명을 지르고 움켜쥐었던 손을 폈다. 펴진 손에서 도영이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이 모든 것이 도영에겐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지만, 도영은 몸이 굳어져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티탄이 놓친 도영은 다시 갈라진 땅 사이로 떨어졌다. 도영의 시야에서 하늘이 점점 멀어져갔다. 더 이상 벽에 꽂아 넣을 검도, 벽을 부여잡고 버틸 힘도 없었다. 도영이 두려움을 느끼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곧 떨어져서 몸이 산산조각 나겠구나. 숨이 가빠져 왔다. 그러나 곧 낙하하는 몸을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자신의 팔을 붙잡고 허리를 감싸 안는 감각이 느껴졌다. 도영이 눈을 떴다. 동혁이 자신의 몸을 붙잡고 있었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동혁이 땅 사이로 비추는 햇빛을 받아 신과 같이 보였다. 형 꽉 잡아요. 동혁의 한 마디에 도영이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동혁의 날개 달린 신발이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제 아버지가 준 선물을 이런 식으로 쓰일 줄 한 번도 예상한 적 없었는데 동혁이 이를 악물고 도영을 끌어안았다. 신발을 사용하는 방법을 따로 배워본 적이 없는 동혁인지라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동혁이 틈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허공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제서야 동혁과 도영에 피부에 따뜻한 햇볕이 닿았다.

 

 

동혁이 땅 위에 도영을 내려주었다. 도영은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도영을 태일이 일으켜 세우곤 부축했다. 잔뜩 기운이 빠진 도영이 뒤를 돌아 티탄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뒤에 검 하나를 들고 힘겹게 들고 숨을 고르는 재현이 보였다. 다친 건지 피로 젖어 빨개진 옷 밑에서부터 피가 손등을 타고 땅 위에 뚝뚝 떨어졌다. 금속을 덧댄 옷 위로 적당히 굵은 턱선이 위치했고 툭 튀어나온 눈썹뼈 밑에 있는 금안에선 진지함과 날카로움이 묻어져 나왔다. 자신을 향해 다시 공격하는 티탄에 재현이 검을 고쳐 들고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금세 티탄의 팔 위로 올라가 몸 위를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는 검을 티탄의 눈으로 던졌다. 비명을 지르는 티탄에 재현이 티탄의 어깨에서 내려와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마크에게 크게 검을 달라며 크게 외쳤다. 자신을 향해 검집을 던지는 마크에, 재현이 검집을 받아들곤 빠르게 검을 뽑아 아직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티탄에 발등을 찍어 내렸다. 금세 발등에서 검을 뽑고는 다시 공격할 태세를 취하는 재현이었다. 숨이 찬지 숨을 몰아 내뱉는 재현에 도영이 가던 길을 멈췄다. 갑자기 멈추는 도영의 발걸음에 태일이 도영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도영의 시선 끝에 재현이 있었다. 태일이 도영에게 말했다.

 

 

"도영아, 너 구하려고 재현이가 맞서 싸우는 건데 네가 여기서 이렇게 있으면 구하려고 한 게 소용이 없어지지 않을까?"

 

 

도영이 그 말에 재현을 멍하게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구하러 와줄 거였으면 아까 왜 차갑게 굴었냐 넌. 도영이 땀인지 모를 것을 소매로 훔쳐냈다. 때마침 번개와 강물을 몰고 쟈니와 태용이 도영을 스쳐지나갔다. 재현을 도와주러 온 것이었다. 그제서야 안심한 도영이 태일의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

 

 

 

 

 

여러 신들처럼 한순간에 사랑에 빠져 도영에게 들이댄 것은 아니었다. 도영은 모르지만, 재현은 도영은 본 적이 있었다. 다른 데미갓과 마찬가지로 재현도 바깥에 산 적이 당연히 있었다. 재현은 아프로디테와 아프로디케가 사랑할 만큼 빼어난 외모의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만큼 그 외모는 어릴 때부터 눈에 띄었다. 무릇 그 나이 때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놀이터에서 뛰어놀며 개구장이처럼 이곳저곳을 쏘다니던 7살 정재현은 그날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객관적인 아이들마저도 예쁘다고 말하는 재현은 어른이 보기에도 아름답게 생겼었다. 꽃에 벌이 꼬이기 마련이라고 골목에 숨어 다른 아이가 자신을 찾아주길 기다리던 재현을 찾은 것은 나이 든 남자였다. 남자는 재현의 손을 붙잡고 우악스럽게 자신의 차에 태우려 했고 재현은 그에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 쳤다. 우연히도 그 현장을 목격한 건 태권도 학원을 마치고 떡꼬치를 입에 물고 하원을 하던 도영이었다. 초등학교 정규과정에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말아요. 와 납치범을 마주쳤을 때의 보건교육을 들은 도영은 교육내용은 생각하지 않고 행동만 앞서서 무작정 소리를 지르며 납치범을 물어뜯었다. 화가 난 납치범이 재현과 도영을 붙잡고 차에 태우려 했을 때 도영의 소리를 듣고 문방구 아줌마와 분식집 아저씨가 재빠르게 납치범을 붙잡고 도영과 재현을 구해냈다. 도영이 재현을 품에 안고 빠진 앞니 때문인지 세는 발음으로 괜찮냐고 물었을 때 재현은 사랑에 빠졌다. 자신을 구한 건 문방구 아줌마도 분식집 아줌마도 아니었다. 바로 도영이었다.

 

 

그날 이후 위험함을 느끼곤 자신을 아프로디테의 신전으로 보낸 아버지로 인하여 도영을 찾을 순 없었지만, 재현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온 도영을 잊을 수는 없었다. 하얀 도복 위에 까맣게 수놓아진 김도영이라는 이름과 노란 띠를 재현에 머릿속에서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 난봉꾼 아프로디테에 아들이라는 타이틀에 안 맞게 재현은 순애보 적인 감성이 있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해도 재현은 마음 한켠을 내줄 수 없었다. 신의 자식들인 만큼 외모가 빼어난 데미갓도 많았지만, 재현은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 시니컬한 모습에 남자든 여자든 다 애간장이 탄 건 재현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던 도중 데미테르의 아들인 윈윈과 같이 연회장을 찾는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운 건 좋아하지 않아 소리가 나는 방향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로 고개를 내젓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주변에 있던 유타가 재현을 발견해 재현을 불러세웠다. 재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유타에게 다가갔다. 평화의 여신 에이레네의 아들이 이토록 싸움 구경을 좋아하다니 이렇게 모순적일 수가. 신이 난 유타가 바라보든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보이는 것은 한 가녀린 남자가 다른 남자의 머리채를 쥐는 모습이었다. 아. 재현의 머릿속에 도복을 입은 김도영과 눈앞에 보이는 남자가 겹쳐졌다. 재현이 사람들 틈을 헤치고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난, 김도영. 디오니소스의 아들. 김도영이라는 세 글자가 재현의 가슴을 간지럽혔다. 네가 여기 있었구나 다행이다. 신의 아이여서. 널 다시 만날 수 있어서.

 

 

 

 

 

...

 

 

 

 

 

도영이 자신을 걱정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 틈에서 치료를 받았다. 다행스럽게도 우려와는 다르게 상처들이 깊지 않았다. 티탄이 도영을 쥐었을 때 생긴 멍들과 떨어지며 생긴 생채기들이 몸에 한가득이었다. 자신을 보며 걱정했다는 사람들의 말에 도영이 멋쩍은지 머리를 긁었다. 놀랐을 테니 쉬라는 말과 함께 사람들은 도영을 두고 방에서 나왔다. 시간이 꽤나 지났음에도 도영은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아파서 그런 건 아니었다. 검을 들고 싸우던 재현의 뒷모습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아까 그렇게 외면하고 차갑게 굴었던 너인데 왜 나를 구하러 왔을까? 도영이 침대에서 일어나 시든 장미를 멍하게 바라봤다. 도영이 그대로 겉옷을 입고 신전 밖으로 나갔다.

 

 

멍하게 캠프 안을 걷는데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었다. 어두운 캠프 안을 달빛이 밝혀주고 있었다. 한참을 걷는데 캠프에 중앙에서 붉은 불빛이 보였다. 도영이 불빛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불빛과 가까이 갔을 때 누군가가 도영의 눈앞에 보였다. *헤스티아의 아들이라더니 태일이 모닥불에서 불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형 이름값 하네요. 뭐야 이 자식아? 도영이 태일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영이 아무 말없이 멍하게 불꽃을 바라봤다. 태일이 도영을 힐끔 바라보다 말을 걸었다. *화로의 신이자 가정의 수호신

 

 

"몸은 좀 괜찮아?"

 

"아, 뭐. 별로 안 다쳐서 괜찮아요."

 

 

다행이다. 도영이 우물쭈물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차마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제 눈치를 보며 말하기를 망설이는 도영을 보고 태일이 작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재현이는 치료받고 누워있어. 괜찮아졌대."

 

 

도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가 아차 하고 말했다. 걔 걱정한 적 없거든요? 태일이 옆에서 그러시냐며 장작을 뒤적였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정재현이 주변에 있어서. 인정할 거는 인정해야 했다. 아마 동혁이와 재현이가 없었으면 자기는 죽었을 지도 모르지. 티탄의 손에 날아왔던 검이 아마 재현의 검인 것 같았다. 정재현이 많이 강하긴 한가 봐요. 그 괴물도 맞서 싸울 정도면. 도영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태일이 말문을 열었다.

 

 

사실, 아프로디테는 미모가 능력인 거지 다른 신처럼 힘이 강하거나 그렇지 않아, 보통 사람보단 강하지만. 신으로써는 아니라는 얘기지. 도영이 태일의 말에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일이 모닥불을 뒤적거렸다.

 

 

"정재현은 티탄을 이길 수 없다는 얘기야. 원래는 죽었을 지도 모르지"

 

 

그런데도 달려들어서 널 구한 걸 보면 재현이가 사랑의 힘을 많이 물려받긴 했나 봐. 태일의 말을 끝으로 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달렸다. 모닥불에서 고구마라도 꺼내 줄려던 태일이 도영을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도영의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쩐지, 이태용이나 김정우에 비해서 검을 휘두르는 모양새가 영 어색하더라. 못하면 나서질 말든가. 왜 나서긴 나서. 왜 나섰는지 알면서도 도영이 미안한 마음에 툴툴거렸다. 훈련을 받으면서 체력이 좋아져서인 것인지 아니면 재현을 보고자 자신의 마음이 급해진 것인지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벌써 눈앞에 보였다. 도영이 신전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신전 앞을 지키는 경비가 도영을 발견하곤 문을 열어주었다. 도영이 열린 문에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늦은 밤인데 신전의 님프들은 깨어있었다. 재현을 밤늦게까지 재현을 치료한 것인지 몇몇 님프들의 손에 붕대가 들려있었다. 님프들은 도영을 보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재현의 신전에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지만, 님프들이 비켜주는 길을 따라가니 하얀 문이 보였다. 도영이 문 앞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문을 두드리려 손을 들었지만 자꾸 주저하게 됐다. 도영이 손을 들고 불안한 눈빛을 하며 옆에 있는 님프를 쳐다봤다. 님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

 

 

 

용기를 내 문을 두드렸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도영이 문을 두드린 손을 내렸다. 내가 너무 늦게 왔나 보다. 몰려드는 후회에 고개를 떨어트리는데 도영의 눈앞으로 하얀 손이 보였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님프가 문을 열고 도영에게 고갯짓했다. 도영이 멍하게 있다가 이내 작게 고맙다고 말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금세 닫혔다.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달빛이 방안 한구석만 비추고 있었다. 자는 건지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아 어찌할 줄 모르고 가만히 서 있던 도영의 귀에 바닥을 내딛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도영이 작게 소리쳤다.

 

 

"너, 죽을 수도 있었다면서.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왜 했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걸음을 걷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어둠에 감춰진 인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재현이 어느새 도영의 숨결이 느껴질 거리까지 다가왔다. 도영이 숨을 참았다. 재현이 상처 난 도영의 목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살짝 거칠고 뜨거운 손가락이 예민한 목을 지나가니 느껴지는 낯선 촉감에 도영이 몸을 떨었다.

 

 

"그거 알아? 신의 인생을 길지만, 또 짧기도 해. 우리와 같은 신의 자식인 아킬레우스처럼 우리도 죽을 수 있어."

 

 

형이, 아도니스처럼 명계로 가게 되면 난 어머니와는 달리 힘이 없어서 형을 찾지 못해, 그럴 바에야 내가 다치는 게 나아. 재현의 말에 도영이 멍하게 재현을 바라봤다. 밝던 금안이 어둠 속에선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도영이 자신의 목 위에 올려진 재현의 손을 겹쳐 잡았다. 단단하게 굳은 입매와 집어삼킬 듯 자신을 바라보는 재현에 도영이 재현의 손을 목에서 떼어내고 깍지를 꼈다. 뜨거운 손바닥을 느끼며 손가락이 얽혀졌다.

 

 

"나를 정말 좋아해? 가벼운 사랑이 아니고?"

 

 

서로를 바라보는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도영이 재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재현이 깍지 낀 손을 풀고 도영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조금만 더 가까우면 입술도 맞닿을 거리에 도영이 침을 삼켰다. 오랜만에 맡는 재현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재현이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정말 형을 가볍게 만나고 싶었다면 어머니의 허리끈*을 가져와서 형을 꾀어냈겠지. 그런데 그러고 싶지는 않아. 왜냐면 나는 형이랑 진실한 사랑으로 결혼까지 하고 싶으니까. 재현의 말에 도영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어두운 방 안에서 도영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재현은 도영을 볼 때면 어머니가 항상 이야기했던 아도니스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사랑했던 소년, 제우스마저 탐내던 아름다운 소년. 아도니스. 재현에게 도영은 아도니스였다. 도영이 그 싸늘한 표정으로 타인의 머리를 감싸 쥐고 내팽개쳐도 그 손길을 느낄 타인에 질투가 났고 그 눈이 어디 하나 식물이라도 눈길을 주면 화가 나 식물의 뿌리를 뽑고 짓밟고 싶었다. 그러다 동그란 그 눈을 마주 볼 때면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해졌고 통통한 입술이 건조해져 혀로 입술을 핥을 때면 그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빨아들여 한껏 맛보고 싶었다. 어머니는 페르세포네와 아도니스를 공유하기로 약속했지만, 재현은 그럴 수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도영을 품고, 취하고 탐하고 싶었다.

 

*케스토스 히마스:아프로디테를 더욱 매혹적으로 보이게 하는 신비로운 허리끈 

 

도영은 불안감과 흥분감이 교차된 양가감정에 빠졌다. 재현의 눈동자에 도영이 가득 찼다. 재현이 자신만을 눈에 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온몸이 짜릿해졌다. 그래 얼굴도 모르는 너의 첫사랑이 누군지 알 게 뭐야 지금 네가 내 앞에 있는데. 다신 이 순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영이 재현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재현의 눈부터 입술까지 시선을 옮겼다. 마지막 입술로 옮겨진 시선에 도영이 그대로 눈을 감고 입술을 포갰다. 당황해 멈춰있던 재현이 제 앞에 보이는 도영의 얼굴에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벌어진 틈 사이로 재현의 혀가 도영의 입안과 치열을 훑었다. 입안이 달았다. 혀가 섞이는 끈적한 소리와 불규칙한 숨소리가 조용하던 방안을 채웠다. 적나라한 소리에 도영의 귀가 빨개졌다. 입술을 떼지 않은 체로 재현이 도영을 침대까지 밀어 눕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입술을 부딪히는 것을 반복하다 한참 후에야 입을 떼어냈다. 입술을 떼어냈는데도 못내 아쉬운지 재현이 쪽쪽 소리를 내며 도영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꿈인 것 같아요"

 

 

재현이 달뜬 숨을 내쉬며 도영의 목에 머리를 박고 속삭였다. 재현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내쉬어지는 숨에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도영이 재현의 머리를 매만졌다. 가는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헤집는 느낌에 재현의 기분은 좋아졌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도영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쳤다. 재현이 고개를 들어 도영을 쳐다봤다.

 

 

"결혼할래요?"

 

 

도영이 손을 뻗어 베개를 끌고 와 재현에게 던졌다. 너는 입만 열면 그 소리냐. 좀 진지할 수 없어? 도영의 말에 재현이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저 지금 진지한데요. 너. 진짜 나만 좋아할 수 있어? 도영이 의심 어린 표정으로 재현에게 물었다. 그에 재현이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영이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재현에게 물었다.

 

 

"그럼 너 스틱스강에 맹세할 수 있어?"

 

 

도영의 짓궂은 물음에 재현이 표정을 굳혔다. 갑작스럽게 달라진 표정에 도영이 당황해 장난이라며 횡설수설 말했다. 사실 떠보려는 의도가 섞여 있긴 했다. 재현과 몸을 섞고도 살짝 불안감이 들어 말한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을 안 꺼냈을 텐데 후회스러웠다. 역시 나는 여기서 만족해야겠구나. 괜히 좀 우울해져 울상으로 변하려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 첫사랑이 누군지 몰라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려진 얼굴 밑으로 도영이 입술을 물어뜯었다. 부스럭 소리와 함께 재현이 도영의 위로 올라탔다. 얼굴을 가리던 도영의 두 손을 붙잡고 재현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추면서도 자신에게 눈을 떼지 않는 재현 때문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스틱스강에 맹세하노니 이 남자에게 내 삶을 바쳤노라."

 

 

말을 마친 재현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다. 웃고 있는 재현을 보자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투명한 막이 팡하고 터진 것만 같았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었구나. 왜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왜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부정하고 있었을까. 도영을 괴롭히던 답답함이 사라졌다. 도영이 두 손으로 재현이 볼을 감싸 쥐고 다시 짧게 입을 맞추었다. 도영이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굳어진 재현을 보고 웃었다. 말갛게 웃는 도영을 보는 재현의 귀에 상투스가 울리는 것 같았다. 촉촉한 입술도 예쁘게 눈을 접어가며 웃는 얼굴도 모두 재현의 정신을 쏙 빼앗아갔다. 재현이 참지 못하고 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도영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잘근잘근 씹으니 아래에서 작게 몸을 떠는 도영이 느껴졌다. 재현이 도영의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맨살에 닿는 차가운 손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싫으면 말 해줘요. 재현의 금안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가는 듯한 반짝이는 두 눈을 도영은 사랑했다. 애초에 도영의 의사를 물으면서도 자신을 지분거리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도영이 대답 없이 재현의 입술에 입 맞췄다.

 

 

 

...

 

 

 

기운이 빠져 누워있는 도영의 품을 재현이 파고 들어갔다. 덩치 차이 때문에 재현이 안긴 것이 아니라 도영이 안긴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온몸이 엉망이었다.

 

 

“근데 왜 피한 건지 알려줄 수 있어요?”

 

 

도영이 재현의 말에 괜히 찔려서 못들은 척 눈을 감았다. 자존심에 질투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말해줘요. 뭔지 고쳐나가게. 너는 이 상황에서도 되게 로맨틱하구나. 잘못한 것이라고는 하나 없는데 알려달라며 고쳐나가겠다는 재현에 도영이 왠지 창피해졌다. 쪽팔려서 어떻게 말해. 얼굴도 모르는 네 첫사랑 상대가 질투 나서 그랬다고. 도영이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곤 꼼지락 손을 움직여 이불을 끌어나 얼굴까지 올렸다. 그에 재현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이 형. 뭔가 있구나. 재현이 이불을 걷어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알려줘요.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집요하게 쫓아오는 시선에 도영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네, 첫사랑..”

 

 

웅얼거리는 도영의 말에 재현이 귀를 들이밀고 다시 말해달라고 재촉했다. 이상하게 또박또박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끝이 흐려졌다. 아. 창피해. 네 첫사랑 때문에 질투 나서 그랬어. 도영이 크게 소리치고 재현의 손에서 이불을 뺏어다가 얼굴에 덮었다. 잠깐동안 정적이 흐르고 크게 웃는 재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거 때문이었어요? 재현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괜히 열이 받아 도영이 이불을 치우곤 소리 질렀다.

 

 

“야, 나는 심각했거든?”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찌르르 아파오는 허리에 다시 침대에 몸을 맡겼다. 눈을 흘기며 자신을 노려보는 도영에 재현이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 재현이 빨개진 도영의 얼굴을 붙잡고 연신 입을 맞춰왔다. 얘가 왜 이래 정말, 제 첫사랑한테 질투했어요? 애 다루듯 자신을 달래는 재현의 말투에 도영이 아프지 않게 재현에게 주먹질했다. 엄살을 부리는 재현에 도영이 등을 돌려 누웠다. 재현이 등을 돌린 도영을 감싸 안았다.

 

 

“궁금하죠? 제 첫사랑.”

 

 

아, 별로 안 궁금해. 그럼 말하지 말까요? 도영이 고민에 휩싸였다. 이걸 물어봐야 해? 말아야 해? 조그마한 머리통을 열심히 굴려 생각했다. 어차피 스틱스강에 맹세도 해서 내껀데 그냥 물어볼까? 아무 말없는 도영의 머리통에 재현이 연신 뽀뽀해댔다. 알려줘. 네? 알려달라구. 도영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삐쭉삐쭉 거리는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제, 첫사랑이 누구냐면요.”

 

 

도영이 신경 안 쓰는 척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움찔거리는 머리통에 재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도시태권도 노란띠 김도영이예요.”

 

 

도시 태권도 노란띠 김도영? 도영의 머릿속에 어릴 적 다니던 태권도장이 스쳐 지나갔다. 도영이 놀라 고개를 돌려 재현을 쳐다봤다. 웃는 재현의 볼에 위치한 보조개가 한 아이의 보조개와 겹쳐졌다. 울면서 자신의 품에 파고들던 예쁘장한 남자아이. 재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도영을 껴안았다.

 

 

“도시 태권도 다니시던 김도영씨 이제 기억이 나시나요?”

 

 

일곱 살 정재현은 지금 여덟 살 첫사랑을 마주 보고 입을 맞춘다. 여덟 살 김도영이 자신을 껴안았던 것처럼 열아홉 정재현은 스무 살 김도영을 껴안았다. 스틱스 강에 맹세하기 전부터 너의 것이었던 내가, 평생 너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비로소 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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