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싱 도로시
희
"이 라디오를 듣고 있는 당신, 어떤 하루를 보내셨나요? 지치고 힘드셨나요? 오늘부터 매주 금요일밤 11시, 도다이제스트가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위로와 용기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
Missing Dorothy."
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너야? 무조건 목소리만 낮춘다고 사람들이 와 분위기 있네 하면서 듣는줄 알아? 저번 게스트 보고 좀 괜찮다 싶어서 뽑았는데 이게 뭐야? 피디님 국장님이 잠시 보자고 하시는데! 간다 가. 너는 시키는거 똑바로 해. 으휴 이래서 아이돌 쓰면 안된다니까. 겉만 번지르르 해가지고.
성난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동영은 그제야 책상 밑에서 꼼지락거리던 손을 멈췄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가락 지문마다 방울방울 땀이 맺혀있었다.
"동영아, 아직 30분 정도 남았으니까 나와서 좀 쉬다가 시작할까?"
태일이 스튜디오 문을 열고 동영을 불렀다. 구세주의 등장이었다.
미싱 도로시
일단 대학부터 가자. 대부분의 고 3들 목표였다. 동영도 개중 하나였다. 아침에 선도부 서고 점심시간에는 학생회의. 학교 끝나고는 학원. 일주일 중 5일 루틴이었다. 동영은 일찍이 제 상성이 공부와 맞지 않단걸 깨달은 케이스였다. 중학교 대부터 예체능에 두각을 보인 아들을 엄마는 미술학원에 등록시켰다. 실용은 나와서 먹고 살거 없고, 클래식은 돈덩어리야. 체육은 너 나중에 늙어서 고생한다. 아들, 그나마 괜찮은게 미술이야.
전혀 괜찮지 않았다. 학교 수행평가랑 입시미술은 쌩판 남이었다.
3-4시간 동안 같은 의자에 앉아서 손목운동만 하자니 엉덩이에는 땀띠날 것 같았고 눈알은 빙빙 돌아갔다. 제 집중력이 미취학아동 사촌보다 못하다고 동영은 그 때 확신했다. 방학 대는 12시간씩 미술학원에 매여 살았다. 방학특강이었는데 이름이 자물쇠반이었나, 흉측해서 기억에 남는 그런.
예체능은 오래 붙들고 있는 사람이 승리하는거라고 인내와 고뇌의 총합 4년 반은 김동영에게 수시 합격을 가져다줬다. 학생부회장과 공부, 미술을 겸했던 결과였다. 그리고 입에 달고 다니던 인서울 꿈은 1년도 안돼서 폭삭 무너졌다. 김동영은 종종 취하면 그 때 호구 잡히면 안됐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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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가수 해 볼 생각 없어요?"
암만 생각해도 멘트가 너무 구렸다. 그 구린거에 스스로 홀딱 넘어갔고. 제정신 똑바로 박혔다면 안그랬겠지만 당시엔 질풍노도의 김동영이었다. 대학에 판타지가 딱히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캠퍼스 라이프는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아 물론 처음에는 순탄한거 같았다. 딱 3월 초까지만. 처음 맞는 중간고사에서 제 옆에 앉은 선배가 동영의 답안지를 훔쳐보다 걸려 둘 다 F를 받았고 거기다 교양 하나를 잘못해서 재수강하지도 못하는 D가 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말도 안되는 썰이 제 일이 되어버린거다. 그림만 그리면 될줄 알았는데 교양책은 무기 수준이었고 등록금은 덤이었다. 다크서클이 주렁주렁했고 이렇게 4년을 내리 지내다간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한 소형 소속사 관계자가 동영에게 아이돌을 권유했다.
정말 타이밍 맞게.
"동영군이 고등학생 때 축제에서 부른게 너무 인상 깊더라구요. 근데 이쪽에는 관심도 없어보이고 찾을 수도 없어서 관뒀는데, 여기에 제 동생이 다니거든요. 데리러 온건데..."
말이 한도 끝도 없이 늘어졌다. 그러면서 내심 동영이 긍정적으로 생각해줬으면 하는 눈을 내비쳤다. 연습생 하면 보통 몇 년 정도 있다 데뷔해요? 보통은 적어도 이년은 하죠. 근데 동영씨 같은 경우는 보컬도 괜찮고 지금 저희 쪽에서 준비하고 있는 그룹이 있는데 보컬이 부족해서요. 성량이나 음역대 같은건 타고 나는거잖아요, 딱 필요한 인재여서요. 빠르면 6개월 이내로도 가능할 것 같아요. 춤 같은건 정해진 것만 배우면 되니까요.
네 할게요.
그 한마디에 침까지 튀기면서 열변을 토하던 보랏빛 입술이 멈췄다. 어 진짜요? 네. 그럼 혹시 오늘 카메라 테스트 보실래요? 제가 지금은 약속이 있어서 명함 주시면 내일이나 모레 연락드릴게요. 네네 연락 기다릴게요. 이거 진짜 좋은 기회니까 꼭 연락주세요!
멍했다. 이게 잘 한건가 싶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그리고 한숨 크게 쉬고 눈감았다 뜨니 데뷔 무대였다, 정말로. 테스트 후에 바로 데뷔팀에 합류한 동영은 4개월 안에 모든걸 끝내야 했다. 눈코 뜰새 없이 바빴던 탓에 대학은 당연히 순위 밖으로 밀려났고 그 끝은 휴학이었다. 아쉬웠지만 이 또한 제 선택이어서 동영은 딱히 후회는 하지 않았다.
정신 없었던 데뷔치고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그 후로 정산을 제대로 못 받을 때가 수두룩했고 컴백은 자주 미뤄졌지만 뭐. 축제란 축제는 다 서서 저 땅끝까지도 가봤다. 어쨌든 그렇게 동영이 톰보우, 붓과 수채물감을 잡은 시간과 무대에서 보낸 시간이 얼추 비슷해졌다.
문제는 정규 2집 리팩을 준비하면서 터졌다.
웹드라마 '오드아이'로 급부상한 하이엔드 출신 준, 알고보니 학폭 가해자?
강남역 신분당선 몰카남, 하이엔드의 수현으로 밝혀져.... 잇따라 충격.
두가지 사건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물밀려오듯 터졌다. 7명의 멤버중 살아남은건 막내와 동영 둘 뿐이었다. 막바지던 녹음도, 몇달 뒤 예정되어있던 첫콘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화살은 남은 둘에게도 겨뉘어졌다.
전 멤버들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고 소속사 관계자들도 짐싸들고 다른 곳으로 튀었다. 형, 저는 다시 중국 가려구요. 자주 연락할게요. 결국 그 자리에 남은건 동영 하나였다. 8년 동안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는데 곁에 남은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 동영에게 동앗줄 하나 내려준게 태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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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너 동영이 맞지? 14학번."
"아 형 오랜만이에요. 근데 여기서 뭐하세요?"
"너 진짜 오랜만에 본다. 나는 곧 졸업하니까 실전경험 쌓으려고. 부모님도 좀 뵈고 겸사겸사?"
그러는 너는 갑자기 그렇게 자퇴하고 연락도 안되더니 아이돌 되가지고 으유 너 학교에서 난리였어. 학생회 애들은 더 난리였고. 동영은 무턱 제 손을 맞잡고 우다다다 말을 쏟아내는 그 얼굴이 꽤나 반가웠다.
태일은 당시 대학 학생회의 회장이었고 동영은 임원이었다. 싹싹하고 성실하다고 예뻐한 탓에 다른 애들보다 좀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강의 시간 외에는 거의 동방에 붙어있어 같은 디자인과 애들보다 학생회 멤버들과 얼굴 맞대고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가고싶은건 음악 쪽인데 부모님 때문에 방송관련 학과 왔다고 푸념하던 태일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했다.
"기사 봤어. 음,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혹시 내가 소속사 하나 추천해줄 수 있을까 해서. 너만 괜찮다면. 그 너도 한 번쯤 들어봤을텐데 HN엔터라고,"
배우와 솔로가수를 중점으로 육성하는 동영도 익히 아는 회사였다. 거기를요? 어 너 저번에 오에스티 낸거 그거 들려줘봤더니 우리 형이 주위에 너같은 사람 더 없냐고 그랬거든. 한 번 그래도 시도는 해보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맘에 안들면 그 때 결정해도 되는거고.
뭐 그렇게 할게요. 저 어차피 지금 이도저도 아닌 신세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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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세대 아이돌로 자리매김하지 않는, 그저 그런 위치에 있는 그룹들은 대중들에게서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다. 동영도 그랬다. 어쩌다 들어간 새 소속사는 동영을 솔로로 재데뷔시켰고 대부분의 이들은 김동영이 하이엔드의 데이인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아이돌인지도. 혼자하는 연예계 생활은 꽤 수월했다.
솔로로 전향되면서 동영의 삶에도 변화가 생겼다. 작사에도 참여해보고 헤메코 담당자분들과 말도 텄다. 드라마에도 발을 담가보고 정산도 제때 제때 받았다. 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것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쫓아왔다. 개중에 스스로 만족했던건 유화였다.
"우리 애들은 무조건 취미 하나씩은 가져야하는거 알지? 그래야 숨통도 트이고 하지, 안그래?"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대표의 그 한마디에 동영은 그 길로 바로 집 앞 화방을 들렸다. 거기가 화방인지도 몰랐는데 매니저형의 네비는 잘도 길을 찾아다 줬다. 와 얘는 아직도 3000원 꼴이야 한결같이 비싸네. 돈 많이 벌겠다.
오랜만에 가슴이 좀 뛰는 것 같았다. 유화는 김동영 미술 인생 3년 중 몇 안되는 작은 노란구슬이었다.
우선 옷방겸 창고로 쓰던 작은 방을 정리해야했다. 혼자하기엔 벅차 동생을 불렀더니 이동혁이 덤으로 딸려들어왔다. 너네는 아직도 붙어다니냐, 징글징글하다 아주. 그 말 한마디에 서로 저가 더 지겹다며 아옹다옹하는 모습에 새삼 웃음이 나왔다.
여기가 휑하네, 저기가 너저분하네. 이어지는 인준의 잔소리에 방 하나만 정리하려던 계획이 집 전체를 바꿔놓았다. 형 나 오늘 고생했으니까 풀세트 사줘. 저녁까지 먹은 둘이 돌아간 집은 진짜 휑했다. 거실에 드러누워 창밖을 보니 어느덧 하늘이 불그스름했다. 아까가 1시였는데 시간이 쥐도새도 모르게 빨리갔다. 물먹은 솜마냥 늘어져있던 몸을 이끌고 작은 방으로 들어왔다. 와 그래도 황인준 안목있긴 해. 커튼부터 전등까지 싹 다 바꿨더니 제법 작은 화실 느낌이 났다. 개중에 안 어울리는건 구석에 놓여진 미니 탁자였다.
"아 맞다 선물 사 왔는데 기다려줘용!"
우당탕탕 내려갔다 온 동혁이 대뜸 내민건 미니 탁자와 디자인 구린 운전면허 필기시험 책이었다. 형 아직도 뚜벅이야? 와 매니저 있고 뭐 그렇다 해도 어떻게 이 나이까지? 밖에 좀 내다녀라. 작은 책상에 앉아서 대충 책을 휘리릭 훑어봤다. 문득 고개를 들어 맞은편 이젤을 보니 꼭 제가 18살짜리 이민형이 된 것 같았다. 걔가 그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화통 들고 다니던 고3의 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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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 동영인데 지금 도착해서요. 네. 공, 팔공, 이 어 됐어요 먼저 들어가서 세팅 해놓을게요."
어젯밤 미처 정리되지 못한 이젤들과 시커먼 회색빛을 띈 물을 머금은 물통들이 그대로 널부러져있었다. 14번 제 락카에서 준비물을 하나둘씩 주섬주섬 꺼냈다.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비몽사몽한 돈덩어리 막내동생의 방에서 가져온 연필은 하필 2B였다. 아 얘는 몇개 있는데. 단단하게 깎여져 있는 파란 스탠다드를 좀 더 길게 깎았다. 황인준 연필모양 잡는거 싫어하는데 또 잔소리하겠네. 영양가 없는 생각들을 하며 무심코 고개를 든 시야에 잡힌건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저 혼자였는데. 새로 들어온 앤가? 중딩? 그 저 원장선생님 조카. 아, 어 너가 민형이구나. 그제야 어제 학원차량에서 원장선생님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내일부터 내 사촌 하나 올건데 혹시 알려나 민형이라고? 너랑 같은 학교던데. 아뇨? 입시반 텐투텐 할 때 걔도 같은 교실에 있을거야. 엥 왜요? 공부하라고 앉혀놓는거지. 걔 부모님이 학원 보내면 친구 때문에 공부 못한다고 좀 봐달래. 혹시 마주치면 척해줘. 아직 얘 동네에 아는 애가 없어가지고. 너 귀여운거 좋아하잖아. 민형이 땡글땡글하니 엄청 귀여워.
어젯밤 원장선생님의 걔였다. 뻣뻣하게 서서 멀둥멀둥 저를 쳐다보는게 웃겨 동영은 픽 웃었다. 몇 번 더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영을 눈으로 쫓더니 '저기 오른쪽에 물감이랑 도화지 수납칸 뒷쪽 책상에 앉으면 돼." 라는 말을 듣고서야 제 자리를 찾아갔다.
준비를 마친 민형이 주황색 귀마개를 눌러 꼽자 금세 내부가 조용해졌다. 쌤이랑 애들 올 때까지 크로키나 할까. 이면지를 반으로 쪼개 아무대나 걸터 앉았다. 어쩌다보니 동영은 자신이 처음 보는 애를 10분째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걸 알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민형이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시선에 되려 당황한건 동영이었다. 아냐 할거해.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올 김동영 다 준비해놨어. 센스쟁이~"
"쌤!"
딸랑, 문소리와 함께 선생님과 애들이 들어오는 소리에 동영은 구세주라도 만난듯이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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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자 둘의 관계도 나름 괜찮아졌다. 눈만 마주쳐도 경련하는 입꼬리는 어느새 자연스러워졌고 10분 거리에 있는 학원도 같이 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너 그러면 원장쌤이랑 같이 살아?"
"네 저만 여기 와서 일단 이모랑 같이 살아요."
방학 때 텐투텐 할 때 같이 가자. 둘이 같은 아파트 동주민이란걸 알고나서 민형은 괜히 동영이 편하게 느껴졌다. 여름 방학 내내 등하원 같이 하다보니까 어색한 분위기도 점차 풀어졌다. 타인에게 관심 많고 좋아하면 잘 해주는 동영의 성격 덕이기도 했다. 근방에 아직 아는 사람이 없다는 민형을 동영은 거의 애기 돌보듯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아침을 안 챙기는 민형의 이모를 대신해 아침마다 엘리베이터에서 과일이나 채소 스무디, 토스트나 주먹밥을 건냈고 주어지는 점심과 저녁시간에는 괜찮다고 혼자 밥 먹는거 좋아한다는 민형을 끌고 주변 맛집을 다 돌아다녔다. 불과 1달도 안돼서 김동영은 이민형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형, 형만 괜찮으면 혹시 저 등교할 때도 같이 가도 돼요?"
"그래 어차피 나 혼자가서, 근데 선도 때문에 좀 일찍 가는데 괜찮니."
아무렴 혼자가는 것보다는 괜찮다고 생각한 민형이었다. 등하원 메이트는 예비 등하교 메이트가 되었다. 그렇게 김동영은 이민형의 아침을 쭉 챙기기로 했고 이민형은 김동영의 밤길을 책임지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동영은 아침밥 메이트일 뿐만 아니라 민형의 새로운 학교 생활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우리 형 친구? 아니 친구는 아니고 아는 사이. 방학 때 맨날 붙어다니더니. 오 형 미국물 먹으면 이렇게 잘생겨져요? 야 들이대지마 부담스러워 하잖아. 그 나 미국이 아니라 캐나다.... 와 더 간지나네. 당황한거 안보이냐고 니 자리 가라. 형 제 얘기 들었어요? 응 동영이 형이 몇 반이냐고 해서 4반이라 했더니 자기 동생이랑 같은 반이라고. 어차피 학교에서는 학년끼리 지내니까 저희랑 지내요.
김동영 동생 덕에 전학 첫날부터 친구도 만들었고 덕분에 혼급식은 면한 민형이었다. 교무실을 가도, 복도에서 선배들을 만나도 이민형이 먼저 듣는 소리는 '어 동영이 아끼는 후배?' 였다.
아니이 그게 그냥 어쩌다 말 나온 경우도 있고, 인스타에 올렸는데 자꾸 누구냐고 물어봐서. 기분 나빴어? 민형은 오히려 기분 좋았다. 학생회장이고 나발이고 그냥 김동영이 아끼는 후배 타이틀을 제가 가진게 좋았다. 비록 복도에서 가끔 김동영 베프라는 이태용을 만나면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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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혀엉! 내일 염색하러 갈래? 어차피 나 면접 안봐서 머리 아무렇게 해도 된다!! 8월 초, 김동영이 제안한 수시압박 탈출을 빙자한 일탈이었다. 동영의 사소한 계획들에는 십중팔구 이민형이 껴있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 음.... 미안 하하. 아냐 그래도 귀여운데?"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동영과 다르게 민형의 머리는 샛노랬다. 살면서 처음 해보는 염색이라며 신난게 화근이었다. 저 탈색도 하고 파마도 할래요! 포부는 당찼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샛노란게 볶아져있어서 꽤 웃겼다. 미용사 누나도 웃고 동영도 웃고 사진을 받은 민형의 이모도 웃었다. 이민형만 웃지 못했다.
노란 뽀글머리는 민형을 컬리컬리로 만들었다. 마크도 아니고 이민형도 아닌 컬리컬리. 동영은 학교에서도 이 별명을 자주 불렀고 쪽팔림은 민형의 몫이었다.
"헤이 거기 컬리컬리!"
급식실에서 우렁차게 저를 불러대는 학생회장 탓에 민형의 귀는 빨개지기 일수였다. 그래봤자 한다는 반항이 아 형! 이라서 별 효과는 없었다. 덕분에 학교 유명인사가 됬긴 했지만.
하루는 동영에게 '형 근데 왜 컬리컬리라고 불러요?' 라고 했다가 어 너 머리 맥날 감자튀김 같아서 라는 아주 심플한 대답을 들었다. 민형은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감이 안잡혀서 대충 웃어 넘겼다. 그래놓고 집에 와서 맥도날드 컬리후라이를 찾아보고는 급 슬퍼졌다. 그래도 다시 보니까 귀여운거 같기도 한데? 자기 합리화를 하며 다이어리에 적어놨다.
[ 8/28 - 머리 바마파마 했는데 별명 curly fries 됐다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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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형 김동영 좋아하죠?"
"어?"
"티 좀 나는데 몰랐어요?"
김동영이 눈치에 비해 그런거에 좀 둔감해서 뭐. 말을 마친 인준이 키득댔다. 저를 보고 있는 4쌍의 눈동자가 민형은 부담스럽기 그지 없었다. 어 그게 사실....
사실 민형이 제 감정을 스스로 눈치챈건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 전까지는 그냥 김동영이 저를 귀여워해주는게 좋았고 스스로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저와 다른 꼼꼼함이 좋았다. 교문 앞에서 넥타이를 정돈해주는게, 밤길엔 꼭 뭐 하나씩 사서 손에 쥐어주는 형같음이. 컬리컬리라고 부르면서 크게 웃는 그 얼굴이. 주말은 무조건 침대에 있어야 한다는 그런 사람이 주말에는 굳이굳이 닌텐도 위를 하자고 저를 부르는 모순이. 한 자리에 꼬박 앉아서 흰 도화지를 꽉 채우는 열정이. 타국에 홀로 떨어진 제게 먼저 다가와준 용기가.
이게 좋아하는 감정이라면, 이민형은 제가 김동영을 좋아한다고 확신했다.
"어 이게 내가 원래 이렇게 쉽게 막 아무나 좋아하는건 아닌데,"
"형 근데 나는 안 도와줄건데?"
니가 좀 오작교 해줘. 내가 뭣하러 그 우리엄마 아들 연애를 도와줘. 평생 솔로로 살라 그러지. 근데 너는 연애하잖아,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 같은데?
"아 그 연애 오늘부로 쫑내려고."
"야야야아!"
인준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민형에게 있어서 가장 큰 조력자가 되었다.
걔 빵돌이야. 놀이동산보단 만화카페 가, 그거 더 좋아해. 특히 안마의자. 서브웨이 오이 무조건 빼고 먹어. 빵은 무조건 플랫으로. 미트볼은 웬만하면 피하고. 어 그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거.. 아 맛있는거 놔두고 왜 그걸 먹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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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 좋아하지."
가을 다 지나가는 시점, 지하철역 앞에서 토스트 먹던 김동영의 덤덤한 어조였다.
네. 어? 헐 형? 긴가민가했는데 맞는거 같아서. 안하던 행동도 하고 갑자기 형 바보가 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이라고 하질 않나, 얘가 왜 이러나 싶었지. 갑작스런 동영의 고백은 민형을 당황시켰다. 나 귀여운거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 좋아해. 내가 너 단순히 쌤 조카라서 예뻐했을까봐. 아 물론 귀엽게 생긴 것도 한 몫하는데. 근데 내년까지는 안돼. 형 방금 저 좋아한다는거 아니었어요? 일단 올해는 내가 대학 가야해서. 내년은 너가 가야해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4년 살긴 싫거든. 남들 다 갈 때 같이 가야지.
하는 말마다 족족 다 맞는 말이었다. 민형은 자신이 동영보다 549일이나 늦게 태어난게 실로 서러워졌다. 원사이드 러브 아닌 원사이드 러브였다. 김동영 못됐어, 매몰차. 좋아하는 사람 태도가 어떻게 그래?
그날 밤, 씻지도 않고 침대에 몸을 날린 민형은 좀 울 것 같았다. 아 저 인형도 형이 사준건데. 어제 애들이랑 아트박스 갔다가 너 닮았길래. 귀엽지? 뭐가 귀여워 못생겼어. 민형은 괜히 죄없는 코알라 인형을 몇 대 때렸다. 내가 제일 귀엽다면서, 제일 아끼는 후배라면서. 동생이라면서. 못된 김동영. 이럴거면 왜 그렇게 잘 해줬어. 사람 착각하게. 황인준이 봤으면 잘해줘도 지랄이라는 말 한마디 들었을 찌질한 상태였다. 자꾸 감정이 북받치는 바람에 민형은 의도치 않게 울어야 했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저를 닮았다는 코알라 인형이 축축해질 때까지.
뭐해 안타고. 습관이 무서운거라고. 민형은 평소처럼 20분 일찍 준비했다. 넥타이를 손에 쥔 채 탄 엘리베이터에는 김동영이 있었다. 케일주스로 추정되는 끔찍한 색상의 투명 텀블러를 들고. 이동혁이랑 황인준이 어제 게임하면서 수박 다 먹었더라. 맛은 없을텐데 공복보단 나으니까. 괜찮지? 어제 아침과 다를게 없는 말투에, 다를게 없는 행동에, 다를게 없는 얼굴에 민형은 어제 왜 제가 울고 불고 난리를 쳤는지 멍해졌다.
"민형아 근데 너 울었어?"
"아뇨, 어제 라면 먹고 자서."
라면은 개뿔. 와 형이 그렇게 넘어갔다고요? 누가봐도 실연의 아픔으로 눈물 흘린 티가 나는데! 이동혁을 비롯한 3명에겐 먹히지도 않았다. 아 그래도 형 아예 거부한건 아니잖아요. 2년이면 싫다는거잖아. 아니에요! 형 싫으면 싫다고 했겠죠. 동영이 형도 좋다고 했잖아요. 위로가 하나도 되진 않았지만 제 기분을 위해주는 애들에 웃음이 픽 나왔다.
그래 뭐 어쩌겠어 내가 좋아하게 됐는데. 하필 그 사람이 정 많고 사람 좋아하는걸. 불만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민형은 입 밖으로 차마 내뱉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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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게 망각의 동물이더라고. 김동영을 욕하고 슬퍼하고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한게 무색하게 민형은 동영과 잘만 지냈다. 고백따윈 한적 없는 것처럼. 복도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야자가 끝나면 학원 로비에서 기다리고. 가끔 동영이 좋아하는 베라 뉴치케나 복숭아쥬스, 제가 좋아하는 수박쥬스를 들고 기다리고.
"형! 오늘 왜 이렇게 일찍 끝났어요?"
"내가 오늘 모의 1등 했어. 상으로?"
"아 맞다. 이거 수박, 학교 앞에 쥬시 생겼길래."
수시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동영은 지하철에서 자주, 그야말로 실신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피곤에 찌들고 입은 벌려진 상태로 고개도 안아픈지 뒤로 젖힌 채 업어가도 모를만큼 잠들었다. 때로는 민형의 어깨에 기대어 졸기도 했다. 그럴 때 마다 민형은 제가 오늘 야자후에 탈취제를 뿌렸는지, 땀흘릴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내야 했고 창아 로비에서 더블유 드레스룸을 뿌려대는건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워낙 체력이 약한 동영이라 깨우는게 쉽지 않았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헤매는 동영을 민형이 업어 데려가기도 했다.
"형 많이 피곤해요?"
"으어...어엉...."
대답이 한결같이 좀비 같아서 민형은 혼자 키득거리기 일수였다. 179cm의 고3 이면 무거울만도 한데 어찌나 말랐던지 민형은 딱히 힘듦을 못느꼈다. 아침 매일 챙겨먹는 사람 맞아? 그렇게 걱정 반 긴장 반으로 도착한 1층 현관에는 황인준이 서 있었다. 눈이오나 비가오나 제가 먼저 도착하는 날이면 1층 현관에서 시간 맞춰 서 있었다. 가끔은 제 친구들 셋과 같이 나와있다가 '오늘만 형 좀 부탁할게요.' 라는 황당한 부탁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 꼭 동영은 이동혁을 씹었다.
2년만 있으면 지들도 고 3인데 언제까지 저렇게 펑펑 노나 보자. 그리고 사실 난 쟤 맘에 안들어. 애 옆에 찰싹 붙어가지고. 그리고 황인준 완전 애늙은이인 척하는데 알고보면 그냥 애야 애.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데 이동혁이 감당할 수 있을거 같아? 가만히 듣고 있던 민형이 와학학 웃었다.
"민형아 너 웃는거 되게 피망같다."
웬일인지 그 후로 동영 앞에서 웃을 때는 꼭 인중을 늘리는 것 같았다. 이민형 습관이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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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 그랬었는데 내가 데뷔하고 연락 끊어버리고 참. 매정하다. 정도 없다 김동영. 사실 민형과 연락을 끊었던건 순수 동영의 의지는 아니었다. 소속사 방침이기도 했고 그만큼 바빴었다. 뜨지 못한 만큼 별별 행사를 다 다녀야했기에. 7년만에 만난 얼굴은 한층 어른이 되어있었다. 동영의 기억 속에 살던 귀여운 이민형보다는 좀 더 성숙해졌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동영이 형."
동영이 3번째 미니앨범 타이틀 때문에 처음 가본 녹음실 반대편에는 이민형이 앉아 있었다. 웃는 낯으로. 고등학생 때 제게 지어줬던 그 웃음 그대로. 인준을 통해 민형이 고 3때 진로를 바꾸고 재수해 작곡과를 갔다는 말을 들었지만 조금 낯설었다. 이름도 모르는 기계 앞에 앉아있는 이민형이.
민형은 자신이 HN 엔터 소속 작곡/작사가라고 했다. 예명은 제 원래 영어 이름 마크를 쓴다고 했고. 덤으로 동영이 불렀던 오스티 작곡도 제가 한 거라고 밝혔다. 이민형 앞에서 동영은 꿀먹은 벙어리였다. 어 내가 어디부터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잘 지냈니. 글쎄요 2년 기다리라 해놓고 없어져서 좀 서러웠는데. 진짜 원웨이 러브여서. 그래도 저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 여기 있는 거겠죠? 사실 형 소식 다 인준이한테 들어서 괜찮아요. 그리고 형이 저희 엔터 들어온 것도 제가 강력 추천했던 것도 있었고요.
안절부절하던 동영을 눈으로 쫓던 민형은 푸스스 웃었다. 형 이제 연락할 수 있는거죠? 어? 어 응 그렇지. 번호 바껴서 연락도 못했는데 번호 주세요. 그 동안 아무도 저 안 귀여워해줘서. 좀 섭섭했거든요. 김동영은 속으로 꽤 안도했다. 언젠간 연락 해줘야지. 내년에 고 3인데 안 힘들어하려나. 생각만 하고 연락 한 번 못줘서 길 가다 어깨빵 당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제 눈 앞에 이민형은 꽤 괜찮아 보여서.
"형 근데 사실 저한테 미안하죠."
어 그걸 말이라고 하니. 석고대죄해도 모자랄 판에. 타국에 혼자 온 애 그렇게 남겨두고 갔는데 마음이 편하겠니. 그것도 나랑 학교 같이 다니고 주말 같이 보내고 그랬는데. 대학생 되도 내가 다 챙겼는데. 그래놓고 갑자기 그렇게 토꼈는데. 그럼 형 라디오 DJ 해주면 안돼요? 디제이? 넹 사실 저 아는 지인이 신규 편성 하게된다고 해서. 형 예전에 활동할 때 라디오 같은거 나온거 듣고 괜찮다고 제가 아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물어보래요. 어차피 형 예능 안좋아하니까 라디오는 괜찮지 않을까요? 일주일에 두번만 한데요.
오랜만에 본 얼굴의 쌩뚱맞은 제안이었다. 어 그러지 뭐. 사실 라디오 DJ 좀 환상도 있고 해서 괜찮을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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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마음에 들었기에 괜찮을거라고 믿었는데, 방송이란게 또 브이앱이나 인스타 라이브와는 달랐다. 견학 겸 가본 라디오룸에서 동영은 긴장감을 느꼈다. 대본대로 읽기도 해야하지만 가끔 애드립도 쳐줘야 했고. 일주일 내내 라디오 부스만 돌아다닌 결과 한숨이 부쩍 늘었다. 민형의 라디오 부탁을 받고 2주째 보고 듣고 연습하는 중이었지만 여간 쉬운게 아니었다.
결국 긴장은 동영의 첫 라디오 30분 전까지 이어졌다. 단지 안심되는 것 하나라면 보조 피디가 태일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이란건 언제나 어렵다, 목소리로 7년을 먹고 살았는데, 라디오도 목소리로 진행하는건데 생각대로 되지가 않았다. 수고했어, 태일이 2시간 만에 스튜디오에서 나온 동영에게 건낸 말이었다. 잘했던거 같지도 않았는데 그 말에 들떠서 동영은 웃어보였다. 초반에는 목소리가 긴장한 티가 묻어나오더니 후반부로 갈 수록 그래도 나름 구색을 갖춘 탓에 호랑이 같던 피디의 표정도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형 오늘 그래도 형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진짜. 그에 태일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복도를 누비는 동영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보였다.
형 이 시간까지 저 기다려 주시고 감사합니다. 차에 타자 매니저가 미리 틀어둔 히터 때문에 따뜻했다. 덕분에 아까의 긴장이 다 풀리는 듯했다. 동영아 너 마크한테 문자 몇개 와 있더라. 민형이가? 왜? 그야 나도 모르지. 차가 출발하자 심바 모양 방향제가 앞뒤로 흔들렸다. 방향제 바꿨네? 어 아들이 유치원에서 만들어왔더라. 귀엽지? 동영은 그게 꼭 이민형 같다고 생각했다.
"민형아 문자 했네. 형이 이제 봐서. 어 지금 회사 가는 중이야."
"형 라디오도 했고 피곤하면 내일 봐도 괜찮은데."
"아냐 거의 다 왔어."
응 알았어. 끊어어. 이 시간에 왜 회사로 불렀데. 글쎄 급한 일? 뭐 저번 녹음 수정이라던지. 그건 급한게 아니긴한데. 진짜 마크는 볼 때마다 열정이 넘치네.
열정, 이민형에게 퍽 잘 어울리는 단어였다.
형 나 늦을거 같으니까 먼저 들어가. 밤길 조심하고. 사옥은 어두컴컴했고 대략 민형의 작업실로 추정되는 곳만 불이 켜져 있었다. 혼자 올라가기엔 좀 그런데.... 그렇다고 작업하고 있을거 같은 애를 부를 수도 없었다. 다행히 내부에 최소한의 불은 켜져있어 오싹한 체험따윈 하지 않아도 됐다. 오옹 형 왓어요? 작업실로 들어서자 마자 민형이 하이톤으로 동영을 불렀다. 자 이거 니꺼. 손수 빨때까지 꽂아서 초코 프라푸치노를 민형의 입에 물렸다. 근데 너 왜 불을 하나만 켜놓고 이러고 있냐. 어 왜냐면,
"와아아아!!! 김동영 첫 라디오 디제이 축하해!"
동영의 반대편에서 선글라스에 고깔모자에 플랜카드까지 든 삼인방이 튀어나왔다. 이, 이게 뭐야. 기겁을 한 동영 옆에서 민형은 태평하게 박수까지 쳤다. 아 사시일 왜 막 아이돌 그룹같은데서 멤버가 뭐 엠씨나 디제이하면 축하해주고 그러는데 우리도 해줘야할것 같아서. 아니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형은 언제 왔는데..? 나? 나는 그냥, 내 차 타고 밟았지. 아 거 참. 동영이 헛웃음을 지었다.
동혁의 주도 하에 간 술집은 꽤 조용했다. 칸도 나눠져있고. 김동영 축하해! 앞으로 화이팅! 을 외치던 셋은 금세 아무렇게나 널부러졌다. 얘네 보내야하는거 아니야? 어 저 카카오 택시 불러서 곧 올거 같아요. 동영은 좁은 택시에 셋을 아무렇게나 밀어넣었다. 인준아, 형 비번 알지? 제대로 들어가고. 그나마 멀쩡한 인준을 내세워 셋을 제 집으로 보낸 동영은 그제야 다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밖에서 진땀 빼고 왔더니 안은 더 가관이었다. 오우 형 왔어요? 다 먹은 소주병을 망원경마냥 눈에 대고 휘적거리는 폼이 여간 웃긴게 아니었다. 애도 아니고 한눈 판 사이에. 동영은 헛웃음이 다 나왔다. 나 축하해주러 왔다면서 다들 지 흥에 취하면 어떡해.
"아니 사실 형 진짜 못됐어요"
그렇게 잠수타고, 2년만 기다리라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7년이나 없어지는 게 어딨어요. 맨날 귀여워 내 동생이랑 바꾸자 말도 안되는 말만 골라했으면서. 형 진짜 나쁜놈이에요.
술에 취한 상태인 주제에 딕션은 좋았다. 덕분에 동영은 10분 내내 줄줄 읊어지는 모든 말들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얼마나 제가 얍삽한 놈인지. 파렴치하고 못됐는지.
"민형아 일단 진정 좀 하고,"
내가 뭘 했다구요...? 그래도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형 때문에 아니 그게 형 때문은 아닌데 그래도 형 때문에 재수해서 대학도 열심히 다니고. 근데 형은 제가 인준이랑 같은 대 같은 학번 같은 과인것도 모르잖아요. 그죠? 그리고 형 그 때 나 안 받아준거 내가 캐나다인이라서 그런거였죠? 나도 이제 다 알아. 한국인 김동영은 진짜 못된 놈이라는거를. 근데 이건 몰랐죠, 저는 한.국.계 캐나다인이라고요. 그리고 나는 그냥 형이 음악하는게 그냥 그게 좀 진짜 멋있어 보이더라구요. 나도 처음엔 좀 헷갈렸다? 내가 김동영을 동경하고 있는건지 동경하고 있는건지. 친한 형으로서 좋아하는건지 아닌지. 지금 제가 좀 이동혁같고 막 진상같은 것도 아는데 근데 진짜 나는 좀 무섭다고요. 형이 모르는 그런거라고요 이게. 나는 형이 민형아라고 발음하는 것도 좋아하고. 왜, 이마크도 맞는데 나는 이민형도 맞잖아요. 근데 그렇게 이민형이라고만 불러주는건 형 밖에 없어. 아니 근데 내가 아직도 형을 좋아하는건 아니야.... 아니 근데 좀 좋아하는거 같긴 하고, 그래서 더 참담해. 연애도 했고 할 거 다 했는데 형 보면 막 서럽잖아. 근데 형은 모르잖아요. 맨날 피망이라 놀리고 파프리카라 놀리기만 하고. 그 형 때문에 막 그 전에 연애는 다 가짜같구, 나 완전 바보로 보일거 아니에요오!
두서없이 되는대로 내뱉던 입이 다물렸다. 민형이 그대로 앞접시에 코를 박았다. 야야, 민형아. 이민형?
동영은 민형을 겨우 업어 가게를 나왔다. 민형아 정신 좀 차리고. 우응.... 입술만 쭉 빼고 칭얼거리는게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어보였다. 몇년 전만해도 제 코밑까지 오던게 꽤 커졌다. 민형의 팔다리를 제대로 추스리고 걸었다. 엎힌 까닭에 자꾸 민형의 코에서 조개탕 냄새가 났다. 닦는다고 물티슈로 닦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웅얼거리며 눈을 감은 민형 때문에 자꾸 웃음이 나왔다.
동영은 내일이 기다려졌다. 얘가 과연 어떤 얼굴로 저를 볼지. 땡그란 눈으로 저를 바라볼게 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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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음은 dodoy07님의 사연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술전공인 고3 수험생입니다. 처음엔 순수하게 미술이 좋아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원 가는 것도 즐거웠고 작품 하나하나 완성하는게 기대됬는데 요즘은 조금 슬럼프가 온 것 같아요. 또디도 예전에 미술 전공을 했다고 들었어요. 또디만의 슬럼프 극복 방법이 있나요?' 라고 보내주셨네요."
어, 제가 미술 전공했던건 어찌 아시고 하하. 저도 물론 슬럼프가 왔었죠. 저는 그래서 오히려 취미를 몰래 만들었었어요. 미술 관련된걸로요.
음 이건 제 지인들도 모르는 사실일텐데 제가 사실 미술에 흥미를 가지게 계기가 유화였거든요. 근데 이제 입시를 준비하면서 멀어졌었고 그러다가 좀 슬럼프가 심하게 와서 다시 유화를 조금씩 하게 됐던 거 같아요. 저는 지우개 많이 쓴다고 지적을 받았었거든요. 지우개 많이 쓰면 번지고 구겨지고 흔적 남잖아요? 습관이기도 했고 실수도 많이 했고. 또 저는 물 들어가면 종이 일그러지는게 되게 싫었거든요. 근데 반대로 유화는 그런게 없어요. 실수해도 덧칠하면 지워지고. 좀 더 제가 원하는걸 표현할 수 있다고 해야할 까요. 좀 더 과감해질 수 있어서 가끔 이렇게 학원 쉬는 날이나 주말에 캔버스지 4등분해서 그렸던거 같아요.
또 크로키도 많이 했어요. 사실 제가 그 때 좀 몰래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 몰래 힐끔힐끔 보면서 막 선 연습도 하고 그랬던거 같아요. 입시미술이랑은 좀 동떨어져있죠? 그래도 그 때 가장 중요한 걸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해서 오히려 저는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오랜만에 그 때 생각하다보니 말이 좀 길어졌네요. dodoy07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사연 읽기 전에 노래 한 곡 듣고 오실게요. 레드벨벳의 You Better Know.
"동영아 일주일 좀 했다고 곧 잘 하네. 수고했다. 가는 길에 커피 하나 받아가고."
"감사합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스튜디오에서 벗어난 동영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핸드폰을 키자마자 밀린 문자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 중에 제일 상단을 눌렀다.
이민형💗
형 오늘 라디오 끝나고 한강가서 자전거 콜? 지금 날씨 짱 좋은데
형형 지금 그거 크로키 저예요?
진짜 저?
말도 안돼 오바
사랑해요 올 때 쥬시!!🍉 🍉
쥬시 문 닫아서 회사 앞에서 바나나 스무디 사갈게
넹 빨리 와용
나 지금 걸어가고 있어 10분 있다 나오세요~
곧 민형이 사진 하나를 보냈다. '형 이거 저 캐나다에서 가져왔던건데 사실 이거 등교용. 근데 형이랑 약간 같이가고 싶어서 얘 한 번도 안탔어요. 완전 추억'
스파이더맨이 붙여져있는 자전거였다. 화면을 빤히 들여다보던 동영이 푸스스 웃었다.
이민형 닮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