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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를 구하려는 착한 마음이 피노키오를 진짜 아이로 만든 거랍니다"
이야기가 거의 끝나자 아이는 이미 잠에 빠져들어 색색거리고 있었다. 마크는 곤히 잠든 아이를 침대 위에 조심히 내려놓고는 쥐 죽은 듯 방안을 빠져나왔다.
'도연이는 잘 재웠어?'
도영에게서 온 문자였다. 마크는 살짝 문을 열어 곤히 잠든 도영의 조카를 사진으로 찍어 도영의 메시지에 답하자 귀여운 엄지 이모티콘이 되돌아왔다.
1
저 멀리서 기차가 들어온다.
추운 날씨에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은 마침내 들어오는 기차를 보고 일렬로 줄을 서 탈 준비를 한다. 속에 섞여 있는 멀건 얼굴은 검은 가죽장갑을 낀 손에 작고 하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다. 그가 어딘가를 꼭 응시하고 있는 눈은 차분해 보여 꼭 사냥감을 노리는 호랑이 같다. 열차가 서서히 멈춰선 후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줄줄이 네모난 구멍으로 이어 탄다. 그 안에 섞여 있던 자도 그 뒤를 따라 열차 안으로 올라탔다.
열차 칸과 칸 사이를 일정한 박자로 한 발 한 발, 사람들을 지나쳐 원하는 칸에 다다른 건지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 열차가 곧 출발하오니 승객들은... '
열차가 곧 출발한다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4개 국어로 번역되어 역 전체에 울려 퍼진다. 일정한 박자로 걷다가 느려지던 발걸음은 정확히 한 좌석 앞에 멈춰 선다.
11호 차 8B.
그는 좌석에 앉아 손톱을 잘게 씹고 있던 중년의 남자에게 작은 케이크 상자를 건넨다. 중년의 남자는 자신의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말없이 그가 건네는 상자를 손에 받고는 그것을 한참 쳐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다시 뒤돌아 일정하게 나열된 좌석 의자들을 지나 걸음을 빨리한다.
57...
58...
마크가 직사각형 구멍으로 빠져나온다.
59...
문이 굳게 닫히고, 열차는 다시 부지런히 움직일 준비를 한다.천천히.
00...
' 출발 '
지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탄 후 구석에 박혀있는 CCTV에 방긋 웃으며 마크가 귀엽게 손을 흔든다. 화면 안, 멀리서도 반짝이는 눈을 보던 도영은 잠시 턱을 괸 채 그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짧은 기계 소리와 함께 방안을 가득 채우던 화면들이 모두 동시에 검은색으로 채워졌다. 회전의자에 앉아 발로 바닥을 밀며 오른쪽 왼쪽으로 뒤틀던 도영은 일이 모두 끝났다는 안도감에 작게 한숨을 쉰 뒤 책상 위에 이미 다 식어버린 커피를 호록 마셨다.
쾅
그때쯤 밖에서 광음과 함께 진동으로 바닥이 흔들린다. 괜히 불길한 기분이 든 도영이 얼른 창문을 열어 보자 밖에선 멀쩡히 철도 위를 달리는 열차가 그의 시야 앞을 가로지른다. 말도 안 돼 이게 뭐야 씨발 이게 뭐냐고. 가슴이 하늘에서부터 지상까지 철렁 내려앉는다. 손에 쥐고 있던 머그잔을 놓치자 쨍그랑하는 진동이 고막을 울렸다.
굳게 닫혀있던 철문을 열고 약에 취한 사람처럼 이게 아니야 이건 아니야 같은 말을 되뇌면서 계단을 내려가던 도영의 앞이 훅하고 밑으로 꺼졌다. 다리가 풀려 입구 바로 앞에서 고꾸라진 도영이 고개를 쳐들고 기차역을 바라봤다. 검은 연기가 기차역 너머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기차역 앞을 지나던 사람들, 나오던 사람들, 들어가던 사람들이 일정하게 모두 멈춰서서 기분 나쁘게 피어오르오는 검은 연기를 구경했다.
삐-
[ 마크 리. 오후 2시 48분 9초 사망 ]
넘어진 탓에 액정이 산산조각이 난 태블릿에서 알림이 올라왔다. 뾰족하게 금이 간 액정은 흩어져 불안정한 빛을 띄고 있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이마크가 왜 죽어
귀에 가득 찬 소음과 함께 멈춰버린 같잖은 심박 수 소리가 마크의 사망을 선고했다.
"도영 빨리 타! 시간 없어 도영!"
도영의 앞이 핑 돌았다. 차 안에서는 텐이 재촉하고 있던 것 같은데
토할 것 같은 정신머리가 빨리 타라는 텐의 말을 듣지 못하고 귀에서 이명처럼 심박 수가 멈추는 소리가 맴돌았다. 운전자석 앉아있던 누군가 도영을 둘러업어 차에 태우고 나서야 차가 출발했다.
멀어져가는 시야에 점점 작아져 보여야 하는 것들 사이에서 연기는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이건 다 거짓말이야 꿈일 뿐이야 날 깨워 어서 깨워도영이 허공에 대고 소리치려고 하자 목소리가 막힌 듯 그를 빨아들였다.
2
"형 이제 일어나요"
시끄러운 커피머신 소리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도영을 깨웠다.
'아, 꿈'
눈을 뜨자마자 숨을 여러 번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 꾸던 악몽 때문에 괜히 힘이 들어가 있었는지 온몸이 이틀 밤은 샌 것처럼 피곤했다.
"왜 울어요?"
어... 나 우나? 도영이 눈가를 비비자 손등에 촉촉하게 물이 묻어나왔다. 무슨 나쁜 꿈이라도 꿨냐고 묻는 마크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도영은 서 있는 그를 잡아당겼다. 목에 팔을 칭칭 감아 고개를 묻으니 어리둥절한 마크는 얼음이 되어 왜 그러냐는 질문도 하지 못한 채 도영에게 푹 안겼다. 그 품에 숨소리를 느낀 짧은 몇 초동안 마크는 심장이 위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안정이 된 도영이 천천히 몸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크는 쭈뼛쭈뼛 토스트 해놨으니까 세수하고 오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섰다.
도영이 커튼을 걷으니 잠깐 시야가 섬광으로 환했다가 금방 제자리로 돌아왔다. 가장 높은 층인 이곳의 큰 창문 밑으로는 언제나 그랬듯 시끄럽고 복잡한 도시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세상에 나올 거라 굳게 믿고 있던 날개 달린 자동차 대신 택시기사가 사라졌고, 가상의 공간이라는 개념 덕에 몇몇 기업이나 은행들은 더는 건물로 존재하지 않았다. n 차 산업 혁명으로 세상이 뒤집힐 거라 예언했던 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매일 아침 국회의사당 앞은 시위대로 가득 차 있었다.
' 우리들의 직장을 돌려내라, AI는 사라져야 하는가, 인공지능에 반대하는 자들의 시위.. ' 와 같은 문구가 인터넷 신문 1면을 꽉 채웠다. 소수의 반란에 몇몇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듯 토론 프로그램을 내세웠고, 전혀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자들만이 모여 고민하지 않은 말들을 마구잡이로 내뱉었다.
그 때문에 기술이라 불리는 무언가를 개발하고, 연구하고, 그것을 탄생시키는 일을 많은 사람이 했다. 그와 동시에 당연하게도, 탄생한 기술들을 개조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이도 있었다. 선한 목적이 아닌 어떤 것들을 망치고 자신의 이익을 가지려는 사람들. 나라는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도영과 같은 사람들이 필요로 했다.
"나라에서 하는 일인만큼 수입은 짭짤할 거예요. 그에 따른 책임도 크겠죠."
그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일인지는 기억이 흐릿했다. 나랏일 돈 보고 하는 건가요. 하하. 다 사회를 위해서 하는 일인 거죠. 옆에서 그의 손에 들린 돈 가방만 바라보던 이동혁이 옆에서 능청을 떨었다. 그럼 저희가 했던 일들은 기록에서 사라지는 건가요? 영호 형이 묻자, 남자는 블랙마켓에서 있던 모든 일은 덮어주겠다는 어마어마한 약속을 했다.
더러운 과거를 한순간에 청산해준다는 말에 모두 이 일을 하기로 거의 찬성하다시피 했다. 언젠가는 발목 잡힐 일들이었고, 더는 다들 숨어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벌써 들 떠 있는 듯 발들을 동동 굴렀다. 그 사이로 혼자 아니꼬운 표정을 하고 있던 도영이 불쑥 들어와 그 대신 계약 기간만입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저를 찾아온 남자가 건네던 가방을 멋대로 집었다. 남자는 그럼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떠났고, 돈다발이 흩어진 책상 위에서 도영의 눈동자가 계약서를 위에서부터 꼼꼼히 훑었다. 그게 김도영이 가진 끝의 시작이었다.
3
와-
돔 전체가 환호성에 휩싸여 귀가 먹먹했다. 도영이 마크에게 스포츠 경기를 보여주겠다는 핑계로 데려온 곳이었다. 비가 적게 내린 탓인지 젖은 사람들의 땀 냄새, 잔디 냄새, 그리고 미미하게 쇠 냄새가 유독 도영의 코앞을 스쳤다.
구역마다 베팅하는 사람들, 핫도그를 사라고 장사하는 사람들. 사람. 인간. 인간들. 덕분에 도영이 형이 배는 고프지 않겠다. 마크는 혼자 중얼거렸다. 오늘 하루 동안 먹은 게 아침 마크가 차려준 토스트가 다인 도영이 핫도그를 한입에 와앙 물자, 밑에서는 스테이지가 동그랗게 올라왔다. 전광판에 선수 얼굴이 비치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마크는 전광판은커녕 경기소리도 듣지 않았다. 찢길 듯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옆에서 그 사람들과 똑같이 손뼉을 치며 일어나는 도영을 그저 조용히 바라봤다. 손뼉 치는 도영, 아쉬워하는 도영, 핫도그를 먹는 도영, 즐거워하는 도영, 일어나 춤을 추는 도영. 그가 낯설어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에 김도영만이 있었다. 마크는 아주 잠깐 눈을 감고 싶었을지도.
4
스포츠 경기가 끝나자 관객들은 하나둘씩 일어나 벌떼처럼 돔을 빠져나오고 있었고, 돔 바깥으로 나오자 역시나 상쾌하지 않은 공기가 그들을 반겼다. 으휴 미세먼지가 이래서 안 되지. 도영은 상쾌하고 깨끗한 공기를 마셔본 적이 언제쯤이었나 생각했다. 그 넓은 공간을 차지한 많은 사람과 사람들, 그사이에 마크가 우뚝 서 있는 게 괜히 이질감이 들어 도영은 눈치를 봤다.
- "김…. 도영?"
시끄러운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도영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덥석 잡아오는 손에 뒤를 돌자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서 있었다.
"이태용? 형이 왜... "
이태용은 도영이 절 알아보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도영의 기억 속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방금 떠오르게 됐다. 이태용은 도영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마크를 본 후 고개를 잠시 까딱이며 눈인사를 하자, 마크도 그와 똑같은 각도로 고개를 까딱인다.
"지금 시간 잠깐 있어? 우리 잠시 어디 가서 이야기해. 할 말 많잖아"
태용은 그제야 도영의 손을 놓았다. 태용의 말에 머뭇거리던 도영은 옆에 붙어있던 마크를 쳐다봤다.
"마크 미안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데 너 먼저 집에 가 있으면 좋겠는데 괜찮아?"
마크는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도영은 그의 대답을 듣고 난 후 앞장서는 태용을 따라 인파 속으로 끌려들어 가자 마크는 끌려들어 가는 도영의 손을 덜컥 움켜쥔다. 왜? 뒤돌아보는 그의 두 눈을 또렷이 바라보던 마크는 다시 손을 놓는다. 아까 그 표정이 아닌데. 마크는 혼잣말한다. 아니에요. 그리고 정신없이 집을 찾아 밤거리를 거니는 수많은 사람의 물결 속으로 숨어든다. 천천히
5
경기장 근처 가장 가까운 술집에 들어가자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흘러나오는 낯선 노래 그리고 가게 안의 차가운 바람 같은 것들이 도영에게 스쳤다.
- "어떻게 된 거야"
- "난 네가 날 못 알아볼 줄 알았어."
대화의 시작부터 도영의 안부보다 그의 상황을 묻는 태용에게 감사를 느껴야 할지 도영은 생각했다. 그래도 어쩌면 '잘 지냈어?'라는 태용다운 멘트 따위는 하지 않아서 그는 어쩐지 안도감을 느꼈다. 이 형도 많이 변했네.
"...못 알아보긴 무슨"
도영은 태용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괜히 차가운 컵만 손으로 만지작댔다.
- "그래도 언젠가는 연락할 줄 알았는데 끝까지 안 하더라"
- "괜히 괘씸했었어 그때는"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도영은 태용이 아직도 저를 괘씸해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쿨한 척하는 거 보니 이태용은 역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냥 좀... 당분간은 누구랑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거 힘들어서"
- "..."
"싫었던 거일 수도 있고"
김도영의 습관은 여전했다. 거짓말을 할 때면 오히려 눈을 부릅떴다. 이 거짓말을 들키지 않으리라는 이상한 자존심 때문인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건 도리어 진실을 말할 때 티가 났다. 눈동자,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 하나하나가 전부 도영의 진실에 관해서 얘기해 주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태용은 허술한 도영의 진실이 불안한 듯 손톱을 깨물었다.
- "그럼 왜 아직도 안 받고 있어"
태용이 뜯던 손톱을 내리곤 그 속을 파고들었다. 치료를 이야기하는 거였다. 세상에는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있었고, 그 일 중 하나가 기억을 감내하는 거였다. 과거에서 벗어나는 일. 아픈 과거는 상처가 되고, 상처는 영원히 남게 된다고. 하지만 그건 지금 지울 수가 있다고. 담당 의사들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해주던 말이 아직도 도영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어떻게 받아 그걸"
도영이 풀썩 얼굴을 떨궜다. 그걸 어떻게 받아... 그걸.... 어떻게 지워...걔를 어떻게... 흔들리는 눈동자. 떨리는 손, 이미 젖어버린 뺨을 닦는 손.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일을 택한 도영이었다. 태용이 고개를 숙이는 도영을 바라보고는 얼음이 가득 담긴 유리잔을 손에 쥐고 마셨다. 물이 죽죽 흐르는 유리컵 때문에 태용의 손도 흠뻑 젖어가고 있었다.
"도영아 근데, 진짜 힘든 거 맞아 맞는데"
"... 선생님께 한 번이라도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게..."
태용의 말소리가 멈춰서 더 들리지 않았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소리에 묻히는 듯 서서히 사라지자 그는 지금은 바쁘니까 먼저 가보겠다고, 나중에 전화 꼭 하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카운터 앞에 서서 계산할 때까지도 도영은 고개를 들지 못했고, 태용은 그냥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내가 이래서 형도 잊으려고 한 건데
도영은 방금 한 일을 후회했다. 그냥 만나서 반가웠다고 말하고 바쁘다고 집에 갔어야 했다. 날 혼자 두지 말걸. 마크 손 잡고 집이나 갈걸.
6
태용은 2년 전에도 그랬다.
"치료는 무슨 치료? 형은 할 수 있어? 현실에서 도망치자고 그런 짓을 어떻게 해?"
- "도망치는 거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받아들이기 힘들면 받는 게 좋다고 하잖아 "
- "하 도영아... 그리고 여기서 더 일하려면,"
"나 여기서 일 안 해 이제"
- "별것도 아닌 일로 이러지 말자 제발"
"별 것도 아닌 일? 별것도 아닌 일이야? 그럼 형만 치료받고 끝내면 되겠네. 형은 할 수 있냐고 물었잖아. 내가. 할 수 있어? 그럼 해. 형이 하든 말든 상관 안 할 거고, 치료를 받을지 말지 결정은 내가 할 거고, 난 안 받을 거니까 마음대로 해."
도영의 말이 맞았다. 태용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한 사람을 인생에서 지워버린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태용이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문밖을 나서며 너 지금 제정신 아니라는 말을 남긴 채 돌아섰다.
그의 말대로 제정신이 아닌 도영은 짐을 쌌다. 거지 같은 돈. 개 같은 사회. 내가 그만두고 말지 다 잊고 말지 다 잃어버리고 말지 그깟 말도 안 되는 의료기술이 뭐가 중요해 내가 할 수 있어 내가 잊으면 돼 입술을 씹으며 도영은 그곳을 나왔다.
7
현관문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곧바로 도영은 침대로 직행했다. 어디 가서 술을 마시고 온 건지 볼이 발그레해져 마크를 부르며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가끔 넌 진짜 같아 아니야 으음 가끔 네가 가짜 같아 너는 진짠데 가짜 같아. 내가 잘하고 있는 거야? 아니지 사실 못하고 있는 거야. 너는 여기에 없는데... 마크. 무슨 말인지 알지. 그치 나도 알아... 마크 너는 알아. 분명히 알아... 분명히 너는 알고 있어... 너는... 똑똑하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너는 진짜인 거지... 그게...
"형 저는 진짜예요."
어둠 속에서 마크가 감겨가는 눈꺼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지만, 도영은 그대로 손에 재킷을 쥔 채로 잠이 들었다. 도영은 술에 취하면 같은 말을 반복하는 주정을 떨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마크는 도영의 손에 쥐어진 자켓을 빼 옷걸이에 반듯이 걸었다.
난 네가 보고 싶었을 뿐이야 정말 그게... 다야…. 멀리서 도영의 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크는 옷장을 닫고 침대로 걸어가 널브러진 도영의 옆에 누웠다.
여기 나 있어요. 늘어진 도영의 머리를 두 팔로 부드럽게 감은 채 마크는 속삭였다.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위아래로 쓸어, 꼭 곧 잠들 토끼를 쓰다듬는 것 같아 보였다. 마크는 나 있어요. 나...여기 나 있어요. 형... 하고 도영이 술에 취한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곤히 잠든 그의 머리칼을 한참 쓰다듬었다.
마크는 도영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95% 정도의 정확도로 읽을 수 있는 게 마크였는데, 도영의 표정에서 나오는 감정들은 단 0.1%로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마크는 항상 그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8
이태용은 그날 이후로 꾸준히 나를 찾았다.
- "네가 쟬 만든 것 같아? 네가 신인 것 같지 엇비슷하게 만들어낸다고 똑같은 건 아닌 거 너도 알잖아."
"언제부터 신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태용을 우연히 마주쳤던 게 잘못이다. 이게 다 신의 뜻인 거야? 다 잊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동안 추슬러 온 마음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마크라는 기억들을 모두 지우는 일보다 잔인한 짓이 없다고 믿었건만, 신의 뜻이라면 신은 그보다 더한 짓을 나한테 하고 있다. 평생 그 일을 잊을 수 없게 말이다.
"언제부터 신을 믿었냐고. 마크한테 업로드 했던 값이 똑같이 저기 들어있어. 그런데도 걔가 마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어 형은?"
걘 알아? 뭐? 걔는 아는 거냐고 자기가 마크라는 사실을 알아? 이미 몇 년 전에 사라진 존재가 다시 자기의 몸으로 회생한 거. 아니면 자기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라는 거 알아? 알고 있어? 네가 치료를 받든 안 받든 이제 더는 말 안 꺼낼게. 그래 네가 모두 잊을 수 있다면 모두 잊어 근데 네가 망가지는 꼴은 못 봐줘 윤리적으로 맞는 일을 해 솔직히 너 그 사람들이랑 똑같은 짓을 하는 거야 그렇게 해서 네 마음이 채워지고 있는 것 같아? 아직도 그 애가 세상에 있는 것 같지 고작 인공지능이라는 게 진짜 마크랑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 진짜 마크였다면 그런 말을 내뱉었을 것 같지 아닐걸
아닐 거야 도영아
도영은 태용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사실 그의 말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괜한 욕심에 붙잡고 있던 게, 억지스러워도 기억을 지우지 않기로 하던 게 그였다. 자기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건지도 도영조차 알 수 없었다.
도영의 눈이 뺨 밑부터 점점 물들기 시작하자, 태용이 다가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 태용의 감정들, 따뜻한 사람의 온기가 도영을 감싸고돌았다. 너도 알아. 알고 있어. 하고 조용히 머리칼을 쓰다듬는 태용의 손이 슬펐다. 나도 잘 모르겠어 형 도영은 울음 섞인 목소리를 고개에 묻었다.
9
김도영에게
난 이제 곧 떠나. 갑작스럽게 보이겠지만 한참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라 나는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네.
그전까지 사실 너를 많이 찾아다녔어. 너 없이 지내는 동안 그날 이후로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고 혼자 많이 생각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마크가 떠났잖아.
도영아 나는 가끔 옛날에 우리가 함께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그때 듣던 노래도 생각나더라고, 아니면 음식이나, 아니면 냄새 같은 거 말이야. 그리고 아주 정말... 가끔은 그때랑 똑같이 따라 해보기도 했고. 궁금했거든 항상. 얼마나 좋았길래 예전의 우리는 그런 것들을 그렇게나 아꼈을까. 그런데 똑같이 따라 해본다고 해서 똑같이 느껴지는 건 아니더라. 있잖아. 과거는 되돌아보기만 하는 거지. 들춰보다간 망가져 버려. 밑에서부터 끝까지 쌓아 올렸던 조각 중에 가장 밑 부분을 들춰버리면 위에 있던 것들은 한순간에 무너져. 뭔지 알아? 넌 알 것 같아서 말이야. 똑똑했잖아. 그러니까 나는 네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라 믿어. 다시는 볼 일 없을 거야. 이제는 벗어나고 싶거든.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너도 그걸 원하는 것 같아서 그래. 난 네가 좋아하는 다른 것들을 다시 찾았으면 좋겠다.
이태용.
도영은 그렇게나 짧은 글을 오랫동안이나 쥐고 있었다. 요즘 시대에 누가 편지 같은 걸 써. 이 형도 진짜 웃겨. 종이에 한 글자, 한 글자 흑연으로 까맣게 채워진 글자들이 도영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나보고 똑똑하단다. 내가 그걸 알 거란다. 나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아닌데. 도영은 억울했다. 웃겨서 자꾸 입꼬리가 비죽비죽 금방이라고 헛웃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형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영은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마크는 모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옛날에는 말이야 백투더퓨처라는 영화에 날아다니는 자동차 이런 것도 나왔다고 했단 말이야. 본인이 평소에 가장 싫어하는 꼰대처럼 생각하던 도영은 편지라고 하기도 민망한 종이 쪼가리를 접힌 선에 맞춰 다시 접고는 휴지통에 처박을까 그러지 말까 한참 고민했다.
10
무슨 일 있어요? 아파요? 열이 심해요. 약국에 다녀올까요? 어젯밤부터 침대에 앉아서 밥도 안 먹고 생각만 하던 도영에게 마크가 한 말이었다. 마크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고개를 파묻던 도영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도영의 얼굴에 쓰인 슬픔의 강도가 그랬다. 누굴 잃었지? 사랑하는 누구를 잃은 거지
"이태용 씨에요?"
마크의 뜬금없는 물음에 도영은 조금 반응을 보인 것 같았지만, 그의 고개는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이게 아닌가. 도영이 느끼는 슬픔의 대상이 누군지 마크는 알아야만 했다. 도영의 열이 그치기를 바랐다. 마크는 해당되는 인물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나 사랑해요?"
도영은 고개를 돌려 저에게 그렇게 묻는 마크 얼굴을 쳐다본다. 맞다. 이거다. 마크다. 마크는 확신한다.
"맞죠?"
"눈빛이 그래요. 맞아요?"
하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마크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도영은 마른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신이 틀렸냐고 묻고 정답을 바라는 마크의 얼굴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도영의 눈동자와 얼굴을 살핀다.
" 미안해 "
자리에서 일어선 도영이 마크를 밀어내고 방문을 닫았다. 뭐가 미안한 거예요? 왜 미안해해요? 마크는 눈앞에서 닫힌 방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울음소리를 천천히 느꼈다.
11
마크가 눈을 떴을 때는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곳이었다. 넓은 철장에는 녹슨 냄새가 났다. 바닥에는 분해되어 널브러져 있는 부품들이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철장 너머에는 도영이 있었다.
[ 시스템 104 해체. 5분 01초 전 ]
"이게 뭐예요?"
마크는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너머로 보이는 도영에게 물었다.
"난 너 이용한 거야"
"넌 고작 기계일 뿐이고... 그리고.... "
"이제... 필요 없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 잘 못 알아듣겠어요.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죄송해요. 어디 가요? 저 꺼내주고 같이 가요 도영이 형? 형? 도영 형? 김도영형? 대답해주시면 안 돼요?
마크는 도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도영의 표정을 보고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도영이 점점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걸. 혼자 남게 되거라는 걸 말이다.
무릎을 꿇고 철장을 흔들며 형. 형. 이게 다 뭐에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하고 불러오는 목소리가 갈라져 귀를 뚫을 듯이 찔러온다. 도영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떨리는 발걸음을 그 목소리가 가슴을 꾹꾹 짓밟는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 마크의 목소리가 저 멀리 희미해질 때까지, 폭발음이 귀를 찢을 때까지
형 아니잖아요 맞아요? 형 아니잖아요 다 거짓말인 거잖아요 기계일 뿐이라는 게 무슨 소리예요?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형 어디 가요 자꾸 나 꺼내주고 가야죠. 형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그 말도 다 거짓말이었어요?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눈빛으로 맞죠 맞잖아요 그렇죠?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랑했다고 말해줘요 그것도 다 거짓말 아니라고 해줘요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한 거죠? 곧 용서해줄 거죠
마크는 예전에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영화 '트루먼 쇼'를 본 기억이 있다. 모든 것은 거짓이었고, 주인공이 아닌 모든 사람은 그를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 영화 속 주인공이 되고 싶어 산타할아버지에게 주인공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던 마크는 당장이라도 다시 그때로 돌아가 그 아이를 말리고 싶어 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영화 속 주인공이 되기 싫다고.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건 새드엔딩의 영화도 아니고, 끔찍한 악몽도 아니었다.
마크는 덩그러니 남았다. 그 전과는 다른 자리에 똑같은 형태로. 혼자 또 과거 속에 남고 있었다.
목소리는 분명 울고 있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크는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나 벽에 머리를 내리꽂았다.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머릿속이, 이미 꼬여버린 회로가 온통 빨간색이어서 앞이 보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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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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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도영의 눈에 초점 하나 없이 다리에 힘이 풀려 길 한가운데에서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쓸었다. 방금까지 뭘 하다 온 건지 잘 기억이 흐릿해져 갔다. 조금 전 들리던 누군가의 목소리도,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어디인 건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심장만 터질 듯이 뛰었고, 온몸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가 없고, 뇌리에 마크라는 이름만 잔상처럼 남아 머리를 맴돌았다.
하나
둘
셋
또 메모리가 생겼다. 앞에 있던 것은 전진하고 뒤에 있던 것들은 되돌아 사라진다. 이곳에서 탄생하는 기억 그리고 동시에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기억이 사라지는 세상. 모든 것들이 점과 선으로 뚝뚝 끊겨있는 세상. 중요한 것들은 의무적으로 깊숙이 넣어두고, 쓸모없는 것들은 모두 버려진다.
0과 1, 0과 1.
그 어디쯤을 떠도는 자들이 울부짖고 있었다.