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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미학이란

​명태

김도영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것은 애인이 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불편하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감도영의 한 학번 위의 선배이자 학회장인 임희주였다. 김도영과 임희주 사이의 악감정이 생길만한 일이 있었다거나 그냥 맘에 안 드는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딱 하나였다. 김도영의 전 남자친구가 지금 임희주와 사귀고 있는 게 문제였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어금니를 몽창 뽑아버리거나 어거지로 바꿔지지도 않는 국적을 바꾸지 않는 이상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건 당연했다. 그건 김도영한테는 해당되는 얘기였고, 초록색 여권이 아닌 나카모토 유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나유타 씨발 새끼.”

 

 

삼일 밤낮을 울어대며 종강과 동시에 휴학 신청을 했다. 휴학 신청 기간이 아닌데도 학생지원과에 무작정 전화해 군대를 가야 하니 빨리 휴학 신청을 받아달라고 칭얼거렸다. 학과 사무실에서 휴학 대리 신청도 가능하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지금 세상에서 가장 비련하고 가련한 입대 D-38인 김도영에게는 들리지도 않는 일이었다. 결국 잔뜩 코를 먹어 젖은 목소리의 김도영이 이겼다. 신청 기간에 신청하면 그냥 버튼 한 번이면 될 일을 팩스까지 보내며 휴학 신청을 했다. 동기에게 개강 직전 휴학 신청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라는 신신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때는 이미 김도영과 나유타는 헤어진 상태였다. 남이 보면 김도영의 군대를 문제 삼아 나카모토 유타가 헤어짐을 고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헤어지자는 말은 김도영이 먼저 했다. 심지어 나카모토는 김도영을 기다리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기다리면 되지.’

‘형은 그런 말이 쉽게 나와?’

‘왜?’

‘2년이야 2년. 나 휴학하고 군대 갔다 오면 형 벌써 4학년이야. 나는 2학년인데 형이 4학년이면 만날 시간도 없을 거고 아니, 다 떠나서 형이 어떻게 2년을 기다려.’

‘그럼 도영 너 다시 올 때까지 나도 휴학할게.’

‘그게 그렇게 쉽게 할 말이야!?’

‘혹시 나랑 헤어지고 싶은데 내가 지금 눈치 없이 계속 기다린다고 하는 거야?’

‘헤어지고 싶으면 내가 이렇겠어!?’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지 김도영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다 현기증이 나 아무도 없는 과방 소파에 쓰러졌다. 식식거리는 숨소리 위로 나카모토의 한숨 소리가 겹쳤다.

 

 

‘도영. 나는 네가 기다려달라고 말 안 해도 헤어지지 않으면 당연히 도영이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릴 거고, 그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어쨌든 지금 한국에 있고, 아직까지 돌아갈 생각도 없으니까. 그게 2년 뒤라고 해도 바뀌는 건 없어.’

 

 

그래서 문제였다. 나카모토가 졸업을 하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말로는 졸업하고 취업까지 한국에서 하려고 왔다고 하지만 사실 누구나 타지에 나와 살다 보면 언제든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고향이 아니니까. 그리고 이건 김도영의 크나큰 실수였다.

 

 

‘형한테 부담 주기 싫어.’

‘내가 부담이 아니라는데 왜 그렇게 생각해?’

‘형한테 부담이 아니더라도 내가 그렇게 느끼니까.’

‘김도영 너 진짜 이기적이다.’

 

 

소파에 널브러진 김도영 앞을 지나가는 나카모토가 테이블 위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과방의 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그렇게 김도영의 대학교 첫 연애가 끝났다. 당연히 괜찮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영화 주인공의 희망찬 대사 같은 건 없었다. 자기가 헤어지자고 말했으면서도 30분 뒤 과방에서 나오는 김도영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넓고 넓은 캠퍼스를 가로질러 정문을 향하면서도 구태여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김도영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픈 시련을 겪은 사람이니까. 어떻게 따라다녀서 얻은 첫사랑이었는데 나라가 나를 이렇게 갈라놓을 수가 있어. 자기가 꾸역꾸역 헤어져 놓고 잘도 남의 탓을 했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알바를 하던 카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가 봐도 울었다는 목소리로 ‘사장님…. 저 군대 가요.’ 한마디로 알바를 그만뒀다. 아직 한 달도 더 남았는데 그 시간을 알바로 허비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입대 전 남은 시간을 알차게 술독에 빠져 살면서도 김도영은 꿋꿋하게 나카모토를 욕했다. 술만 먹으면 더 그랬다. 무슨 얘기를 하든 마지막에는 결국 ‘나유타 ~새끼’로 끝났다. 매일매일 바뀌는 동물이 더는 없을 지경이었다.

 

훈련소로 향하는 동안은 담담했다. 그 전날 머리를 밀며 또 채신머리없이 오열했다. 김도영의 머리를 밀어주는 사람이 고등학교 동창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미용실에서 쫓겨날 만한 추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 차를 타고 논산으로 향하는 내내 멍하니 바깥 경치나 구경했다.

 

김도영이 산속 깊은 곳에서 매일 뛰고 구르고 총을 쏘는 동안 하루아침에 덜렁 혼자가 된 나카모토는 신청 기간에 맞춰 휴학 신청서를 냈다. 진짜 휴학을 할 생각이었는데 길길이 날뛰는 김도영 때문에 죄없이 헤어졌다. 죄가 있다면 한국인이 아니라는 거였는데, 그건 진짜 죄가 아니니 정말 죄가 없었다.

 

김도영을 기다리려고 휴학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기다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유타의 동기들은 이미 빠르면 작년에 군대를 갔고, 올해에는 남은 동기가 별로 없을 정도로 다들 나라에 의무를 다하러 갔다. 그래서 어느 정도 한국 군대에 대해 들었던 나카모토는 말 그대로 하지 않아도 될 ‘고무신’을 자처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김도영이 왜 그렇게 스스로 부담을 가지면서까지 헤어짐을 고수했는지 알 수 없었다.

 

김도영을 기다리며 2년을 쉰다고 해서 자신에게 해가 될 건 없었다. 오히려 한국에 오면서 생각해왔던 일들을 경험해 볼 수도 있는 시간이었고, 하고 싶은 것도, 그로 인해서 해야 할 일도 많을 나카모토에게는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 라는 얘기였다.

 

어쨌든 그래서 오기 비슷한 감정으로 김도영을 따라 휴학 신청서를 냈다. 그런다고 해서 김도영이 바로 알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알게 되든 복학을 할 때까지 모르든 휴학을 했다. 그리고, 김도영의 말대로 자신이 졸업반이 됐을 때 복학할 김도영을 상상하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못해도 1년은 여유롭게 캠퍼스 커플 노릇을 좀 하고 싶긴 했다.

 

그리고 김도영은 나카모토가 휴학을 했다는 걸 자대배치까지 받고 난 후 첫 휴가가 되어서야 들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하고 소리쳐봐야 동기 중에는 저와 나카모토가 사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짧은 머리를 가리려고 한껏 눌러쓴 모자의 챙만 만지작거리며 한참이고 술잔을 멈췄던 김동영은 계속해서 핸드폰 화면을 켰다 끄기를 반복했다. 급한 대로 엄마의 핸드폰을 들고 나왔지만 나카모토의 번호는 아직 눈을 감고도 누를 수 있었다.

 

그러면 안 됐는데, 그냥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김도영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자꾸만 안절부절 만져대는 핸드폰에 잔뜩 쿠사리를 먹고서야 넣어 뒀던 김도영은 집에 갈 때쯤엔 다시 제가 눈을 어떻게 떴었는지조차 헷갈릴 만큼 취해있었다.

 

눈을 어떻게 뜨는지도 모르면서 핸드폰은 켤 수 있었다. 이미 이성은 날아갔고, 자아도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겨우겨우 잘 버텨 집 앞까지 온 김도영은 속을 다 게운 후에야 주머니에 꽁꽁 묶여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네를 타자니 보기만 해도 울렁거려 원통 미끄럼틀에 걸터앉아 화면을 톡톡 치자 화면 가득 저와 제 형의 얼굴이 뜬다. 엄마는 언제적 사진인데 아직도 이걸 해놨어. 하면서도 잠금을 풀자 이번엔 아버지의 얼굴이 홈 화면 가득 떴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통화목록으로 들어가자 온통 하트가 붙은 이름들이 늘어섰다. 모두 아버지와 형의 이름 앞뒤로 붙은 빨간 하트들이 통화목록에 가득했다. 아버지와 형, 저까지 전부 이름 앞에 ’사랑하는~‘이 붙어있었다. 통화목록에 제 번호는 없었지만, 굳이 연락처 목록에 들어가서 보고 나서야 김도영은 키패드를 눌렀다.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익숙한 컬러링이 들려 그대로 미끄럼틀 위로 누웠다. 버석버석한 흙이 등 뒤로 눌렸지만 그것보다는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여보세요.]

 

 

몇 개월 만에 들은 목소리는 딱 3초 만에 김도영을 울릴 수 있었다.

 

 

[누구세요.]

 

 

김도영이 잘 알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나카모토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전화가 아닐 때의 전화를 받는 목소리였다. 별일도 아닌 일로 전화를 했을 때 들렸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부드럽게 풀려 [응, 도영.] 하고 불렸던 게 생각이나 김도영은 또 울컥 목이 막혔다. 사랑하는 남편, 큰아들, 막내 앞뒤로 새빨간 하트가 붙은 통화목록 사이로 낯선 번호가 자리한 게, 그게 그렇게나 슬펐다.

 

 

[여보세요?]

“흐앙….”

 

 

말하기도 전에 울음이 먼저 터진 김도영은 점점 어지러워지는 머리에 몸을 일으켜 비좁은 미끄럼틀에 다리를 올리고 앉았다. 예전부터 좀 더 나이에 맞게 점잖게 울고 싶었는데 그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김도영?]

“…도영이라고 해.”

 

 

울면서도 제 이름 석 자를 부르는 게 맘에 안 들어 꽉 막힌 목소리로 이름만 부르라고 했다. 말을 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도영.]

“도영아. 라고 해.”

 

 

어이가 없는 김에 그냥 좀 더 없기로 했다.

 

 

[도영아.]

“….”

[왜 전화했어?]

 

 

그때야 김도영은 제가 나카모토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꼭 꾸역꾸역 헤어지자는 듯 말했었지, 나. 싫다는 사람한테 무조건 헤어져야만 하는 것처럼 그랬었지.

 

 

“야. 나카모토. 너… 너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들어… 대답도 하지 마! 근데, 근데 끊지도 마. 내 말 들어줘…….”

[……]

 

 

그리고는 정말 아무 말도 안 들려 슬쩍 화면을 확인한 김도영은 조금 안심했다. 끊은 줄 알았네….

 

 

“니가 몬데 휴학을 해? 휴학하지 말라구 그렇게 얘기했는데 왜, 왜 사람 기다리는 것처럼 휴학까지 해? 왜 나 김칫국 마시게 하냐고. 어?”

[……]

“보고, 보고 싶어지게.”

 

 

다시 엉엉 우는 김도영의 목소리가 줄어들 때야 나카모토가 다시 김도영을 불렀다.

 

 

[도영아.]

“그렇게 부르지 마.”

 

 

도대체 어떡하라는 건지. 스피커 너머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私は君を待っている。]

 

 

까까머리의 김도영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놀이터가 떠나가라 엉엉 울었다.

 

 

-

 

 

[어제는 미안했어 이제 다시 술 먹고 연락 안 할게 잘 지내]

 

 

그리고, 김도영은 나카모토의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남아있는 18분의 통화목록을 삭제하기 전에 보낸 문자메시지 한 통을 마지막으로 김도영은 빌렸던 핸드폰에서 나카모토의 기록을 지웠다. 혹시나 답장이 올까 싶어 그 후로도 한 시간 동안 더 핸드폰을 잡고 있다 휴가에 나온 아들을 버려두고 모임을 간다는 엄마의 호통에 조용히 핸드폰을 반납했다. 그 뒤로도 피시방에 가서 정말 진짜 혹시나 마지막으로 연락이 온 건 없을까 PC 카톡을 켜놔도 정작 마음에 걸리는 사람의 연락은 없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지나간 첫 휴가부터 벌써 우리 아들이 제대를 했나 싶을 정도로 휴가를 붙여 나오는 김도영의 마지막 휴가까지 김도영과 나카모토 둘 다 서로에게 연락은 없었다. 반년도 안 되는 연애 기간에 비해 헤어짐의 가슴앓이는 꽤나 길었다.

 

김도영의 2학년 1학기가 시작되기 한 참 전에 제대한 탓에 수강 신청을 할 때쯤에는 이미 머리가 많이 자라 군 휴학을 끝내고 제대하는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워낙 머리가 빨리 자라는 탓에 어중간하게 제대한 김도영에게는 최고의 축복이었다.

 

그렇지만 복학은 죽어도 하기 싫었다. 복학 신청을 하고 과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을 때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멈칫거리는 나카모토의 얘기를 들었던 탓이었다.

 

 

[이번 학기에 복학하는 애들이 많네.]

“맞아요. 동기들 다들 군대 다녀왔으니까요.”

[유타 얘는 군대도 안 갔는데 2년 꽉 채워 휴학했다가 이번 학기에 복학하잖아.]

“아…. 아 그렇구나.”

 

 

학교 군 휴학 제외하고 3년 더 휴학할 수 있다는데, 지금부터 3년이면 학교에 나카모토는 없다. 김도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더 휴학 얘기를 꺼냈다 군대도 갔다 온 놈이 아직까지 철이 안 들었다며 효자손을 올리는 엄마를 보고 다음 날 울며 겨자 먹기로 수강 신청을 하러 PC방으로 향했다.

 

군대에 있을 때는 그렇게나 빨리 가라고 염불을 외고 외워도 안 가던 시간이 이럴 때는 또 기가 막히게 빨리 간다. 오늘 아침에 수강 신청한 것 같은데 정신 차려보니 오늘 아침은 개강이었다. 잔뜩 낑겨 가는 버스 안에서도, 터덜터덜 걸어 올라가는 정문에서도, 조금 간절히 바랐다. 제발 나유타만 안 만나게 해주세요.

 

그리고 그렇게 바라고 바랐던 것처럼 나카모토를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 더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 차라리 면전에서 1:1로 만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희주 누나 유타 형이랑 사귄다는 거 들었냐?”

 

 

씨발 오늘이 개강인데 2년 동안 휴학하면서 뭘 했는지 빡이 친다.

 

졸업할 때까지 나카모토든 임희주든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학회장인 희주를 마주치지 않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김도영은 수강 정정 기간에 둘과 겹치는 수업을 모조리 바꿨다. 사귀자마자 바로 같이 시간표를 짠 건지 과방에 나란히 굴러다니는 임희주와 나카모토의 시간표를 본 김도영은 그 길로 갈가리 시간표를 다 찢어버렸다. 찌질한 줄은 알지만 몰래 사진도 한 장 찍었다. 피해 다녀야 하니까. 하는 자기 위로와 함께.

 

지난 2년 동안 잘 알고 있었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사람도 김도영 자신이었고, 그때 뭐, 무슨 누구누구 병에 걸려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듯이 행동했던 것도 자신이었다. 군대까지 기다려준다고 했던 남자친구를 매몰차게 끊어냈던 과거였다. 그리고 그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김도영은 나카모토를 사랑했다.

 

쪽팔렸다. 웃기는 억지로 헤어진 자신이, 그리고 헤어진 후에 보인 추태가. 울면서 전화한 모든 게 창피했다. 그래서 사실 복학 신청을 하면서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지만 김도영의 속마음 어딘가에는 다시 나카모토와의 재회가 진짜 잘 찾아보면 잘 보이는 어딘가에 들어있었다.

 

근데 그러자마자 들은 얘기가 나카모토의 연애 얘기였다. 과가 난리가 났다. 진짜 사귀는 거냐고 몇 번을 물어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딱히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둘을 보자니 더 열불이 났다. 2년 전의 연애 얘기를 하며 헤어진 옛 남자 친구한테 아직도 좋아하노라 말하는 것만큼 내로남불이 없다. 게다가 마지막 헤어짐의 순간에 나카모토는 김도영한테 그랬다. 이기적이라고.

 

사실 김도영은 눈 딱 감고 한 번 더 이기적이고 싶었다. 근데 자기 사랑에 미쳐 상대방 생각은 1도 안 하는 무례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질질 짜는 건 1년 반 전에 끝난 줄 알았는데 그날도 조금 울었다. 옛날만큼 엉엉 울지는 않고 조금만.

 

3월이 되면 어김없이 신입생들이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김도영네 과도 다르지 않았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신입생들을 보며 김도영은 파릇파릇했던 자신의 1학년을 생각하다 곧 그것도 그만뒀다. 1학년 1학기 김도영은 나카모토를 쫓아다니기 바빴다. 공부도 잘하는 대학생도 되고 싶고 연애도 잘하는 대학생이 되고 싶어 고3 때 끝일 줄 알았던 코피를 또 쏟아봤다. 미쳤지 김도영. 하면서도 잠깐 코에 휴지를 쑤셔 박는 그 찰나에 핸드폰을 들었다. 선… 배 모…하세요… 나카모토 유타한테 작업을 걸던 때였다.

 

그런 생각에 단대 복도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발이나 동동 구르다 벽에 붙은 대자보가 눈에 들어왔다. 김도영네 과의 신입생 환영회였다. 반듯하게 쓰인 글씨 맨 밑으로 임희주의 이름이 보인다. 슬쩍 주머니 속에서 가운뎃손가락을 편 김도영이 다시 위부터 차례대로 읽기 시작했다. 재학생은 처음이라 모든 재학생이 신환회를 가야 한다는 건 몰랐다. 재학생 참가비 1만 원 불참비 3만 원. 깡패 아냐? 일 년에 한 번뿐인 신환회를 제외하면 다른 과 행사는 자율 참가라는 문구를 보며 김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입생 진짜 싫다.”

 

 

그러면서도 3학년 재학생으로서, 그리고 임희주의 남자친구로서 내내 같이 자리에 앉아있을 나카모토가 생각나서 더 크게 한숨이 나왔다.

 

 

“나유타가 제일 싫어.”

 

 

사실 그중 최고로 싫은 건 김도영 저 자신이었다.

 

-

 

하필이면 9교시까지 있는 날 신환회였다. 6시 10분까지 학교 앞 가장 큰 술집으로 오라는 단체 카톡방 공지까지 다시 보며 액정 위의 시계를 슬쩍 다시 봤다. 6시 23분. 꼭 하필. 꼭 이런 날 풀강에 단대까지 정문에서 제일 멀다. 그래도 뛰지는 않았다. 아주 약간의 자존심이었다.

 

6시 40분이 다 되어서야 들어간 자리에서 김도영은 자신이 큰 실수 하나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학과장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공손히 손을 모으고 인사를 했다. 당연히 신환회면 교수님들도 올 텐데 그걸 까먹고 핸드폰도 보지 않은 채 당당히 들어왔다. 얌전히 고개를 숙이는 김도영의 저 앞으로 손짓, 발짓까지 하며 왜 카톡을 보지 않았냐는 동기의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선배. 여기 앉으세요.”

 

 

최대한 빨리 빈 자리를 찾아가려는 찰나에 누군가 김도영을 붙잡았다.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뭐라고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엉덩이를 붙이는데 하필이면 제일 첫 번째 테이블이 학생회 테이블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당연하다는 듯 나카모토가 앉아있었다.

 

아… 뭐라고 할 말도 없이, 하고 싶은 말도 없이 김도영의 귀가 뜨거워졌다. 술은 아직 한 잔도 안 마셨는데 볼부터 귀까지 뜨거워지는 게 느껴져 딱 죽고 싶었다. 두근거림보다는 역시 이번에도 쪽팔림이 먼저였다. 복학 후 여태 한 번도 못 봤던 나카모토의 얼굴을 이렇게 갑자기, 가까이 볼 생각은 없었다. 그냥 오늘 여기서 멀찍이 몰래 보려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런 만남을 생각한 건 아니었다.

 

 

“도영아, 신입생들 있는 테이블로 갈래? 여기 임원 테이블이라. 어차피 나중에 한 명씩 다 돌아다닐 거거든.”

 

 

껄끄러운 건 껄끄러운 거였지만 이 순간만큼 김도영은 임희주가 천사처럼 보였다. 아니 사실 천사는 아니고 구세주 정도. 이제 막 술자리가 시작되는 참이라 지금 다른 테이블로 낀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러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근데 어차피 도영이도 지금 이 테이블에 아는 사람 나랑 너밖에 없는데, 여기서 좀 있다가 가도 되지 않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랜만에 들은 목소리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2년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사이 확 늘어버린 한국어는 얼핏 들으면 나카모토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만 같았다. 가슴께에서만 울리던 심장은 점점 목을 타고 올라와 김도영의 귓가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래? 이번 학생회 애들도 소개해 줄 겸.”

“아… 네. 그럴게요.”

 

 

김도영은 자꾸만 자신이 생각했던 그림과는 다른 풍경에 속이 다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임희주와 나카모토가 함께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에서 바라보는 김도영. 일단 이 두 장면은 전부 틀렸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김도영의 머릿속에는 전혀 그려보지도 못한 장면이었다.

 

자연스럽게 학생회 테이블에 앉아있던 나카모토도 학생회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자연스럽게 뿔뿔이 흩어진 학생회들을 빼자 남는 건 김도영과 나카모토뿐이었다. 빨개진 귀는 제대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고, 김도영의 술잔에는 술을 안 따라주는 나카모토 덕분에 언제까지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자작이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김도영은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벌써 한 병 반이나 마셨는데 둘 중 누구도 말을 먼저 꺼내거나 자리를 뜨지 않아 그냥 그 상태 그대로 앉아있었다. 가끔 담배 피우러 갈 사람 있냐는 물음을 건네며 오는 사람들에게는 둘 다 손을 내 저었다. 김도영은 이럴 때 자신이 비흡연자인 게 안타까웠다.

 

마지막 잔을 채우던 나카모토의 두 번째 소주병이 테이블에 놓였을 때, 자연스럽게 벨을 누른 나카모토는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소주를 더 시키는 그 발음이 너무나도 매끄러워 김도영은 사실 조금 놀랐다.

 

 

“이슬이요.”

 

 

앞치마를 맨 알바생이 반 오픈형 룸에 불쑥 상체만 밀어 넣고 소주병을 올려둔다. 그게 또 하필 김도영의 옆이라 손을 뻗어오는 나카모토의 손이 김도영의 팔에 스쳤다.

 

 

“잘 지냈어?”

 

 

만난 지 2시간 만에 처음 듣는 안부였다. 한마디도 안 하다가 이제야 갑자기 물어본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물어오는 바람에 시선을 피한 건 되려 김도영이였다.

 

 

“형은?”

“너 기다렸어.”

 

 

직구를 맞으면 얼마만큼 아플까.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에서 말 한마디로 심장을 뚜드려 맞았다.

 

 

“무슨 소리야.”

“도영 너 기다렸다고.”

 

한국어가 많이 늘었음에도 김도영의 이름 뒤에 붙는 조사를 빼먹는 건 여전했다. 근데 이상하게 그 조사가 빠진 제 이름이, 그게 좀, 심장이.

 

 

“술 먹고 연락 안 한다고 해서, 그러면 안 먹었을 때는 할까, 해서 할 때까지 기다렸어.”

“……”

“결국 안 했지만.”

 

 

심장이 빨리 뛰는 게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게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에 뛰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나유타.”

 

 

잔에 반쯤 남아있던 소주를 입에 넣고 숨을 참은 다음 넘겼다. 잠시 숨을 참고 입으로 알콜 향을 빼낸 김도영은 그 옆의 물잔을 들어 전부 마셨다.

 

 

“너. 임희주랑 안 사귀지.”

“어.”

“씨발 새끼.”

“내가 너 기다리겠다고 했잖아.”

 

 

그 말에 김도영은 벌떡 일어나 그대로 유리문을 열고 나갔다. 이제야 속이 울렁거린다. 딱 한 잔만 더 마시면 진짜로 뻗었을 거였다.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비상구 문을 열고 발걸음이 내딛어지는 대로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김도영의 지금 심정은 딱 이렇게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 실족…사까지는 아니고 실족사고 정도를 당하고 싶었다.

 

 

“너 넘어져.”

“냅둬. 굴러떨어지게.”

 

 

그보다 더 멀쩡한 나카모토가 금방 위태롭게 계단을 내려가는 김도영을 잡았다. 안 그래도 막 발을 헛디디던 참이었다. 건물의 4층은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점심 뷔페와 미용실이 전부였다. 8시면 다 불이 꺼지는 층. 조용한 비상구에 나카모토가 김도영을 벽에 세웠다.

 

 

“내가 너 기다리고 있다고 했잖아.”

“기다릴 거라고 했지 그런 소리 안 했어.”

“했어.”

“안 했어.”

“했어.”

“그래서, 나 기다리는 동안 연애도 하고 즐길 거 다 즐기면서 기다렸냐? 나만 질질 짜고 억울해서 엉엉 울고 그렇게 지냈냐?”

“안 사귄다니까.”

“2년 동안 다른 사람 사귀었겠지! 예쁘고 멋진 남자 여자 막 만나면서 그랬겠지!”

 

 

도영. 제 분을 못 이겨 식식대는 김도영의 어깨를 잡은 나카모토가 다시 김도영을 불렀다.

 

 

“왜 혼자 생각해서 그걸로 단정 지어. 우리 그래서 헤어졌잖아.”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私は君を待っている。”

“……”

“私は君を, 나는 너를,”

“……”

“待っている。기다리고 있어.”

 

 

2년 전의 김도영은 이 말을 못 알아들었다.

 

 

“……그때 했던 말이야?”

“어. 나, 너 기다렸어.”

“왜?”

“사랑하니까.”

“아직도?”

“今までも。”

“뭐야… 나 못 알아들어.”

“지금까지도. 도영아.”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이 키스가 끝나면 김도영은 물어봐야 할 게 많았다. 왜 임희주와 사귄다는 소문이 났는지, 왜 거기에 부정하지 않았는지, 2년 동안 뭘 했는지. 그리고 마지막엔 자신과 다시 사귀는 게 맞는지까지. 아니라고 하면 콱 머리채를 잡을 테다.

 

 

“도영. 우리 다시 사귀는 거 맞아.”

“…어?”

“그러니까 한 번만 더.”

 

 

나카모토는 김도영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알았는지 다시 물어보기도 전에 대답까지 해주고 다시 키스까지 해온다. 그 말 한마디에 머리채까지 잡겠다는 다짐을 잠깐 넣어두고 슬쩍 목 뒤로 팔을 둘렀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수강 변경하지 말걸. 그래도 일단 지금은 이 키스부터 마저 해야겠다. 나카모토 유타 진짜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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