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리의 사정 *재도잼
나재
1
학교에 내가 싫어하는 놈이 한 명 있는데 이름은 정윤오고 공부를 졸라 잘 하고, 돈도 졸라 많은데 얼굴까지 졸라 잘생겼다. 걔는 내가 피똥 싸가며 겨우 앉은 1등 자리를 그 다음 시험에서 차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애였다. 점수차라도 많이 나면 할 말이 없는데 꼭 한두 문제 차이로 1등을 뺏기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지난 중간 고사 때는 쫓아가서 너는 집에 돈도 많은 애가 욕심이 과한 게 아니냐 따지고 싶기도 했지만,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는 이성의 끈을 붙잡으며 참았다.
뭐 어차피 걔나 나나 불쌍하다는 소리 듣는 건 매한가지였다. 걔는 엄마가 없었고, 나는 아빠가 없었으니까. 나란히 전교 1,2등을 해먹으며 각종 경시대회를 휩쓸어도 주변에서는 동경보다는 동정을 했다. 자기 자식들은 대치동에 일타 강사를 데려와 과외 선생으로 붙여도 백 점 한 번을 못 맞는데 그런 건 쪽팔린 줄도 모르고 애비, 애미도 없는 애들이 참 열심히 산다며 후려쳤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을 하지 어른들은 매번 그렇게 정신 승리를 했다. 쯧.
걔를 보면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 치는데 그게 꽤 기분이 더럽다. 분노. 질투. 짜증 그리고 약간의 동정. 웃기는 소리지만 나도 걔를 동정한다. 걔 엄마는 걔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것도 자살. 떠들어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워들은 바로는 산후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었단다. 나는 엄마가 있는데 쟤는 엄마가 없으니 불쌍하다. 라는 식의 알기 쉽고 값싼 동정은 아니었다. 그럴 위인도 못 되었고. 그냥 나는 내가 불쌍했고, 또 걔가 불쌍했다.
가끔씩 걔가 나랑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 일부러 얼굴을 구기거나 미친놈처럼 웃었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있어야 한다면 차라리 미친놈 쪽이 나았다. 걔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든 말든 묵묵히 저 할 일만 했다. 독한 놈. 나도 독하다는 소리 꽤 듣지만 어떻게 해도 걔는 못 이길 것 같았다.
2
개천에서 난 용이 꿈이었다. 흙수저 출신임에도 떳떳하게 성공하고 싶은 원대한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더 발악했고 결과는 매번 만족스러웠다. 더이상 바람 피워서 집 나간 아빠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냥 내게는 아빠란 존재 자체가 무의미 했다. 사랑스러운 우리 엄마는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곧 내게 아빠가 생길지도 모른다며 좋아했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물기가 마르지 않던 손에서는 언젠가부터 핸드크림 향이 나기 시작했고, 목에는 난생 처음 보는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24시 식당에서 하던 허드렛일도 관둔지 오래임에도 내 급식비는 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엄마가 웬 엄한 놈한테 꽂혀 더 고생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나날이 얼굴에 꽃이 피는 걸 보고 마음을 놨다. 엄마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다.
엄마는 그 남자와 결혼할 생각인지 나에게도 소개해주고 싶어 했다. 결혼까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서 몇 번을 거절했는데 생각보다 굳건한 엄마의 태도에 포기했다. 익숙한 교복 대신 새 니트를 입었다. 아저씨가 사준 거니 꼭 입으라는 엄마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꺼낸 것이었다. 포장도 뜯지 않아 무슨 색인지도 몰랐던 니트는 짙은 보라색이었다. 보라색은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었고, 남자가 센스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3
이런 걸 신의 농간이라고 하나. 새 아버지가 될 사람을 소개받는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정윤오였다. 얘는 내가 나올 걸 알고 있던 모양인지 놀란 기색 하나 없었다. 엄마와도 반갑게 인사하는 걸 보니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던 모양이다. 이 자리에서 나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될 사람 둘만 신나 보였다. 정윤오는 묵묵히 밥을 먹었고 나는 밥알이 목구멍에서 안 넘어가기에 10분째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빨리 자리를 파하고 집에 가서 풀던 영어 문제집이나 마저 풀고 싶었다. 정윤오의 아빠가 내게 제 아들과 아는 사이냐며 친근하게 물어왔다. 아주 조금 역겨웠다. 되새김질까지 해서 겨우 넘긴 밥이 다시 넘어올 것 같았다.
"아뇨. 오늘 처음 봐요."
"그래? 같은 학교라 알 줄 알았는데."
허. 저 대답은 내가 한 게 아니다. 질문을 가로챘다. 우리가 오늘 처음 본다고. 나를 모른다고. 네가? 어이가 없었다. 몰래 정윤오를 흘겨봤다. 저 뻔뻔한 새끼. 내가 쳐다보든 말든 쟤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저는 알아요. 가끔 마주쳐서."
정윤오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기에 이마를 긁는 척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줬다. 정윤오가 웃었다. 정확히 말하면 '비'웃었다. 욕한 건 난데 기분이 나쁜 것도 나였다. 앞으로는 학교에서 둘이 만나면 인사하고 친하게 지내렴. 정윤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이를 깍 깨물고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인사는 무슨. 둘이 만나면 혀부터 섞느라 바빠요. 아저씨. 턱 끝까지 들어찬 말을 간신히 끌어내렸다.
4
정윤오와 그렇고 그런 관계로 지낸 지는 꽤 됐다. 처음 입술을 부닥쳤을 때의 느낌이 생생하다. 내가 먼저 입 맞췄고 혀를 넣은 건 정윤오였다. 나는 그냥 딸기맛 사탕을 먹고 있는 정윤오의 입술에서도 딸기맛이 날지 궁금했던 건데 걔는 혀를 밀어 넣었다. 왜 지 혼자 오바하지? 아무튼 우리는 딸기향이 다 사라질 때까지 키스했다. 퉁퉁 불어터진 입술로 듣는 오후 수업은 하나도 집중이 되지 않았고 그건 정윤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수업이 끝나자 마자 걔가 우리 반으로 나를 찾으러 왔거든. 앞에서 빠르게 걷던 정윤오는 내 손목을 잡아 끌지도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걸음이 느린 내가 더 조급한 것 같았다. 그것도 재수없어. 아무튼 정윤오와 나는 그날 갈 데까지 갔다.
그 후로도 우린 종종 서로를 찾았고, 바로 두 시간 전에도 배를 맞대고 있었다. 근데 저 망할 놈이 고상 떨며 모른 척하는 게 아니꼬워 죽겠다. 내 머리칼을 쥐고 정신없이 박아 대던 걔는 어디 갔는지 조신하게 앉아 있는 꼴이 웃겼다.
어쩐지 나만 불편한 것 같은 식사가 끝났다. 아저씨와 엄마는 서로 계산을 하겠다며 투닥거리며 룸을 벗어났고 나는 자세를 풀고 삐딱하게 앉아 정윤오를 쳐다봤다. 야. 줄곧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정윤오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나를 모른다고?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며 물었다. 정윤오는 언제나 바로 대답하는 법이 없다. 물어본 사람만 답답해 뒤지지.
"동영아."
유치하게 굴지마.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정윤오가 덧붙인 말은 더 가관이었다.
"그렇다고 어른들한테 오늘도 침대에서 같이 뒹굴다 왔다고 대답할 수는 없잖아."
안 그러냐며 웃는 정윤오의 뺨을 한 대만 때릴 수 있다면. 정말 딱 한 대만.
"생각 좀 하고 살자, 우리."
존나 재수 없어. 정윤오.
5
아저씨와 그의 아들이 어떤 것 같냐며 끈질기게 물어오는 엄마를 피해 나재민의 집에 눌러 앉은 지 이틀째였다. 나재민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한 동네 동생인데 얘 괴롭히는 새끼들을 내가 다 패 주고 다녔다.
"그러면 형 이제 걔랑 형제 되는 거야?"
"야 소름 돋아. 그런 말 하지 마."
팔을 벅벅 긁었다. 그렇게 싫냐고 물어보는 나재민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얘는 내가 정윤오랑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지 모르고 있다. 나재민이 알게 되는 날이면 걔를 죽일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어도 반 정도는 사람 구실을 못하게 만들겠지. 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쳐다보는 눈이 착해 빠졌다. 원래 이런 눈을 하고 있는 애들이 미치면 답이 없다.
나재민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했다.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정윤오와 처음 키스한 날 퉁퉁 불어터진 내 입술을 보고 길길이 날뛰는 걸 달래느라 고생 좀 했다. 매운 걸 먹어서 그렇다고 둘러댔다. 학교가 달라서 다행이지 같은 학교에 다녔으면 내가 정윤오와 섹스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섹스는커녕 말도 못 걸었겠지.
얘가 나한테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잘생긴 애가 졸졸 따라다니며 캐묻는 게 귀엽기도 하고 도를 넘지는 않아서 내버려 뒀다. 예전에 한 번 날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하길래 그냥 그런 줄 알고 사는 중이다. 복잡한 건 딱 질색이었다.
6
근데 씨발. 세상에서 가장 심플하던 나와 정윤오의 사이가 세상에서 가장 복잡해지게 생겼으니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정윤오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한 지붕 아래 사는 사이끼리 섹스하는 취미는 없다. 도덕 윤리 그런 거 다 좆 까세요 하는 성품이 못된다는 말이다. 아무튼 내가 나재민의 집에 은신해 있는 동안에도 정윤오는 평온했다. 쟤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신명나게 배 맞대다가 하루 아침에 숟가락을 부딪치면서 살게 생겼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야. 잠깐 나와봐."
나는 참지 않긔.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정윤오의 반을 찾아갔다. 그 와중에도 필통에 샤프를 집어넣어 정리하는 정윤오가 대단했다. 팔을 잡아 끌었다. 나는 정윤오처럼 신사적이지 못하다. 끌면 끄는 대로 따라왔다.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까지 와서야 팔을 놨다.
"정윤오."
"왜?"
"넌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정윤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우 같은 새끼. 저거 지금 다 알아들었으면서 저러는 거다. 분명해. 나는 잇새로 새나오는 욕을 간신히 씹어 넘기고 다시 말해줬다. 이제 너랑 나랑 한 집에 같이 살아야 할 지도 모르는데 정말 괜찮냐고. 그제야 아. 하고 박 터지는 소리를 낸다. 답답했다.
"그다지."
그다지? 그다지이? 한참을 고민해 놓고 꺼낸다는 대답이 저게 끝이었다. 지금껏 저 혼자 고민하고 끙끙 앓았던 게 후회됐다. 정윤오의 생각 없는 모먼트에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렇구나. 아무렇지도 않구나. 내가 유난인 거였구나.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정윤오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내게 물었다.
"뭐가 문젠데."
"그걸 지금 몰라서 묻는 거냐고."
"김동영."
"왜."
너 나한테 감정 있어? 이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감정은 무슨. 너야 말로 나한테 억하심정 있는 거 아니니. 라고 되 물으려다 말았다. 그건 정말 오바 쌈바에 난리 부르스까지 추게 되는 꼴일 것 같아서.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대답했다. 내가 정윤오한테 가질 만한 감정이라면.
"있지."
나는 네가 불쌍하지.
7
집 나온 지 5일째 되던 날 엄마는 본인의 결혼을 문자로 통보했다. 머리 다 큰 아들의 반대 따위는 신경 안 쓰겠다 이거지. 문자를 확인하자 마자 다시 짐을 싸 들고 집으로 향했다. 나재민은 방문에 삐딱하게 기대서 짐을 챙기는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딱 봐도 불만 있어 보였지만 무시했다. 투정은 한 번 받아 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절대 여지를 주지 않는다. 나재민의 마음은 알지만 나는 고작 하나 있는 친구를 잃고 싶진 않았다.
"아들의 반대는 필요 없다 이거지."
"부모가 다 그렇지."
"아니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니야? 아들이 집을 나갔는데 그 사이에 날을 잡아?"
"차라리 옆에 붙어서 식음전폐라도 하지 그랬어."
"아 진짜. 그럴 걸 그랬나."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는."
주말에 학교 도서관까지 와서 정윤오를 괴롭혔다. 정확히는 신세한탄. 정윤오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은 얘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정윤오는 정갈한 글씨로 수식을 적어 내려가면서도 내 말에는 꼬박꼬박 대답했다. 턱을 괴고 정윤오를 쳐다봤다. 튀어나온 눈썹뼈나 곧게 뻗은 코에 매끈한 입술까지 참 가질 건 다 가진 놈이다. 저 얼굴을 하고서 성격은 그렇게 예민하고 더럽다니 신이 공평한 것 같기도 하고. 의미 없는 생각들을 쌓았다.
그러다가 정윤오의 하얀 손을 툭툭 건드렸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심심해서. 고생 한 번 해본 적 없는 것 같은 손을 괴롭히고 싶어서. 별로 착하지 못한 마음이었다. 정윤오는 신경도 안 썼다. 이거 묘하게 승부욕 생기네. 조금 더 집요하게 손을 쫓았다. 손가락으로 손등을 건드리기도 하고 손가락 위를 쓸어 올리기도 했다. 그제야 움찔한 정윤오가 반대쪽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떼어내더니 깍지를 낀다.
"뭐야?"
"이거 다 하고 놀아줄 테니까 좀 얌전히 있어."
"누가 놀아 달라고 그러냐."
"그럼 뭔데."
그럼 뭔데.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 그럼 뭐지. 난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정윤오는 말이 없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 또 진 기분. 내게는 정윤오에게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기는 싫다. 내 언젠가는 저 오만한 놈의 머리 꼭대기에 서리라. 죄 많은 정윤오를 째려보고 잡힌 손을 빼내려는데 꼼짝도 안 한다. 힘은 또 왜 이렇게 좋은 건데?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능력껏 해 봐."
"재밌니?"
"응."
"뭐가 재밌니."
"너 지금 얼굴 빨개."
그거 보는 게 재밌어.
8
정윤오의 집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는 말에 꾸역꾸역 짐을 쌌다. 머릿속에 의문이 잔뜩이었지만 용돈을 올려준다는 말에 닥치고 있었다. 어차피 예상된 전개였다. 그 집에는 우리 집 거실보다 큰 내 방이 있을 거고, 귀여운 강아지도 있으니 그걸 위안 삼았다.
엄마는 많이 들떠 있었다. 오래된 식기를 정리하고, 먼지 쌓인 책들을 버렸더니 고작 큰 가방 하나 나오는 본인의 짐이 초라하지도 않은 지 웃기만 했다. 집안 곳곳을 쏘다니며 손때 묻은 공간과 이별하는 엄마는 홀가분해 보였다. 처음 본 엄마의 청춘이 눈물 나게 속상했다. 그래 진짜 엄마만 행복하면 됐지. 그 생각을 딱 10초 했다.
10초 뒤에 정윤오가 나타나서 착한 아들 코스프레는 아작이 났다. 이삿짐 챙기는 걸 도와주러 왔다는데 굳이? n년 동안 살던 나의 작고 소중한 보금자리를 정윤오에게 들킨 게 솔직히 좀 쪽팔렸다. 그나마 짐을 다 빼서 이 정도지 원래는 더 좁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저 부잣집 도련님은 무슨 반응을 할까. 순수한 열등감에서 빚어진 감정이었다. 정윤오는 별 생각 없는 표정으로 집 안을 둘러봤다.
"택시 타고 가면 된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꼭 직접 가서 모셔 오라고 하셨어요. 기사 아저씨도 아래 계세요."
"정말? 빨리 정리해야겠네."
"천천히 하셔도 돼요. 저는 동영이랑 방에 있을게요."
동영이랑? 방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인 정윤오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욕지기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정윤오를 내 방에 밀어 넣었다. 가까워 보이는 우리 둘 사이에 감동받은 엄마가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엄마. 그거 아니야. 아니라고.
방 한 가운데 오도카니 서있는 정윤오를 무시하고 짐을 마저 챙겼다. 내 방에 정윤오라. 이질감이 느껴졌다. 야 좀 앉아. 먼지 날리게 서 있지 말고.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더니 별 말없이 걸터 앉는다. 어쩐지 내 등에 박혀 있는 것 같은 시선을 무시하고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을 가방에 넣었다.
"이건 안 챙겨?"
뒤를 돌아보니 침대에 앉아 팬티를 들고 있는 정윤오가 보였다. 저 미친놈이. 어쩐지 얌전하다 싶었지. 저게 내 팬티라는 걸 인지하자 마자 몸을 날려 정윤오에게서 팬티를 빼앗았고 덕분에 내가 정윤오를 침대에 눕힌 꼴이 됐다. 너무 적극적인 거 아니냐는 정윤오의 말에 개소리 말라며 일어나려는데 내 허리를 잡는다.
"뭐 하는 거야."
"키스 할래?"
"돌았니 진짜."
"하루 이틀인가."
그렇지. 정윤오가 미친 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임마. 나는 정윤오를 한 번 더 밀어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순순히 밀려난다. 정윤오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말이야. 적어도 그런 말 할 때는 좀 다른 표정을 지어 줄래. 내 말에 정윤오가 한 쪽 눈썹을 찌푸렸다가 뜬다.
"됐다, 됐어."
너한테 뭘 바라냐, 내가. 애초에 뭘 바라고 말고 할 사이가 아니었다. 가타부타할 것 없이 서로 마음이 동하면 입을 맞추고 배를 맞댔지. 깔끔해도 더럽게 깔끔한 관계. 갑자기 속이 쓰렸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책장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쓸어 담았다. 캐리어에 열 맞춰 들어가 있던 물건들이 뒤엉킨다. 정윤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날 보고 있을까. 또 그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을까.
나는 왜 정윤오만 생각하면 이렇게 속이 뒤틀리고 열불이 나는 건지 모르겠다. 이것도 열등감의 일종인가. 사실 정윤오 한 번 이겨 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내 꼴을 보는 게 싫다. 쟤 같은 거 없는 셈 치고 살면 되는 것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왜냐면 나는 정윤오를,
"그럼 뭐 할래."
"....."
"연애할까."
9
뭐 먹을까. 피자 먹을래? 하는 수준의 말투로 뱉은 말은 가관이었다. 여전히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정윤오는 무덤덤했다. 그렇다고 장난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정윤오가 장난을 치는 스타일도 아니고. 나는 상황 파악을 위해 약 3분가량을 투자했고 그래도 정윤오의 생각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이건 아마 죽을 때까지 불가능한 일이리라.
정윤오는 내가 들고 있는 책더미를 가져가서 캐리어에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역시 그냥 한 말인가. 내가 엉망으로 던져 놓은 물건들도 정리했다. 캐리어 한 면이 완전히 빈 걸 보고 저기엔 뭘 넣어야 하지라는 생각보다는 이 방에서 당장 정윤오를 내쫓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 생각을 눈치챈 건지 아니면 저도 이 공간이 불편한 건지 마저 정리하고 나오라며 문 쪽으로 향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을 고르시오.
1. 정윤오를 붙잡고 무슨 뜻인지 물어본다.
2. 그냥 보낸다.
3. 헛소리를 했으니 존나 개 팬다.
마음은 3번이었지만 나는 2번을 선택했다. 지금은 그게 최선이었다. 문고리를 잡은 정윤오가 등을 돌려 나를 쳐다본다.
"한 번 생각해 봐."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정윤오가 불편해 죽겠다.
10
"걔가 그랬다고?"
나는 그 길로 나재민에게 쪼르르 달려가 말했다. 이런 얘기를 하기에 적합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얘 말고는 또 어디 말할 구석이 없었다. 나재민은 정윤오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했는 지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나는 정윤오와 그렇고 그런 짓을 한 사이라는 걸 얘가 알게 됐을 때의 파장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럴 깡이 없다는 말이다.
끈질기게 묻는 스타일은 아니니 다행이었다. 나재민은 내게 너도 마음이 있냐고 물었고 나는 격하게 고개를 휘저었다. 그럴 리가. 웃기는 소리였다. 나재민은 그럼 뭐가 문제인 거냐고. 걔가 너한테 그런 말 한 게 진짜든 아니든 상관없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그래 그건 그런데."
"그런데?"
"기분 나쁘고 신경 쓰인다고."
신경이 쓰인다고? 나재민이 잘생긴 눈썹을 마구 찌푸렸다. 빡침의 전조 증상이었다. 황급히 해명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걔가 그런 소리를 한 게 짜증난다고. 내 감정과는 조금 다른 류의 표현을 끌어다 썼다. 나재민은 나를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근데 내가 왜 이 어린 놈한테 이렇게 쩔쩔매는 거지?
"형."
"난 니가 나를 그렇게 부를 때마다 무서워."
"형 걔 안 좋아해."
"맞아. 안 좋아해."
"안 좋아해야 해."
나재민은 당부하듯이 말하는 버릇이 있다. 내게만 그런 건지 다른 이들에게도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늘 저런 식으로 말했다. 내 엄마도 아니고 아빠도 아닌데 나를 물가에 내 놓은 애처럼 대했다. 내가 알겠다고 할 때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러니 이번에도 알겠다고 하면 되는데 그 말이 안 나왔다. 아 나 진짜 요즘 왜 이러지.
11
나는 이런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정윤오와 한 프레임 안에 함께 있을 거란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나란히 앉은 정윤오와 나를 보며 수군댔지만 정윤오는 스테이크를 썰어 먹기 바빴다. 나는 모르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는 게 싫어 고개를 푹 숙이고 핸드폰만 했다. 나재민을 부를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였다.
엄마와 아저씨는 테이블을 돌며 인사하기 바빴다. 두 번째 결혼인데도 할 건 다하는 게 웃겼다. 정윤오가 내 다리를 툭 친다. 너무 웃지 말란다. 아 내가 그렇게 티 나게 웃었나. 급하게 표정 관리를 했다. 괜히 흉 보일 짓 할 필요는 없지. 입술을 꾹 닫고 정윤오를 쳐다보니 아직도 열심히 먹는 중이었다.
"맛있어?"
"괜찮아."
"살 걱정은 안 해?"
"별로."
여러모로 복에 겨운 정윤오는 나를 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뭔데 또.
"너도 말랐잖아."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제일 잘 알지."
니 속옷 사이즈도 읊을 수 있, 나는 두 손으로 정윤오의 입을 막았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얘가 이런 말을 하지. 나는 불안함에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정윤오는 입이 틀어 막힌 채로 웃었다. 또 비웃는 거지 지금.
나 하나 놀리자고 이렇게 듣는 귀 많은 데서 저런 망언을 하는 건가.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시뻘개졌음을 알 수 있었다. 정윤오가 내 얼굴 빨개지는 거 보는 게 재밌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 말은 진심이었나 보다. 내가 본 정윤오 중에 지금이 제일 밝아 보였다. 망할 새끼. 이런 놈과 한 지붕 아래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벌써 아찔했다.
"저기 오신다. 표정 풀어."
정윤오는 뭐가 그렇게 잘나서 매번 여유로울까. 나만 급하고 나만 전전긍긍이다. 엄마 앞에서 큰 눈을 휘어가며 웃는 걸 보니 토기가 올랐다. 쟤 본성을 나만 안다는 거지. 어이가 없었다. 앞뒤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쟤가 하는데 나라고 못 할까. 나는 식이 끝나고 아저씨 옆에 딱 붙어 가족 사진까지 찍었다. 자연스럽게 아저씨 쪽으로 향하는 정윤오를 밀어내고 내가 섰더니 식장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대부분 이 아름다운 광경에 감동받은 듯했다. 정윤오는 뻔뻔한 나를 한 번 보더니 피식 웃고 우리 엄마 옆에 섰다. 그래. 가족 그 좆같은 거. 어디 한 번 해보자.
12
내게 가족의 기억이 좋을 리가 없다. 바람 피워서 집 나간 애비를 좋게 추억할 이유도 없다. 정윤오의 아버지 역시 믿지는 않는다. 다만 엄마가 죽을 때 까지만 옆에서 얌전히 지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내게는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었다. 굳이 원하는 포지션이 있다면 그 집안에 머무는 공기 정도.
정윤오의 집은 익숙했다. 아무도 없을 시간에 와서 뒹굴었다. 익숙하다 못해 정윤오네 강아지와도 친했다. 집에 들어오자 마자 발치에서 맴도는 강아지를 떼어 내는데 애를 써야 했다. 아저씨가 이 놈이 원래 낯을 많이 가리는데 신기하다며 껄껄 웃었고 나도 그냥 그러게요 하며 따라 웃었다.
자연스럽게 2층으로 향하는 걸음을 간신히 자제하고 아저씨에게 방은 어디냐고 물었다. 정윤오가 쓰는 방의 건너편 방일 게 뻔했지만 난 지금 이 집에 처음 온 입장이어야 했기에 모르는 척을 했다. 아저씨는 2층으로 가기 전에 계단 옆 찬장에 있는 각종 양주를 자랑했다. 저도 알아요. 그거 한 달 전에 독일 놀러갔다가 사 오셨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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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만 드시고 오세요. 저녁은 가족끼리 외식하자는 말에 나와 정윤오 둘 다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았고, 정윤오는 글쎄. 잘 모르겠다. 내 옆에 선 정윤오를 흘끔 올려다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인 엄마를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현관문이 닫히고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2층으로 향했다. 정윤오가 뒤에 따라오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게 어젯밤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정윤오와는 그냥 한 지붕 아래 사는 남남으로만 지내기로 했다. 정윤오의 의견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불편하다는데 지가 어쩔 거야.
"김동영."
방문을 여는데 정윤오가 나를 불렀다. 여기서 대답하면 지는 건데.
"왜."
나는 정윤오를 이길 생각이 있긴 한 걸까. 사람이 이렇게 쉽고 그러면 안 되는데 진짜.
"생각은 해 봤어?"
정윤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대번에 알아챘다. 저 미친 놈이 왜 저러지. 진심으로 한 소리도 아니면서 뭘 저렇게 진지하게 묻나. 생각? 당연히 해 봤다. 정윤오의 고백 같지도 않은 고백을 받은 이후로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매일 같이 정윤오 생각만 했다.
"뭘?"
뻔뻔한 대답에 정윤오의 잘빠진 왼쪽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나만 알아챌 수 있는 표정 변화였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겠지. 이번엔 내가 이겼다. 정윤오는 자존심이 상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내 물음에 별 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피식 웃는다.
그렇게 나를 이기고 싶어? 그렇게 묻는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정윤오는 나를 잘 안다. 너무 잘 알아서 죽여버리고 싶을 때가 있는데 지금이 딱 그런 마음이다. 열등감을 들키고 나니 창피함이 몰려왔다. 정윤오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떠올랐다. 유치하게 굴지 마, 동영아.
그런데 어쩌지.
정윤오가 자꾸만 나를 유치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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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오의 고백은 내 삶을 통째로 흔들기에 충분했다. 한동안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정윤오가 내게 생각은 해봤냐고 물었을 때 기뻤다. 그 고백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든 그 당시에는 내가 걔를 완벽히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윤오가 그렇게 저를 이기고 싶냐고 물었을 때는 또다시 패배감을 느꼈다. 쟤는 뭐가 그렇게 잘나서. 뭐가 그렇게 잘나서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나.
"형?"
나재민이 부르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나는 그날 바로 집을 뛰쳐나와 다시 나재민의 집에 빌붙어 있는 중이었다. 그게 벌써 이틀째. 아닌 밤중에 쳐들어온 나를 나재민은 늘 그랬듯이 이유도 묻지 않고 받아 주었다.
"머리 말려 줄까."
막 샤워를 했는지 축축한 머리를 아무렇게나 털며 방으로 들어온 나재민에게 물었더니 신나서 드라이기를 찾으러 간다. 어렸을 때는 꽤 자주 말려 줬던 것 같은데 기억이 희미한 걸 보니 정말 옛날 일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정윤오도 머리 말리는 걸 귀찮아 했는데. 언제나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몸을 섞다가 차갑다고 개지랄을 떨면 그제야 수건으로 대충 털어 말리며 이제 됐냐고 물어봤지. 생각해보면 걔도 걔 나름의 배려를 했는,
"무슨 생각해."
"어?"
"나 그 쪽 머리 탈 것 같은데?"
"아 미안 미안."
눈을 흐리게 뜨고서 쳐다보는 나재민의 시선을 피했다. 아, 지금은 너무 티 났다. 형. 나재민은 솔직한 편이었고 나는 그런 나재민에게 언제나 본심을 들키는 쪽이었다. 나는 대답없이 머리를 말렸다. 행여나 뜨거울까 온도 체크도 잊지 않았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나재민은 그에 대해 더 묻지 않는다. 그래서 얘가 편하다. 여긴 회피형 인간인 내가 도망치기에 최적의 장소다.
나재민과 함께 있는다고 해서 지나간 일들이 잊혀지는 건 아니지만 얘는 나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맛있는 것을 시켜주고, 게임을 하자며 보채고, 외출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내 옷가방을 뒤져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을 꺼냈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도망치고 싶었던 일 들에서 더 멀리 떨어지곤 했다.
나재민하고 정분이 나려면 충분히 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나재민은 선을 지켰다. 내가 입버릇처럼 내뱉는 '심플한 사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내가 타 들어갈 것만 같은 눈빛으로 쳐다보다 가도 입에서는 단내나는 말들만 골라 했다.
"재민아."
"응. 왜."
"나 그냥 여기서 살까."
내 말을 들은 나재민이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나 여기 살면 안 돼? 한 번 더 물으니 그제야 고민하는 시늉을 한다. 아무튼 한 번 말해서는 말이라고 생각도 안 하지. 나는 드라이기를 내려 놓고 신혼의 달콤함에 취한 어른들에게 출가 선언을 하기 위해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답은 예스일 것이다. 나재민이 한 번이라도 내 부탁에 거절한 적이 있었나. 내가 아무리 통계 쪽에 약하다지만 나재민에 한해서는 박사 학위증을 딴 지 오래다.
“진심이야?”
“난 늘 진심이지.”
“진심일 때 다시 와. 그때 받아 줄게.”
“진심이라니까.”
“형 지금도 정윤오 생각하잖아.”
아니야?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 상처주지마, 형. 나재민이 웃었다. 못 돼 처먹은 건 정윤오가 아니라 나구나. 내가 내려놓은 드라이기 선을 정리하고 축축한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집어넣는 나재민의 머리는 군데 군데 덜 말라 있었고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정윤오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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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안 돌아올 것처럼 굴고 나가더니 왜 벌써 와.”
잠시나마 저런 놈을 보고 싶어했던 내 자신이 수치스럽다. 계단 중간쯤 서서 묻는 정윤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주고 캐리어를 집 안으로 옮겼다. 지하상가에서 오만 원 주고 산 캐리어를 참 알차게도 써먹네. 한 쪽 바퀴의 나사가 빠져 조만간 고쳐야지 했는데 나재민이 그 잠깐 사이에 고쳐 놨는지 새 것 마냥 멀쩡했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캐리어를 질질 끌며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정윤오가 뺏어 든다.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옮기겠냐는 잔소리도 잊지 않았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를 무시하고 내 방 안까지 캐리어를 옮겨 놓은 정윤오가 내 앞에 섰다.
“가출은 즐거웠고?”
“가출은 무슨 가출. 원래도 가끔 이랬는데.”
“효자는 아니네.”
“네네. 너는 효자여서 좋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도 효자는 못 되지.”
누구 때문에. 정윤오는 돌려 말하는 걸 못했다. 제 마음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고백하지를 않나, 남의 속은 관심도 없는 듯 제멋대로 생각하고 내뱉고서 아님 말고 식의 대화 방식을 고수했다. 내가 이런 놈을… 내가… 정말 정윤오에게 내 마음을 곧이곧대로 주어도 괜찮은 걸까.
“대답은 언제쯤 해주게.”
“진심인 척하지 마.”
“척 아닌데.”
“너 나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런 말을 하는 미친 놈이 어디 있어.”
당연한 말을 하는데도 믿기가 힘든 건 얘가 정윤오라 그런 거겠지. 내가 빤히 바라보니 정윤오도 나를 그렇게 쳐다봤다. 동영아. 고작 내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귓바퀴가 간질거린다. 진짜 제대로 미쳤구나 김동영. 결국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내 쪽이었다. 정윤오가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너도 솔직해져봐, 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제일 솔직한 정윤오가 제일 솔직하지 못한 나에게 하는 충고 아닌 충고가 거슬렸다. 그것도 여력이 되는 사람이나 그러는 거지 나는 애초부터 솔직할 수가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정윤오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기 위해서는 얼만큼의 노력이 필요한 지 나는 너무 잘 안다. 정윤오에게 향하는 마음을 인정한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너는 뭐가 그렇게 다 어렵고 힘들어. 정윤오가 나로 인해 무너진다. 그 단단한 정윤오가 나한테 매달린다.
그러는 너야 말로 뭐가 부족해서 나한테 이러는데. 안 그래도 불쌍한 우리가 더 불쌍해질 필요가 있나. 여기서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연애든 뭐든 시작한다고 해서 없던 행운이 와르르 쏟아져 내릴 리도 없고.
“너도 나 좋아하잖아.”
“…….”
“아니라고도 못하면서 왜 자꾸 피해.”
내가 정윤오를 피하는 이유야 차고 넘쳤다. 잃을 게 너무 많았다. 정윤오는 몰라도 나는 엄마를 배신하고 나만 생각할 만큼 불효자는 아니었다. 내가 정윤오를 불쌍하게 여기는 만큼, 내가 불쌍했고, 엄마가 불쌍했다. 이제 겨우 꽃 피었는데 내 마음 하나 지키자고 꽃을 꺾을 수는 없었다.
“정윤오.”
너부터 생각 좀 하고 살아. 다 아는 척하지 마. 내가 정말 너를 좋아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술술 읊는 내가 웃겼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대로 정윤오를 놓치게 될 까봐. 정윤오와 예전만도 못한 관계가 될 까봐.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달라지는 게 왜 없어.”
“어린애처럼 굴지 마.”
“처음이야.”
“…..”
“네가 처음이라고.”
정윤오가 그래서 쉽게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첫사랑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좆 같은 일이구나. 정윤오는 내가 더 밀어낼 수도 없게 파고 들었다. 정말 어쩌려고 이래. 최후의 발악이었다. 이제는 나도 정윤오에게 매달리는 입장이었다. 제발 나를 좀 놔 달라고. 여기서 더 붙잡으면 나는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일을 벌일 사람이라고. 애원하듯 뱉었다.
아래층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정윤오는 내 팔을 끌어 자신의 방으로 데려 갔다. 나를 문 쪽에 세워 둔 정윤오가 물었다.
“김동영.”
“엄마 왔어. 놔.”
“내가 다 책임질 수 있다고 하면,”
“너 진짜 헛소리,”
“나한테 올래?”
정윤오 역시 최후의 발악이었다. 등 뒤로 엄마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고 나는 나와 내가 아닌 누군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진짜 책임질 수 있어?”
다급했다. 나는 이렇게 물은 것을 평생 후회할 게 분명했고,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정윤오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갈게.”
잘난 네가 나 책임져, 정윤오.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기분이 아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